홍성화
홍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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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서 뭘 볼까? / 우리가 알아야 할 일본 역사 이야기 / 한일 역사 제대로 알기 / 일본 속 백제 / 구다라기 마을 (구마모토)
건국대 홍성화 교수와 함께 하는 역사기행
예성문화연구회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일본 백제계 지명과 신사
달솔 일라 / 아리사등 / 규슈 / 고대사 / 백제마을
Korean culture(K- culture)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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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ЕНТАРІ

  • @cohahth2804
    @cohahth2804 2 місяці тому

    중국본토 요동지방에 백제가 있었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있더군요

  • @jjomsae
    @jjomsae 2 місяці тому

    교수님 말씀은 언제 들어도 흥미롭습니다 영상도 잔잔한 BGM까지 깔리니 여행 유튜버들 못지 않게 재밌습니다. 최근 일본은 왜 한국 역사에 집착하는가 1, 2권을 다 읽어서 그런지 더 와닿는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영상 올려주십쇼! 동탄에서 이정원 드림.

  • @Suky-jackyLee
    @Suky-jackyLee 2 місяці тому

    홍교수님의설명은 항상 깔끔해요.

  • @골프사랑-j2f
    @골프사랑-j2f 4 місяці тому

    광개토 비문에 나타난 왜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왜 일반백성들이 흉년에 식량을 구하러 신라에 왔다는 것은 일반백성 왜가 식량구하러 현해탄을 넘어 왔다고 볼수는 없지요

  • @sang-hoonkim7733
    @sang-hoonkim7733 5 місяців тому

    곤지가 왕비가 4명인데 1번째 왕비가 사마(무령왕)의 어머니고, 2번째 왕비가 아들을 3명 낳습니다. 모대(말다, 동성왕), 백발(청령천황), 남제(계체천황), 남제는 5왕자 중에 막내입니다. 사마는 그보다 10년 정도 더 어린 양자입니다. 3번째 왕비의 두 아들은 곤지 사후 권력투쟁에서 패하여 몰락합니다. 저 거울은 목지국(백제국) 진왕인 무령왕이 남제를 일본에 통치자로 봉하는 것입니다.

  • @dojang002
    @dojang002 6 місяців тому

    참 칠지도가 발견된 사실은 가관 입니다. 어떻게 내시경으로 역사 유물을 발견 합니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칠지도는 사용할 수가 없는 칼 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하시기 바라며 조롱어가 될 수 있습니다.😂

  • @Booster38
    @Booster38 7 місяців тому

    그 칼에 쓰인 금문의 끝 4자 "이 특별한 칼을 보내니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라!!" 이게 진상품을 올리는 쪽이 할 수 있는 말이나? 넌 실실 비웃는 매국노 이병도의 잔당

  • @이석희-z1c
    @이석희-z1c 8 місяців тому

    흥미진진하네요...

  • @정국봉-h7s
    @정국봉-h7s 8 місяців тому

    해외에 22담로를 두고 다스릴 정도로 국제적이고 강성했던 백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 @jigsam2
    @jigsam2 8 місяців тому

    왜가 지금의 왜가 아니고 백제가 대륙에 있었으면 말이 될듯

  • @김혜정-u5p6k
    @김혜정-u5p6k 8 місяців тому

    잘봤습니다.

  • @역사누나
    @역사누나 Рік тому

    구이신은 405년생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데, 408년에 태어났다고 근거없이 말하는 것이 강단유사사학의 수준, 성음 번역도 말도 안 되는 소리. ua-cam.com/users/shortsCUoE9Q93rQw

  • @흙탕물에날건져
    @흙탕물에날건져 Рік тому

    칠지도는 대청 /무왕때 만듬 만든지 2년후에 일본왕에게 하사함

  • @옥선엄-p9v
    @옥선엄-p9v Рік тому

    일본서기라.왜놈사기친역사는입에도담지말라

  • @달님-c1h
    @달님-c1h Рік тому

    칠지도는. 당시. 백제가 왜에. 세운. 임나 칠국을. 표하는것이입니다

  • @Herecomesthesun_Skyzero
    @Herecomesthesun_Skyzero Рік тому

    고맙습니다

  • @burnsg8725
    @burnsg8725 Рік тому

    자주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이 알려지고 논의가 되면 좋겠습니다.

