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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호TV
Приєднався 18 лип 2023
9살 여자 아이 유섬이 유배길 17 산청군 생초면 신연 홍역치료발상지 참된 名醫 유이태
23. 참된 名醫 유이태
생초천이 경호강으로 합수하는 다리 지났습니다. 한여름 우거졌다가 갈수기에 물이 쫄쫄 흐르는 생초천 도로를 오부 방향으로 4km가면 유이태약수터가 나옵니다. 참새미약수터에 유이태약수터라는 간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1652년에 태어나서 1715년에 세상을 떠난 명의 유이태 의원이 그 샘물을 길어와 환자를 고쳤다는 곳입니다. 물을 중요한 치료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물은 아픈 곳을 씻어 내기도 하고 몸을 따뜻하게 또는 차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마셔서 몸 안의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장기의 오염도를 낮춥니다. 깨끗한 물은 중요한 치료제입니다.
유이태약수터에서 2km 생림교 방향으로 내려오면 오른쪽에 유이태기념관이 있습니다. 이곳에 유이태 사적을 정리해 두고 있었었습니다. 산청군청에서 건립한 것이 아니고 유이태 후손들이 건립했다고 합니다. 유이태기념관 안내판과 찾아가는 이정표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유이태 후손들의 민원으로 산청군청에서 고의로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약한 산청군청입니다. 가짜 류의태에 투자한 돈의 1/1000만 투자면 될텐데,…
유이태기념관 앞 생초천에 바위가 있었습니다. 이 바위는 명의 유이태가 환자를 치료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낚시했다는 이태낚시바위입니다. 네이버와 다음지도, 네비게이션에서 이태낚시바위가 검색되었습니다. 생초면 신연리는 유이태 외가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여러 설화를 전승하게했습니다. 그런 설화 중 중국 청나라 황제 등창 치료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진위를 떠나 그의 의술이 당대 최고였다는게 핵심이었습니다. 1713년 11월 말 임금이 불러서 대궐로 갔답니다. 어의가 되어 숙종 병 치료 후에 산청으로 돌아와 죽었습니다. 임금 병을 고친 공로로 안산군수와 종1품 숭록대부에 제수되었습니다.
유이태 의원이 의료 사업했던 곳은 생초면 신연리 679번지입니다. 유의원 무덤은 경호강 건너 갈전 마을 뒷산에 있습니다. 劉以泰 의원이 명의인 이유는 그의 삶 전체 가치관과 정신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첫째 사랑. 그 사랑은 아프고,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지만 착실하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대하여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이웃 사랑과 같습니다. 불가에서 펼치는 자비였습니다. 같이 아파하는 마음에서 그의 의술이 빛을 발했습니다.
둘째, 평등. 임금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인술 베품에 차등이 없었습니다. 양반과 상놈, 남녀 차별, 서얼 차대 같은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사회의 근본을 뒤집는 생각이었습니다. 환자들 대부분은 살기 힘들었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로 도우며 어려움을 나누는 施道를 보면 출세 지향적 성리학 중심사회 벗어나 불교나 기독교 사상을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셋째, 명리 초연. 젊어서 과거 시험 대신 의술을 택하여 사회적 책무를 다했고, 출세해 어의가 되거나 의술이나 약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이 제수한 안산군수를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권력, 명예, 재산에서 자유로우셨을 것입니다. 산중 마을의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을 천직으로 살았던 전문인였습니다.
넷째, 자연, 전통. 효도, 자연 존중, 세상 법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병 고치는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마음의 병도 자연스레 낫도록하는 원리였습니다.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선하게 변하도록 모범이 되었습니다.
다섯째, 의학 지식 전파와 발전. 그가 가지고 있던 지식과 경험을 책으로 펴냈습니다. 후학들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찾도록 권했습니다.