  • @junseungwi5986
    @junseungwi5986 Рік тому

    칠지도는 백제왕이 일본천황에게 헌상한 물건임. 이하 참고... 倭國은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권 국가인 魏國이 중국 밖에 건설한 분국(分國)이고 倭國은 한국, 일본열도, 산동반도, 남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 동남아 여러 곳에 건국 1. 한국의 왜국 : 호남['ᄇᆞᆰᄯᆞᆯ(日本)']+경남[낙동강 이남, 가야(加耶, " 'ᄇᆞᆰᄯᆞᆯ'에 덧붙여 있는 땅'이라는 뜻] 한국 왜국의 세력범위는 황해도 이남지역이다. 그리고 한국 왜국의 본령은 "호남+경남"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征討)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백잔(百殘: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가 망하여 공주 지역으로 남천해 온 것을 말 함)' 신라는 예로부터 (倭)의 속민이어서 조공하였는데 '왜(倭)'가 신묘년(申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공파하고 신라를 정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에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손수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마나리'의 백제-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으로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토벌하였다. (注 ①백잔(百殘) ; 백제가 망하여 충청지역에 들어 온 것 ②이잔국(利殘國)='백잔', 이른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 지역을 말하는 구마나리(久麻那利, 차현-소백-금강을 잇는 지역)로 옮겨 온 백제. 백제의 본령은 황해도(帶方)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은 기원후 396년이다. 본래 해가 돋는 모양의 금강에서 비롯된 국호 일본(日本(ᄇᆞᆰᄯᆞᆯ))이 한반도의 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을 말하는 왜노국(倭奴國, 倭奴=아이누)을 정복하여 나중에는 일본열도가 왜국이 되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日本國'은 倭國의 하나인데 민족이 다르다.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倭國)'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경사(京師, 서안)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다. 고대에는 "人"과 "奴"를 구별하는데 倭의 건국세력은 중원대륙에서 온 "왜인(倭人)"이고, "왜노(倭奴)"는 일본의 원주민인 "아이누(倭奴의 일본식 발음)"족이다. '왜노'는 현재 홋카이도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일본의 귀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는 이는 중원대륙에 있는 "화산(華山)" 근처에서 옮겨 왔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현재 일본의 주류세력은 [중원대륙]⇒[전남(나주)]⇒[큐슈]로 이동하였음을 특히 유전공학적으로 규명하여 이를 정설로 공인하였다. 기원후 2세기에 한반도의 남부가 왜국임을 알 수 있는 국내 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남대방(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조조의 위나라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南帶方)이라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한다.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먼 땅을 대방군으로 하니,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연하면 조조가 세운 위나라(曹魏) 때 왜국의 본령인 호남 지역인 남원(南原)에 치소를 둔 남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 왜(倭)⊃한(韓:마한, 진한, 변한 ] 인 관계에 있으므로 왜와 한이 함께 '조위(曹魏)'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광한루에는 일정 때까지는 '대방고부(帶方古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원이 고대에 한 때는 남한 전체를 관할하는 도성이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마한(馬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백제와 진한(秦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신라, 변한(弁韓)의 소국에서 발전한 가야가 역시 왜국의 속국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신라가 왜국의 속국임을 여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옮겨보겠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제기]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사라국(斯羅國)'은 본래 동이 '진한(辰韓=秦韓)의 소국이었다. 魏時曰新羅宋時王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 (북)위((北)魏)' 때 신라라 하였고 송나라 때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실제는 같은 나라이다. '한국(韓國=마한)' 혹은 왜국(倭國)에 속했다. 부연하면,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에 해당하는 양나라(梁)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그곳에 신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가 마한과 왜국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면 백제에 대한 양직공도의 기록을 보겠다. [양직공도 백제 제기]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晋末 駒麗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晋平縣' 진(西晋 265~316)나라 말기에 '구려(駒麗=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遼西)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부연하면 백제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있었던 '래국(萊國)'과 '이국(夷國'의 유민인데 주나라(周國)의 봉국인 제나라에 의해서 점령되자 북쪽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게 되는데 다시 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만든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요동 동쪽 1천리 밖에 있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 요동 동쪽의 성읍국(城邑國)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서 유민이 되어 다시 산동반도로 오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동한(東漢) 말 동탁(董卓)이 권력을 전횡할 때 요동 출신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임명된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된 위구태(爲仇台)가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황해도(帶方)로 가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래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의 속국으로 한반도의 백제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이런 관계로 [마한⊃백제]이고, 다시 [왜국⊃마한]이므로 자연히 [왜국⊃백제]의 역사로 전개된 것이다. 즉 [왜국⊃마한⊃백제]의 세력 관계인 것이다. '래이(萊荑)'는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호남에서 나간 배달겨레에 의해서 건국된 대동강 이북의 단군조선이 다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나라(=은나라)가 되었는데 본래 고조선은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대국인 나라로 그 고조선(九麗,九黎)의 소국 중의 한 나라가 래국, 이국이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산동반도를 흐르는 황하(黃河)인 "제수(濟水)"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유민인 것이고 백제인의 본래 고향은 산동반도이다. 현재도 고량주로 유명한 산동성 연태시 인근에 '래이'의 옛 유적인 "래이성 유지(萊荑城 遺址)"가 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음을 다수의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隨書) 왜국전(倭國傳)] - 621년 편찬 -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 .

    • @junseungwi5986
      @junseungwi5986 Рік тому

      백제, 신라, 가야, 왜노국(일본열도)는 전라도 왜국(倭國)의 속국 1. 나주를 도성으로했던 호남의 왜국이 일본열도를 800 여 년 간 간접 통치, 큐슈로 옮겨간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200 여년 간 간접 통치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 한국역사, 나아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 전라도이다. 인류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전하는 곳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이다. 비파형동검의 90%가 출토된 곳이 여수국가산단 지역인데 공단 개발 전에 실시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발굴된 것이다. 또한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데,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전남에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거석문명의 유적이 전남이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라도는 단군조선이 아닌 인류최초의 나라 "진국(辰國)"이며 단군조선(=은나라)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의 번국(藩國)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왜국임을 기록한 사서를 보겠다. [후한서(後漢書)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한(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과 접하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진한(辰韓=秦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秦韓)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倭)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伯濟是其一國焉.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 ⇐ (이 부분을 잘 보기 바람) 큰 나라는 만 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네모진 모양으로 - 땅의 둘레 길이가 사천 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었다.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땅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모두 마한인이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한나라,BC206~3세기 초) 초기에 (기자)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 천 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국 왜국의 위치를 적은 최초의 사서인 산해경의 기록을 보겠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蓋國(=辰國)'이 강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倭)의 북쪽에 있으며, 왜(倭)는 연나라에 속한다. (참고 : 중국에서는 고대에 한국을 '개마국(蓋馬國)' '개마한국(蓋馬韓國)' '개국(蓋國)'으로 불렀다 함. 이러한 명칭은 나라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을 해석하면 '말 모양의 나라를 덮고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과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연결된 한반도의 산맥들이 거꾸로 보면 '말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임. 기자조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마한(馬韓)'의 국호도 여기에서 유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기자)조선이 '열양'(列陽-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의 하류지역의 북쪽 땅으로 동쪽 경계는 북남으로 흐르는 청천강의 지류)의 동쪽, 해북(海北- 대동강 이북), (백두)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나라에 속한다.) - 기원전 300년 경 기록 - 위의 기록이 기원전 300년 경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요서지역에 있던 기자조선이 이 지역을 을 잃고 후퇴하여 영토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축소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경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한서(漢書)] 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也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진개(秦開-전국시대 연나라 장수)는 胡(북방 유목민족)의 인질로 갔었는데 호의 신뢰를 받은 뒤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기자조선)'를 습격하여 공파하고 동호를 천 여 리 물리치고 '연(燕)'의 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 현재의 辽宁 辽阳市)에서 시작하여 '양평(襄平-현재의 辽宁省 辽阳市)'에 이르렀으며 '상곡(上穀-北京市 延庆县), '어양(漁陽-현재의 北京市 密云县 西南 三十里), '우북평(右北平-현재의 内蒙古 宁城县 西南)' '요서(遼西- 현재의 辽宁 义县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 단군조선=은나라=기자조선이다. 즉, 북한지역에서 시작한 남한의 진국(辰國)의 번국인 단군조선이 중원으로 가서 '은나라'가 되었고 나중에 주나라에 패하여 요서지역까지 밀리는데 이 때 주무왕(周武王)은 축소된 은나라의 국군(國君)으로 기자(箕子)를 봉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자는 은나라의 29대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30대 군주인 제을(帝乙)과, 비간의 형제이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숙부이다. 기자(箕子)의 뜻은 "기국(箕國)에 봉해진 자작(子爵)인 분"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公元前11世纪周武王建立周朝后,大臣箕子不愿在周朝为官,东逃至箕国。武王就把箕国和孤竹国“周代以之封于箕子” 기원전 11세기 주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후, 대신 기자가 주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기국에 이르렀다. 주무왕은 그를 찾아 기국과 고죽국을 기자에게 봉했다.

    • @junseungwi5986
      @junseungwi5986 Рік тому

      일본의 전신인 한국 왜국은 맨 처음 호남에 건국 사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왜국"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어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초습자에게는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팁'이 필요하게 된다. [구당서(舊唐書)]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日本國)은 왜국(倭國)의 하나인데 종족이 다르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그 나라가 해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으므로 日本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 또한, 왜국(倭國)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이름이 고상하지 않다 하여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倭國者, 古倭奴國也. 또한,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한다.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倭奴國)을 말한다.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倭國古倭奴國也. 京師로부터 1만 4천리 거리로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들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동서로 5월행 남북은 3월행이다. 세세연연 중국과 통하였는데, 왜국이라 함은 옛적 왜노국이다. 부연하면, 해모양의 금강 이남에 있었던 나주를 800년 도성으로 했던 왜국이 본래 아이누(倭奴)의 나라였던 일본열도인 왜노국(倭奴國)을 점령하여 왜국의 영토로 하였는데 나중에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王溥 (922년 ~ 982년) 저술 倭國古倭奴國也. 在新羅東南. 居大海之中.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신라 동남쪽의 대해 가운데 있다. 北限大海. 西北接百濟. 正北低新羅. 南與越州相接 북쪽은 대해와 경계하고, 서북쪽은 백제와 접하고 정북은 신라에 다다른다. 남쪽은 월주(越州)와 접한다. 두번째 문장을 부연하면, 일본열도는 북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하고 있고, (큐슈를 기준점으로 보면) 서북쪽 방향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와 접하고, 정북쪽 방향으로 가면 신라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즉 도성을 일본열도로 옮겨간 왜국의 한반도 영토는 백제의 남쪽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월주(越州)는 상하이 인근에 있는 소흥시(紹興市)인데 남중국의 또 다른 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왜국은 대체로 남월(南越)로 보면되는데 현재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을 영토로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남도(海南島)와 해남도 인근의 대륙영역이다. [한서(漢書)] 반고(班固 32년 ~ 92년) 저술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낙랑(樂浪)의 해중(海中)에 왜인(倭人)이 있는데 나뉘어서 백 여 국이 되었는데 때때로 와서 헌상하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 참고 : 박달(朴達, 한자표기가 日本)"= "배달(培達)" =조선(朝鮮)"="낙랑(樂浪)" 등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 이남의 땅, 즉 호남을 말하는 것임 -부연하면 한국을 '낙랑(樂浪)'으로 보고서 기록한 것인데 '해중(海中)'이라고 부른 곳은 크게는 한반도 남부지역, 좁게로는 호남을 말한다. '해중(海中)'의 뜻은 중국에서 한국을 보면 바다 속의 나라인데 즉, '바다 속에 있는 중국(천자국)'이라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진수(陳壽 233~297) 편찬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왜인(倭人)'이 '대방(帶方)' 동남쪽 '대해지중(大海之中)'에 있다.부연하면 '대해지중(大海之中)'은 역시 한국을 가르킨다. 『위략(魏略)』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왜국(倭國)'이 대방(帶方,황해도) 동남쪽 대해중(大海中)에 있는데 산도(山島:다도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바다를 건너 천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국 갈래의 나라다. [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398~446) 편찬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에 - 후한 광무제 -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알현했다. 사절은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하였는데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를 내렸다. 부연하면, 일본열도인 왜노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였는데 이곳은 왜국의 가장 남쪽 경계라는 뜻으로 지금의 큐슈의 북쪽의 일부가 전라도 왜국의 영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즉 왜노국을 간접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636년 완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왜(倭)는 스스로 태백(太伯 - 오태백) 후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긴다.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絕遠 대방(帶方)으로 가면 만 이천 여 리 떨어져 있는데, 크게 봐서 회계(會稽) 동쪽에 있는데. 회계와 왜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부연하면, 주나라의 창업군주인 주문왕(周文王)의 백부인 태백(太伯)을 왜인들은 시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큐슈)는 대방(황해도)으로 가면 12,000리인데 크게 보면 오늘날 상하이 지역인 '회계(會稽)'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일본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양서 계속...)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七千餘里 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대방(帶方)에서 왜(倭)로 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가야 한다.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칠천여 리를 가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하나 건넌다. 그 바다는 너비가 천여 리인데 이름을 한해(瀚海:남해바다)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천 여 리 되는 바다를 하나 건넌다. 미로국(未盧國)이 나온다. 부연하면, 황해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8천리를 가서 천리 바다를 건너면 큐슈의 미로국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미로국에서 다시 3천리를 가면 왜왕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알려주는데 지금의 간사이지역으로 도쿄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왜국은 처음에 큐슈에 있다가 영토를 확장하여 간사이쪽으로 간 것으로 북상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에 따라 '里'의 길이가 다른데 해안을 따라서 황해도에서 부산 정도가 8천리라고 하여 어림잡아 짐작을 하면 됨 -