의과대학에서 유이태 의학사상을 소개하고 가르쳐서 선조들의 환자 사랑을 실천하도록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료인 도덕적 기준입니다. 2,500년 전에 작성되었을 선서는 고대 사회상을 반영하여 작성되어 지금 보면 어색했습니다. 현대 사회에 맞도록 1948년에 제네바 선언으로 고쳐썼습니다.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 앞 기념비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게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나에게 알려준 모든 것에 대하여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더없이 존중하겠노라.
나는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나는 자유 의사로서 나의 명예를 걸고 위의 서약을 하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서양식 의업에 종사는 사람들 모두가 선서했던 서약입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수많은 의료인이 출세나 부의 축적 수단이 아니라 인류애를 지향하는 삶을 보내는 정신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극빈자, 전쟁터, 환란을 당한 지역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봉사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였습니다.
유이태 의원의 사상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보다 진일보한 의료인의 정신입니다. 서양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정신을 조선에서는 유이태 정신으로 맞출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의학도에게 유이태 사상을 가르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이태는 의원으로서 건전한 생활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孝道
나눔을 실천하는 施道
사랑으로 환자를 돌보는 醫道
의료인으로서 바른길 가는 正道
사람들이 오래 살도록 돕는 壽道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事親知醫 濟衆仁心: 인생관. 부모 모시려면 의학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효도를 의료 행위의 기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혈연이나, 학연 등의 관계가 없는 이웃 병을 먼저 고쳐 질병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無貴無賤 無親無踈: 평등사상. 사람 차별 없는 의료 서비스. 성별, 인종, 신분, 빈부 등 사회적 차별 요소를 차단하고 아픈 사람이면 똑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모든 환자를 돌보며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存養践履 誠實不苟: 자기 수양.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여 편안하게 하고 본심을 잃지 않고 의로운 일에 나서도록 하는 일입니다. 정신건강 분야에서 특히 주목할만 합니다.
넷째 功利後世 補償日新: 면학 자세. 의료행위의 공과 보상을 후세에 넘기고 후진들이 새로운 의술을 개발하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진단, 원격 시술 등의 현대기술도 잘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섯째 未病節宣 先調後治: 치료 행위 방향. 건강할 때 절제하며 건강을 지키고 예방과 절제, 병의 근원을 찾아 치료하는 일입니다. 예방의학과 국민 보건에 깊이 관여할 의무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약 오남용 방지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여섯째 鄕井備藥 單方隨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민간요법 활성화. 약재와 치료법을 책이나 매체로 만들어 의료인이 아니더라도 가벼운 증상은 치료가 가능하도록 의학 지식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천연 약재를 이용한 치료법을 알리는 일입니다.
양반 중심 신분사회였던 점을 감안하면, 평등사상을 의료서비스 근간으로 삼았다는 것은 혁명적입니다. 이는 정여립, 유항검, 허균, 유형원 등의 개혁 사상과 같이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정신이 투철합니다. 적지 않은 저술 활동 있었습니다. 조선의 큰 전염병이었던 홍역에 독보적인 치료법을 시술했습니다. 麻疹篇, 1696년 저술에 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實驗單方은 민간인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병 치료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麟西聞見錄에 각종 치료 방법과 전래 된 처방이 들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소실되거나 분실된 의서들이 몇 권 더 있습니다.
유이태 의원의 다섯 가지 道와 의학 사상은 현대 사회에 맞도록 고쳐서 의료인 양성에 적극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미보다 훨씬 더 우리네 정서에 어울려 보입니다. 유이태 의원은 조선인 누구나 평등하므로 5도를 실천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백미를 나누어 주고, 수많은 병자와 임금을 치료한 유이태 이름이 생초를 지나가는 도로 어디에도 없어서 의아했습니다. 생초면 신연리 산모퉁이에서 강 건너에 갈전리에 있을 유이태 의원의 묘소를 바라보았습니다.
유이태 의원은 백성들에게 건강관리지침, 유훈, 어록을 남겼고, 유훈을 되새겨보았습니다.
余無功利及於人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베푼 공(혜택)이 없었으니
以是傳之萬病春 이로서 전하여 만병의 치료에 전한다.