    • @junseungwi5986
      @junseungwi5986 Рік тому

      고대에 황해도 이남은 왜국(倭國)의 세력범위이며 왜국(倭國)의 본령은 금강이남 즉, 호남 한반도 왜국의 본령을 알아보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24년 7월에 왕은 웅천책(熊川柵)을 축조하니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웅천강의)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지 아니하였는가. 왕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백성이 모이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성과 해자(垓字)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도리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곧 (웅천)책을 헐었다.) - 이 기록에는 전라도 왜국이 마한으로 기록되어 있음 - [일본서기 웅략천황]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이십년 겨울 고려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진멸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21년 봄 삼월,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공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였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치呼里縣之別邑也. 久麻那利 (구마나리=공주)는 곳은 임나국(任那國)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邑이다.)황해도(帶方)를 본령으로 하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망하면 왜국의 천황이 충청지역의 땅을 내어주어 부흥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다.그러면 일본이 건국된 곳의 기록을 보겠다. [日本書紀 神代紀 下] 1.皇孫乃離天磐座...且排分天八重雲 稜威之道別道別而 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황손은 '천반좌(天磐座)'를 떠나서... 천팔중운을 물리치고 그 위엄으로 길을 헤치고 개척하여 일향의 습(日向襲)의 고천수봉(高千穗峯)에 이르렀다. 旣而皇孫遊行之狀世者 則自 槵日二上天浮橋 入於浮渚在平處(...) 而膂肉之空國 自頓丘覓國行去(...)到 於吾田長屋笠狹之碕矣. 황손은 환일(槵日)의 두 산 위에 떠있는 다리를 걸어 내려와 평평한 물가에 내려.."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걸어서 오전장옥입협(吾田長屋笠狹)의 굽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2. 故天津彦火瓊瓊杵尊 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而膂肉之胸副國 自頓矩覓國行去 立於浮渚在平. 乃召國主事勝國勝長狹而訪之 對曰 是有國也 그러므로 천진어화경경저존(天津彦火瓊瓊杵尊)은 일향(日向) 환일(槵日)의 고천수(高千穗)의 봉우리에 하강하여..."여육의 흉부국(膂肉之胸副國)의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으면서 물가에 있는 평지에 내려섰다. 그래서 그 나라의 수장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을 불러서 “나라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3. 而立天孫之前 遊行降來 到於日向襲之高千穗 槵日二上峯天浮橋 而立於浮杵在平地 膂肉空國 自頓丘覓國行去~ 천손의 앞에 유행하여 내려와서 일향(日向)에 도착하여 고천수혜(高千穗)와 환일(槵日)의 두 상봉(上峯)의 천부교(天浮橋)를 걸어서 물가 평지에 내려서, "여육의 공국(膂肉空國)" 언덕을 지나 나라를 찾아 나섰다. 위 기록은 일본의 최초의 천황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곳을 보면 '등골뼈의 바깥 쪽에 붙은 살'이란 뜻의 '여육(膂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보인다. 첫째 기록 : 膂肉之空國(여육의 공국) 둘째 기록 : 膂肉之胸副國(여육의 흉부국) 셋째 기록 : 膂肉空國(여육공국) '空國'을 고어로 읽으면 [구무누리]인데 이것이 모음이 교체되어 [구마나리]로 바뀐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공주(구마나리)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마나리'는 차현-소백-금강이 이루는 구마검처럼 생긴 땅을 말한다. 훈요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요십조]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여덟째는 차현 남쪽으로부터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 지역을 말함)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나란하게 뻗어 내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이곳에 포함된 주군 사람들은... ( '下'는 포함된다라는 뜻의 한문의 일반적 서술이다) 차령-소백산-금강을 이어보면 척추뼈의 아래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강을 척추의 단면으로 보면 금강 이북이 척추의 바깥쪽이다. 그러니 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은 "등골뼈 바깥부분에 붙은 살 모양의 공지(空地, 두 나라간 완충지)인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을 '배달겨레' 'ᄇᆞᆰᄯᆞᆯ족'이라고 하는 여기서 '배달(培는 'ᄇᆞᆰ(日)'의 고어)' 'ᄇᆞᆰᄯᆞᆯ'은 해가 돋는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 이남 즉 호남을 말한다. 고어로 "ᄯᆞᆯ"은 '계집(女)'과 '뿌리(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배달' 'ᄇᆞᆰᄯᆞᆯ'의 한자표기가 곧 "日本"이다. 금강이남과 낙동강 하류 이남 지역을 핵심지역으로 하는 한국의 왜국(倭國)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도성을 나주에서 큐슈로 옮긴 후에 다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회복하여 호남은 '일본(日本)'이 되고 경남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가라(加羅)'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호가 한국에서 나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注: "임나(任羅)"는 행정관인 "사(司"를 파견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지역)

    • @junseungwi5986
      @junseungwi5986 Рік тому

      수메르(肅辰)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배달겨레 즉, 古전라인 인류문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여수반도, 고흥반도로 전하는데 대채로 여수, 순천, 고흥에서 문명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인류최초의 문명국인 제석환인(帝釋桓因)의 나라인 진국(辰國)의 고불교(古佛敎) 유적이 고인돌 유적이다. 황해도는 환인제석의 아드님이신 환웅성조(桓雄聖祖)의 나라인 '진번진국(眞藩眞國)'이고, 그 위쪽으로 평안도 이북이 환웅성조의 아드님이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나라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중원대륙으로 영토를 넓혀서 훗날 은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영토로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으로 단군조선(=은나라)는 중원대륙을 잃었으나 역시 단군의 나라인 주나라가 중원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인돌은 조식수련도량(調息修鍊道場)으로서 상고시대 사원(寺院)이다. 전남은 전세계 고인돌의 1/3이 있다. 그리고 금속문명 태동지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비파형동검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90%가 여수석유화학공단 조성 중에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세계최대의 비파형동검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인류문명은 3만년 전에 출현한 O3a3 P210 부계유전자 - 묘족 부계유전자 - 집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전남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진출하게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고인돌유적이 남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 남부지역에 25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중화민족으로 즉, 하화족(夏華族)의 표준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전국시대에 전남으로 유입되었고, 다시 전남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늘날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고시대 한국인=하화족(夏華族, 중국 상고 8대 귀족성 씨족)=일본귀족(華族)이기 때문에 한중일은 예로부터 동원(同源)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임금님을 '환인(桓因', '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환(桓)'은 '환하다'의 음차표기이고 '檀(밝달 단)' 역사 '밝은 뜰'을 음차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ᄇᆞᆰᄯᆞᆯ(日本)'에서 유래한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주나라 임금님을 '단군'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배달겨레(전라도 고인돌 유골인)=화하족(고대중원인)=일본화족(일본귀족)의 부계유전자는 O3a3 P201이다.이 유전자는 동이족인 묘족(苗族) 유전자이다. 한국왜국(韓國倭國), 일본왜국(日本倭國)을 대표하는 유적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일정 때 일본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바로는 전남에 약 25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인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천황족의 릉으로 현재까지 일본 천황족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곳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이다.호남은 고대에 왜국(倭國)이며 마한이 아니다. 그리고 백제도 아니다. 나아가 마한과 백제는 왜국의 속국이다.전방후원분의 해자 모양은 해가 돋는 모양인 금강의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대체로 200~500m 수준이며 한국 전국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3,000~5,000 여기가 있다. 전라도에 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배달국"이다. 한국의 최초의 국호가 "진국(辰國)"인 이유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국(辰國)의 도성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순천(順天)으로 옛적 지명이 바로 평양(平陽)이다.말하자면 원조 '평양'이 순천시이다. 순천시의 삼산(三山)이 최초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이며 이것은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순천 봉화산이 사자(獅子) 모습의 산인데 이것이 '스핑크스' 원형이다.한반도는 거꾸로 보면 '사자' '호랑이' '말' '닭' '새' 등의 모습이고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를 옆으로 보면 '나비' 모양이다.고래로부터 전하는 신수(神獸)는 대체로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미드 군(群)은 순천의 삼산을 은유한 건축물이고, 大피라미드의 네 갱도가 가르키는 별자리는 한반도이다. "오리온 자리"는 '나비' 모양인데 한반도를 바로 하여 대칭 이동하여 나란하게 그리면 한반도는 '나비'가 된다. "작은곰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한 마리의 '곰(熊)'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한반도는 옆으로 보면 '국자' 모양인데 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다."용 자리"는 한반도를 거꾸로 보면 '용(龍)'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성"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의 금강을 가르킨다. '용'은 구사설(九似設)에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에서 몸통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다리와 손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 한반도의 모습을 은유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보면 구사에 거론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환단고기는 일본 황실도서관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한 대 분량의 거대한 역사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적 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3천재라고 하는 이병도, 이광수, 최남선이라고 한다.환단고기는 전라도를 본령으로 하고 순천(順天)을 도성으로 하는 환국(桓國=배달국, 황해도 이남이 세력 범위)과 단군조선(檀郡朝鮮=은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라고 전해진다. 전라도의 역사를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몇 만년의 역사로 소급하는 장대한 역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정창원 환단고기의 공개로 전라도의 찬란한 상고사, 고대사가 정리되어서,전라도가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며,전라도가 인류역사의 최초 시작점이며,전라도가 피라미드를 포함한 세계 거석문명의 탯자리임을 세계역사학회에 공인되어 대한민국의 진정한 세계만방의 어버이 나라로 존숭(尊崇)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junseungwi5986
      @junseungwi5986 Рік тому