手錄年年成一冊 해마다 내가 손수 기록하여 하나의 책을 만들었으니
後來觀者補相新 훗날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치료법을 덧보태어 새롭게 하길 바란다.
豈獨爲子孫計 이 책을 지은 것이 어찌 내 자손만을 위한 계책이었겠는가?
猶且濟衆人心 오히려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라네.
盖無病都無用 무릇 세상에 병이 없으면 역시 이 책 또한 쓸모가 없을 것이니
願書閣長不尋 서재에 감추어 두고서 영원히 찾지 않기를 바란다.
유훈은 그의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단순히 개인적인 이익을 넘어서, 더 넓은 공동체를 위한 헌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겸손함을 나타내며,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지식과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그의 꾸준한 노력과 헌신을 나타내며, 후세에 대한 배려가 엿보입니다. 지식 전수가 단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의학이 발전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진정한 인간애를 느끼게 합니다. 유이태 의원은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건강과 행복이 보장된 세상, 즉 질병 없는 세상을 바라는 그의 진정한 소망을 나타냅니다. 그의 지식이 사용되기를 원하며, 진정한 지혜는 실천을 통해 빛을 발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유훈은 겸손, 나눔, 그리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깊은 철학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생초천이 경호강으로 합수하는 다리 지났습니다. 한여름 우거졌다가 갈수기에 물이 쫄쫄 흐르는 생초천 도로를 오부 방향으로 4km가면 유이태약수터가 나옵니다. 참새미약수터에 유이태약수터라는 간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1652년에 태어나서 1715년에 세상을 떠난 명의 유이태 의원이 그 샘물을 길어와 환자를 고쳤다는 곳입니다. 물을 중요한 치료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물은 아픈 곳을 씻어 내기도 하고 몸을 따뜻하게 또는 차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마셔서 몸 안의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장기의 오염도를 낮춥니다. 깨끗한 물은 중요한 치료제입니다.
유이태약수터에서 2km 생림교 방향으로 내려오면 오른쪽에 유이태기념관이 있습니다. 이곳에 유이태 사적을 정리해 두고 있었었습니다. 산청군청에서 건립한 것이 아니고 유이태 후손들이 건립했다고 합니다. 유이태기념관 안내판과 찾아가는 이정표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유이태 후손들의 민원으로 산청군청에서 고의로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약한 산청군청입니다. 가짜 류의태에 투자한 돈의 1/1000만 투자면 될텐데,…
유이태기념관 앞 생초천에 바위가 있었습니다. 이 바위는 명의 유이태가 환자를 치료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낚시했다는 이태낚시바위입니다. 네이버와 다음지도, 네비게이션에서 이태낚시바위가 검색되었습니다. 생초면 신연리는 유이태 외가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여러 설화를 전승하게했습니다. 그런 설화 중 중국 청나라 황제 등창 치료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진위를 떠나 그의 의술이 당대 최고였다는게 핵심이었습니다. 1713년 11월 말 임금이 불러서 대궐로 갔답니다. 어의가 되어 숙종 병 치료 후에 산청으로 돌아와 죽었습니다. 임금 병을 고친 공로로 안산군수와 종1품 숭록대부에 제수되었습니다.
유이태 의원이 의료 사업했던 곳은 생초면 신연리 679번지입니다. 유의원 무덤은 경호강 건너 갈전 마을 뒷산에 있습니다. 劉以泰 의원이 명의인 이유는 그의 삶 전체 가치관과 정신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첫째 사랑. 그 사랑은 아프고,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지만 착실하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대하여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이웃 사랑과 같습니다. 불가에서 펼치는 자비였습니다. 같이 아파하는 마음에서 그의 의술이 빛을 발했습니다.