      중국학자가 중화민족(華夏族)=상고시대 한국민족(東夷族)임을 논증하는 글 上古中华史,其实是帝俊集团黄帝集团炎帝集团三集团历史 中华最古海 2018-01-04 投诉 阅读数:790 ​​ 真的假不了,假的真不了。分子人类学研究是探索上古中华史的重要参考。上古中华文明,实际是帝俊(东夷)集团,黄帝集团,和炎帝集团的集合,是海洋文明和内陆文明的集合,是风龙图腾集合。司马迁因为是陕西人,所以写《史记》没有重视东夷集团,误导历史。 中华民族,除了炎黄,还有帝俊。《山海经》多次提到帝俊。帝俊比炎黄更早。司马迁搞不懂《山海经》,自然没有将帝俊单独拿出来讲。《山海经》反映的信息不仅仅是大禹时期,更多内容比大禹时期更早。 一个很简单的道理,内陆没有海,没有海的概念,也不会有对海的感情,只能写《山经》,怎么可能写《海经》?龙,是陆地的龙大,还是海里的龙大?山东有山有海有东方,对太阳对风鸟对海龙的崇拜很正常。孔子讲智者乐山仁者乐水。孔子讲道不行,泛舟于海上。内陆的江湖可以和海比吗?《山海经》一开始只能是帝俊东夷集团神话体系。后期黄帝集团主导后,又纳入黄帝神话体系。 黄帝集团在打败东夷集团后,特别是黄帝孙子颛顼绝地天通后,东夷帝俊神话体系或取消或被合并到黄帝体系,只剩龙图腾体系,只尊黄帝。帝俊体系是风龙图腾并举体系。 说我们是龙的传人,其实,我们是风龙的传人。三星堆青铜神树就是帝俊东夷神话体系。是一部分东夷集团避战祸,将宗教神话祭祀礼器护送转入四川保护起来。黄帝集团打败东夷集团后,一部分东夷集团向西向南迁移。不用说山东境内近一万年前到春秋战国时期形成完整链条的考古发掘,就是分子人类学研究,也有重要参考。当然有不同意见和反对意见正常,可以在争论中和不断发展中,不断逼近历史事实真相。 分子人类学研究基本原理 DNA大部分存于生命体细胞核内,在细胞核以外如线粒体内存在线粒体DNA(mtDNA)。男性精子线粒体位于精子尾部。受精时,精子头部进入卵子体内,尾部自然脱落,所以子女的mtDNA只能来源于母亲,是母系遗传方式。父系遗传方式是男性精子细胞核中的Y染色体(Y-DNA),卵子没Y染色体。mtDNA只在母亲和女儿之间传递,呈严格母系遗传。Y-DNA只在父亲和儿子之间传递,呈严格父系遗传。 分子人类学研究的是父系遗传和母系遗传DNA序列,不是基因。 以下转自前些年复旦大学和其他机构分子人类学研究的一些结论。不当之处请指正,欢迎讨论。 O3是东亚的主人,也是汉族的主体。山东威海地区汉族O3比例全国最高,达到71.1%。(复旦大学生命科学院文波) 根据2007年相关研究,山西陶寺遗址的龙山文化居民中,上层贵族100%为O3类型,而根据2008年金力、李辉的数据,陕西仰韶文化的居民的Y染色体SNP类型也是O3,所以,我们可以清晰的看出,古代汉族先民,尤其是贵族,都是O3占有绝对主体的,仰韶文化和龙山文化居民的Y染色体成分是基本相同的,种族上是同一成分。 今天13亿汉族的绝大多数,都是5000年前中原原始居民的直系后代。主体是仰韶文化和龙山文化的O3(两种文化居民的父系成分相同),O3也就是来自中原仰韶文化和龙山文化的居民构成了各地汉族父系远祖的压倒性绝对多数,其次是河北的磁山文化的O1,红山文化的O3、O2和O1,和良渚文化的O1,其次还有湖北大溪文化和江西吴城文化的O2a,今天广阔的中国土地,仍然为5000年前中国远古汉族先民的子孙所占据。 数万年前NO单倍群诞生出O3-M122,再诞生O3a-M324,而O3*-M122是O3-M122的原型,仍保持不变。O3a-M324再分为O3a1-L127、O3a2-P201。其中O3a2-P201,由此诞生出:O3a2b-M7(华中汉族、苗瑶族群)、O3a2c-M134(中原汉族、藏缅族群)、O3a2c1-M117(藏羌族群、华北汉族),也就是说O3a3-P201是中原汉族、苗瑶族群、藏缅族群和华北汉族的共祖原型,也是同源兄弟。而O3a2*-P201(属于O3a2-P201的原型,仍保持不变),高频分布在中国东南地区及其台湾少数民族。 东夷haplogroupO3*-M122的年龄为2.5-3.0万年 中原haplogroupO3a2c1-M134的年龄约为1.6万年 古羌haplogroupO3a3c1a-M117的年龄约为1.3万年 东夷haplogroupO3a1-002611的年龄约为1.1万年 东夷haplogroupO3a1c1-F11的年龄约为0.7万年。 O3a1-L127诞生出O3a1-002611,最后诞生出O3a1c1-F11,是O3系内最晚出现的一类,高频分布在东亚沿海,是典型的东夷标志基因,在汉族O3系中占有最大比例,但在国外几乎没有了。因此,O3a1-002611是中国汉族独有的单倍群类型,确实是最正宗的中国人。O3*-M122是O3系原始祖型的最早一支,也高频分布在东亚沿海,是汉族O3系的共祖原型,因而也是最早的中国人。 O3*-M122、O3a4-002611高频分布图与东夷文化分布图完全吻合。 姬姓是中国上古八大姓之一,不是汉族的全部,而是汉族的一部分。姬姓(相传祖先为黄帝)出自于古羌族,Y染色体以O3-M134为主体类型,和羌藏族群有渊源关系。周朝统治800年之久,分封了姬姓诸侯国。现在,姬姓后裔O3-M134约占现代汉族O3系的40%。 上古八大姓是指姜、姬、姚、嬴、姒、妘、妫、妊。其中嬴姓(少昊)、姚姓(大舜)、姒姓(伯益)、姜姓、妫姓、妊姓(远祖为太昊,出于帝俊)均属东夷姓氏。 太昊、少昊、大舜、伯益和帝俊均属著名的东夷部落首领,嬴姓、姚姓、姒姓、姜姓、妫姓、妊姓等东夷姓氏,Y染色体以O3-M122为主体类型,现在,东夷姓氏O3-M122约占现代汉族O3系的60%。 黄河上游藏缅族群及其西北汉族特有的O3e-M134高发频率,但O3-M122比例低。黄河下游以O3-M122为最,O3e-M134比例低。 O3-M122是O3e-M134的祖型,O3-M122最早进入黄河中下领域成为第一批居住先民,迫使O3e向西迁徒,与羌藏D系共处融合,形成了藏缅族群。有O3e-M134的地方一般都有O3-M122,但有O3-M122的地方不一定有O3e-M134。 从黄河流域的整个趋势来看,O3e-M134是西部比东部高,越往东越低。在黄河下流域,O3-M122的含量明显超过O3e-M134,显示它自东往西扩散的趋势。 在O3-M122的细分谱系中,O3*-M122、O3a4-002611主要分布在黄河中下流域,显然是东夷集团的主体类型,因为这个单倍群在藏缅语人群中很稀少,但是在汉族里的比例却能占较大的比例。 东夷人以O3-M122为最,几乎没有羌藏D系,和现代汉族的主体部分完全一致。东夷O3-M122与周族O3e-M134同样都是汉族父系祖先的两大来源。​​​​

  • @gn.l3762
    @gn.l3762 Рік тому

    환단고기를 재대로 평가도 못하면서 무조건 위서다.라고 하는 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일본서기를 엄청 추켜주네.환단고기의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내용중 중국 고대 남조시대의 즉 송서.남제서.양서등등과 그리고 2천년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산동. 강소에 전해지는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태종 이세민 그리고 설인귀가 왜 그곳에서 싸울수 밖에 없는 배경등이 기록되어 있는 보배 같은 책인데 중국 남조. 정사의 그런 기록을 믿지 않는 식민사학자 들이야 위서로 취급할수 밖에 없어겠죠.ㅡ 환단고기는 1979년 이유립이 교정 보완 한거지 그의 위작이 아닙니다. 1909년 이기선생의 감수를 거쳐 1910년 책이 간행 되었는데 이를 입증할 1924년 심당 이고선이 환단 세감에 환단고기를 인용했다고 그의 심당전집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글고 등사본 환단고기도 발견되었는데 이제 위서 운운은 그만하시죠.

  • @리치-u8s
    @리치-u8s Рік тому

    전세계에서 역사 유물 유적 조작을 제일 많이 하고 교묘하게 하는 나라가 일본임 특히 식민지배를 한 나라의 세계최빈국이었던 나라의 역사를 조작안했을까 일제시대 하늘을 찌르던 일본군이 광개토대왕 비의 탁문을 조작안했다는 믿는게 이상한데 광개토대왕비를 무시하고 일본서기는 만 믿고 강의하네 친일 식민사관

  • @김기주-g3c
    @김기주-g3c Рік тому

    성화야 이놈아 너 연대 새까만 후배놈인데 어찌 친일 매국노가 되었냐 삼국사기는 못 믿는다고 김부식이 고려시대에 썼으니 창작한것이라고? 에잇 무식한 xxx 건대명예를 위해서라도 퇴직해라

  • @타미드LOG
    @타미드LOG Рік тому

    전지왕은 왕태자시절 왜왕이 되어 열도에 가서 통치하다가 침류왕이 붕어하자 귀국하여 백제국 마한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의 원자 구이신이 탄생하여 구이신을 왕태자로 책봉하여 열도로 보내어야 했으나 구이신의 안정적인 황제즉위를 위해서 구이신 대신 위신품을 "칠지도"를 제작하여 왜에 보내어 간접통치를 하고자 했다. 그래서 성상의 윤음이 잇는고로 구이신을 왜왕으로 삼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했던 것이다. 삼국시대 당시에는 태자와 세자는 혼용과 병용되었던 것이다.

  • @타미드LOG
    @타미드LOG Рік тому

    가야는 임나가 아니며 7세기이전까지 야마토왜는 백제의 왕족들이 통치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6세기 이전의 천황들은 가공의 인물들일뿐이다. 왜열도는 당시 직조한 옷도 제대로 만들어입지 못하는 상황이였거늘 무슨 고대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겠는가! 고조선가야삼국인들이 건너가서 일본을 개척했던 것이며, 백제 멸망이후에 백제의 이칭이였던 일본이라는 국명을 자신들의 국호로 삼아서 백제와 결별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단사학계는 일본학계의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기가찬다. 식민사관청산만이 살길이다.

  • @likewind194
    @likewind194 Рік тому

    내용이 그닥 ㅠㅠ

  • @baek510
    @baek510 Рік тому

    칠지도 해석 全: 奉口四年十口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銕 / 七支刀帯辟百兵宜供供侯王 / 口口口口作 앞: 봉원4년(408년, 전지왕4년)11월16일 병오정양에 백번단련한 철로 만들다 / 칠지도를 지니면 백가지 군사위협을 피할 수 있으니 마땅히 공손한 후왕에게 줄 만하다 / 口口口口이 만들었다. 後: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뒤: 선세이래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세자 기(구이신)가 태어나 왕명에 의하여 왜왕삼는다는 뜻으로 만들었으니 후대에 전하여 보여라. ...에 따르면, 구이신은 408년에 태어났고, 왜왕이 될 목적으로 왜로 보내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이신은 420년 12살로 즉위하고, 427년 19살로 사망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구이신이 어려 야마토의 목만치가 국정을 잡고 왕의 어미와 밀통해 무례한 짓을 했다. 아귀를 맞춰보자. 어떻게 야마토 사람 목만치가 뜬금없이 백제 국정을 잡을 수 있었을까? 어린 왕의 모친과 썸씽관계 였으니까. 어떻게 이역만리 야마토인과 백제 왕모가 썸씽관계 일 수 있는데? 가까이 있었으니까. 왜 백제왕모와 야마토인이 가까이 있었는데? 그 어린 백제왕이 백제왕세자 되자마자 어미와 함께 왜로 보내졌거든. 백제왕세자를 왜 왜로 보냈는데? 왜왕삼으려고. 왜왕을 왜 백제왕이 임명하는데? 왜는 백제의 후국後國이니까.

  • @kskim9259
    @kskim9259 Рік тому

    일본역사 대변인인가. 삼국사기를 깍아내리고 일본서기를 추켜세우내ㅉㅉ 이런 역사관으로 가르치니 현 한국국사가 왜 엉망인지 알게 해주네.

  • @용산개고기-n4i
    @용산개고기-n4i Рік тому

    잠재적 매국노 네 ㅋ ㅋ

  • @mayday1044
    @mayday1044 2 роки тому

    왜열도가 369년부터는 가야세력에서 백제세력으로 완전히 교체된거로보면 정확한답이 나오는거내요 백제가 왜열도의 가야세력을 장악하고감독한 기관이 임나이고 임나의 수장중에 백제인목만치가있었고

  • @seunglee9885
    @seunglee9885 2 роки тому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근초고왕이 침류왕에게 대화하는 내용과 이주갑인상으로 일본서기 기록을 끌여내렸을 경우 근초고왕 치세기와 일치하는 대목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본 영상에서는 진구황후 기사는 인정하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침류왕과 대화하는 대목은 너무 구체적이지 않나요

  • @백창용-z8q
    @백창용-z8q 2 роки тому

    위서가 아니라 백제가 상국이니.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일본에게 유리하게 구성한 사기라고 생각 됨

    • @백창용-z8q
      @백창용-z8q 2 роки тому

      칠지도 비문에 일본의 후왕에게 주니 후세에 널리 전하라는 글이 있는데. 내용상 상국이 제후국에게 하사한게 아닌지..

  • @보규김-k8w
    @보규김-k8w 2 роки тому

    이런 놈이 있내요 아ㅡㅡㅡ 통제라 교수가 이러니 슬픈일이다

  • @manyounglyu4245
    @manyounglyu4245 2 роки тому

    일본 사람이네ㆍㆍ 기가 차네ㆍㆍ

  • @sunnyan151
    @sunnyan151 2 роки тому

    기가찬다.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니.. 대다나다.. 이와 관련된 역사학자들의 다양한 해설이 존재하거늘. 정말 대단하십니다.. 에효.

    • @백창용-z8q
      @백창용-z8q 2 роки тому

      일본이 비문을 위조한게 아니라고 단정을 하시네, 추정도 아니고..

  • @sunnyan151
    @sunnyan151 2 роки тому

    작자미상의 일본서기를 진서로 여긴다면. 환단고기도 동일하게 진서다. 오히려 환단고기는 작자가 누군지 기록되어져 있다. 역시 일본 유학파들은 한결같구나. 이러니 통일이 안된다.