둘째, 평등. 임금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인술 베품에 차등이 없었습니다. 양반과 상놈, 남녀 차별, 서얼 차대 같은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사회의 근본을 뒤집는 생각이었습니다. 환자들 대부분은 살기 힘들었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로 도우며 어려움을 나누는 施道를 보면 출세 지향적 성리학 중심사회 벗어나 불교나 기독교 사상을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셋째, 명리 초연. 젊어서 과거 시험 대신 의술을 택하여 사회적 책무를 다했고, 출세해 어의가 되거나 의술이나 약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이 제수한 안산군수를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권력, 명예, 재산에서 자유로우셨을 것입니다. 산중 마을의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을 천직으로 살았던 전문인였습니다.
넷째, 자연, 전통. 효도, 자연 존중, 세상 법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병 고치는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마음의 병도 자연스레 낫도록하는 원리였습니다.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선하게 변하도록 모범이 되었습니다.
다섯째, 의학 지식 전파와 발전. 그가 가지고 있던 지식과 경험을 책으로 펴냈습니다. 후학들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찾도록 권했습니다.
의과대학에서 유이태 의학사상을 소개하고 가르쳐서 선조들의 환자 사랑을 실천하도록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료인 도덕적 기준입니다. 2,500년 전에 작성되었을 선서는 고대 사회상을 반영하여 작성되어 지금 보면 어색했습니다. 현대 사회에 맞도록 1948년에 제네바 선언으로 고쳐썼습니다.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 앞 기념비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게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나에게 알려준 모든 것에 대하여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더없이 존중하겠노라.
나는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나는 자유 의사로서 나의 명예를 걸고 위의 서약을 하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서양식 의업에 종사는 사람들 모두가 선서했던 서약입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수많은 의료인이 출세나 부의 축적 수단이 아니라 인류애를 지향하는 삶을 보내는 정신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극빈자, 전쟁터, 환란을 당한 지역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봉사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였습니다.
유이태 의원의 사상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보다 진일보한 의료인의 정신입니다. 서양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정신을 조선에서는 유이태 정신으로 맞출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의학도에게 유이태 사상을 가르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이태는 의원으로서 건전한 생활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孝道
나눔을 실천하는 施道
사랑으로 환자를 돌보는 醫道
의료인으로서 바른길 가는 正道
사람들이 오래 살도록 돕는 壽道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事親知醫 濟衆仁心: 인생관. 부모 모시려면 의학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효도를 의료 행위의 기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혈연이나, 학연 등의 관계가 없는 이웃 병을 먼저 고쳐 질병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無貴無賤 無親無踈: 평등사상. 사람 차별 없는 의료 서비스. 성별, 인종, 신분, 빈부 등 사회적 차별 요소를 차단하고 아픈 사람이면 똑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모든 환자를 돌보며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存養践履 誠實不苟: 자기 수양.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여 편안하게 하고 본심을 잃지 않고 의로운 일에 나서도록 하는 일입니다. 정신건강 분야에서 특히 주목할만 합니다.
넷째 功利後世 補償日新: 면학 자세. 의료행위의 공과 보상을 후세에 넘기고 후진들이 새로운 의술을 개발하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진단, 원격 시술 등의 현대기술도 잘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섯째 未病節宣 先調後治: 치료 행위 방향. 건강할 때 절제하며 건강을 지키고 예방과 절제, 병의 근원을 찾아 치료하는 일입니다. 예방의학과 국민 보건에 깊이 관여할 의무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약 오남용 방지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여섯째 鄕井備藥 單方隨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민간요법 활성화. 약재와 치료법을 책이나 매체로 만들어 의료인이 아니더라도 가벼운 증상은 치료가 가능하도록 의학 지식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천연 약재를 이용한 치료법을 알리는 일입니다.
양반 중심 신분사회였던 점을 감안하면, 평등사상을 의료서비스 근간으로 삼았다는 것은 혁명적입니다. 이는 정여립, 유항검, 허균, 유형원 등의 개혁 사상과 같이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정신이 투철합니다. 적지 않은 저술 활동 있었습니다. 조선의 큰 전염병이었던 홍역에 독보적인 치료법을 시술했습니다. 麻疹篇, 1696년 저술에 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實驗單方은 민간인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병 치료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麟西聞見錄에 각종 치료 방법과 전래 된 처방이 들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소실되거나 분실된 의서들이 몇 권 더 있습니다.