  • @한바위-y2k
    @한바위-y2k 2 роки тому

    읽어 보고 싶다

  • @클라리넷바다
    @클라리넷바다 2 роки тому

    교수님 존경합니다.

  • @클라리넷바다
    @클라리넷바다 2 роки тому

    칠지도에 대한 주장이 새롭고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학자들이 홍성화 교수님같은 인식을 가지고 역사를 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백창용-z8q
      @백창용-z8q 2 роки тому

      왜여서 백제를 구다라(큰나라)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백제가 상국이 맞다고 봅니다.

    • @kskim9259
      @kskim9259 Рік тому

      정신좀 차리세요. 저자는 식민사관으로 가르치는 자입니다. 우리 역사 특히 고대사에 해악만 끼치는 자에요. 우리 삼국사기를 믿지 않고 일본서기가 합리적이다? 일본사람입니까? ㅉㅉ 저런자의 인식을 갖고 역사를 대한다고 ? 무슨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고 있어.

    • @장상헌-c1w
      @장상헌-c1w Рік тому

      엉터리 강의

  • @givedia
    @givedia 3 роки тому

    우선 중국역대 연호 중에 泰 O4년 , 太O 4년 를 모두 조사해서 , 앞뒤 맥락을 검토해야 합니다

  • @jonglakchoi7529
    @jonglakchoi7529 3 роки тому

    논거도 확실하고, 주장에 전혀 무리가 없네요. 반박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훌륭한 통찰이십니다. 교수님의 좋은 연구와 강의 감사합니다.

    • @백창용-z8q
      @백창용-z8q 2 роки тому

      일단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좀더 ㅈㅏ주적 연구가 필요하다 봅니다.

  • @kimjeonghuun8665
    @kimjeonghuun8665 3 роки тому

    일본인 밀정이 처음 뜬 탁본은 /쌍구가묵법/으로 탁본을 떳다고 합니다. 이 쌍구가묵법은 비석 위에 종이를 놓고 보이는 형상을 따라 탁본자가 붓으로 직접 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탁본과는 사실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이에 드러난 형상을 따라 사람이 글자를 쓰는 경우 고대 서체 등에 대해 일정 이상의 조예가 있지 않는 한 오독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비석이 오래되어 글자체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는 더 많은 오독이 발생하겠죠. 아울러 탁본자가 참모본부 소속 일본인 밀정인 이상 비문 탁본의 진위에 대한 의심과 철저한 확인을 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상의 사항들을 고려하면 탁본조작에 대한 의심이 정말 지난 /한때/의 의심으로 쉽게 치부할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 @유영건-p8g
    @유영건-p8g 3 роки тому

    408년, 11월 16일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제가 사용했던 연호는 우리 국민 모두 관심을 가지고 찾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 @소요유-e2n
    @소요유-e2n 3 роки тому

    칠지도에 관한 가장 명쾌한 강의였고 한일 고대사에 대한 통찰력도 뛰어나다. 훌륭한 강의 감사합니다.

  • @아라바바
    @아라바바 3 роки тому

    임라일본부의 실체를 알려면 '임라' 와 '일본'의 정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 1. 임라. 광개토대왕비에서 '임라'의 종발성까지 추격했다는 명문이 나오고, 삼국사기 강수전, 진경대사 탑비에 강수와 진경대사가 임라(가야)의 후예임을 밝힘. 따라서 임라는 한반도 남부에 실재한 나라. 2. 일본 1) 일본이란 국호가 처음 나타난 시기는 한국과 중국기록은 670년(삼국사기, 구당서), 일본 기록은 701년(다이호율령). 2)2011년 서안에서 발견된 백제항장 예군의 묘지석(678년 제작)에서 "일본의 여초(일본의 잔당)들이 부상(야마토 왜)에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고 기술. 이는 일본이란 용어가 백제와 관련되었음을 의미함. 3) 백제... 부여계 국가로 개국시조인 비류와 온조의 조상은 해모수... 4) 일본의 왜어 훈독은 히모토. 일본은 부여계 국가의 왕위계승집단 즉 국왕의 친족집단 왕족을 뜻함. 부여, 백제의 해모수 즉 왕족을 뜻하는 용어가 야마토 왜에서 국호로 둔갑. 임라일본부....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사살(369년)하고 이후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면서 가야와 결혼 동맹을 맺고 금관가야에 백제왕족을 파견하여 만든 관부가 임라일본부일 가능성이 농후함.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기사는 근초고왕의 남한진출에 관한 백제 역사를 변조하여 야마토 왜의 역사로 탈바꿈시킴. 칠지도... 근초고왕이 요동에서 고구려를 파하고(369), 남한에 상륙하여 삼한을 정벌하고 가야에 관부를 설치하고난 뒤, 가야계 야마토 왜왕에게 하사(472년)한 하사품. 이 때 신공황후는 근초고왕이 왜왕과 혼인시킨 백제의 왕녀.

    • @아라바바
      @아라바바 3 роки тому

      사족.... 흉노의 묵돌선우... 묵돌, 모돈, 모탁...등등으로 발음됨. 몽골에서는 '바타르(용사)'의 모어라고 주장함. 일본의 '본'은 왜어로는 '모토' 우리말의 '바탕'을 뜻함. 혹시 북부여 해모수의 모수, 일본(히모토)의 모토, 야마토의 마토, 흉노의 묵돌이 왕태자(왕위계승자, 국본)를 뜻하는 북방 알타이계 언어의 공통조어가 아닐까?

  • @mucom6202
    @mucom6202 3 роки тому

    잘보고갑니다~~^^

  • @윤태옥의인문기행왕초
    @윤태옥의인문기행왕초 3 роки тому

    잘 들었습니다. 합리적인 반론,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에서 가까운 풍납토성이 다시 보이네요~^^

  • @jacky11355
    @jacky11355 3 роки тому

    1등. 제가 이분좀아는데 뜰겁니다. 워낙 강의내용의 근거가 확~~~~실합니다. 첫영상 츄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