유이태 의원의 다섯 가지 道와 의학 사상은 현대 사회에 맞도록 고쳐서 의료인 양성에 적극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미보다 훨씬 더 우리네 정서에 어울려 보입니다. 유이태 의원은 조선인 누구나 평등하므로 5도를 실천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백미를 나누어 주고, 수많은 병자와 임금을 치료한 유이태 이름이 생초를 지나가는 도로 어디에도 없어서 의아했습니다. 생초면 신연리 산모퉁이에서 강 건너에 갈전리에 있을 유이태 의원의 묘소를 바라보았습니다.
유이태 의원은 백성들에게 건강관리지침, 유훈, 어록을 남겼고, 유훈을 되새겨보았습니다.
余無功利及於人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베푼 공(혜택)이 없었으니
以是傳之萬病春 이로서 전하여 만병의 치료에 전한다.
手錄年年成一冊 해마다 내가 손수 기록하여 하나의 책을 만들었으니
後來觀者補相新 훗날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치료법을 덧보태어 새롭게 하길 바란다.
豈獨爲子孫計 이 책을 지은 것이 어찌 내 자손만을 위한 계책이었겠는가?
猶且濟衆人心 오히려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라네.
盖無病都無用 무릇 세상에 병이 없으면 역시 이 책 또한 쓸모가 없을 것이니
願書閣長不尋 서재에 감추어 두고서 영원히 찾지 않기를 바란다.
유훈은 그의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단순히 개인적인 이익을 넘어서, 더 넓은 공동체를 위한 헌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겸손함을 나타내며,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지식과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그의 꾸준한 노력과 헌신을 나타내며, 후세에 대한 배려가 엿보입니다. 지식 전수가 단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의학이 발전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진정한 인간애를 느끼게 합니다. 유이태 의원은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건강과 행복이 보장된 세상, 즉 질병 없는 세상을 바라는 그의 진정한 소망을 나타냅니다. 그의 지식이 사용되기를 원하며, 진정한 지혜는 실천을 통해 빛을 발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유훈은 겸손, 나눔, 그리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깊은 철학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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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여자 아이 유섬이 유배길 16 생초면 8종의 의사 22 좋은 의사, 나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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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는 유섬이 처자가 하루 밤을 머물었을 수동면 사근도역참 태종 이방원의 공신 이숙번의 귀양살이 장소 수동면 본통마을 이야기 멀쩡한 말 목을 베었다고 분통터진다 해서 분통고개라고 부른다는 이야기 진취적인 생초면의 3개 발상지, 민물고기, 날조된 허준의 스승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9살 유섬이는 고향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서 역참로를 따라 관촌, 오수, 남원, 응령, 제한, 사근도를 걸어갔습니다. 함양군과 산청군의 경계 본통고개를 넘어 태봉산의 독녀성(獨女城) 아래 경호강 강변의 3번 국도길을 포졸에 이끌려 걸어갔을 것입니다. 생초? 진취적인 고을입니다. 생초출신으로는 재산이 많은 인물보다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조선의 명의 유이태(劉以泰)가 태어난 곳이고 1개 면에 하나의 발상지...
9살 여자 아이 유섬이 유배길 15. 함양 수동 이숙번 유배지 까막섬 이야기와 21. 날조된 역사, 허준 스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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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년 종교 박해로 양반가 규수 9살 유섬이(柳暹伊) 처자의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큰오빠 유중철와 올케 이순이, 작은 오빠 유문석은가 전주 풍남문에서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이하의 형제 6살 남동생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 3살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 둘째 올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압록강변의 벽동군 관비가 되어 유배 떠나갔습니다. 1801년 10월 쌀쌀한 날씨에 어리고 어린 9살 유섬이 처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경상도 거제부 관비가 되어 포졸에 의하여 압송되어 유배길을 떠났습니다. 유섬이 처자가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에서 출발하여 현재 지명 전주역, 전동성당, 치명자산 성지, ...
9살 여자 아이 유섬이 유배길 14 함께 사는 것 함양과 사근도역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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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년 종교 박해로 양반가 규수 9살 유섬이(柳暹伊) 처자의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큰오빠 유중철와 올케 이순이, 작은 오빠 유문석은가 전주 풍남문에서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이하의 형제 6살 남동생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 3살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 둘째 올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벽동군 관비가 되어 유배 떠나갔습니다. 1801년 10월 쌀쌀한 날에 어리고 어린 9살 유섬이 처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경상도 거제부 관비가 되어 포졸에 의하여 압송되어 유배길을 떠났습니다. 유섬이 처자가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에서 출발하여 현재 지명 전주역, 전동성당, 치명자산 성지, 상관성당, 슬...
9살 유섬이 유배길 13 종년의 자식 유지광 정여창과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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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년 종교 박해로 양반가 규수 9살 유섬이(柳暹伊) 처자의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큰오빠 유중철와 올케 이순이, 작은 오빠 유문석은가 전주 풍남문에서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이하의 형제 6살 남동생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 3살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 둘째 올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벽동군 관비가 되어 유배 떠나갔습니다. 1801년 10월 쌀쌀한 날에 어리고 어린 9살 유섬이 처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경상도 거제부 관비가 되어 포졸에 의하여 압송되어 유배길을 떠났습니다. 유섬이 처자가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에서 출발하여 현재 지명 전주역, 전동성당, 치명자산 성지, 상관성당, 슬...
9살 유섬이 유배길 12 전북과 경남의 경계 팔량치 사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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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년 종교 박해로 양반가 규수 9살 유섬이(柳暹伊) 처자의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큰오빠 유중철와 올케 이순이, 작은 오빠 유문석은가 전주 풍남문에서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이하의 형제 6살 남동생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 3살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 둘째 올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벽동군 관비가 되어 유배 떠나갔습니다. 1801년 10월 쌀쌀한 날에 어리고 어린 9살 유섬이 처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경상도 거제부 관비가 되어 포졸에 의하여 압송되어 유배길을 떠났습니다. 유섬이 처자가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에서 출발하여 현재 지명 전주역, 전동성당, 치명자산 성지, 상관성당, 슬...
9살 유섬이 유배길 11 판소리 동편제 마을과 황산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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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년 종교 박해로 양반가 규수 9살 유섬이(柳暹伊) 처자의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큰오빠 유중철와 올케 이순이, 작은 오빠 유문석은가 전주 풍남문에서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이하의 형제 6살 남동생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 3살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 둘째 올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벽동군 관비가 되어 유배 떠나갔습니다. 1801년 10월 쌀쌀한 날에 어리고 어린 9살 유섬이 처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경상도 거제부 관비가 되어 포졸에 의하여 압송되어 유배길을 떠났습니다. 유섬이 처자가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에서 출발하여 현재 지명 전주역, 전동성당, 치명자산 성지, 상관성당, 슬...
9살 유섬이 유배길 10 남원 운봉 여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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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년 종교 박해로 양반가 규수 9살 유섬이(柳暹伊) 처자의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큰오빠 유중철와 올케 이순이, 작은 오빠 유문석은가 전주 풍남문에서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이하의 형제 6살 남동생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 3살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 둘째 올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벽동군 관비가 되어 유배 떠나갔습니다. 1801년 10월 쌀쌀한 날에 어리고 어린 9살 유섬이 처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경상도 거제부 관비가 되어 포졸에 의하여 압송되어 유배길을 떠났습니다. 유섬이 처자가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에서 출발하여 현재 지명 전주역, 전동성당, 치명자산 성지, 상관성당, 슬...
9살 유섬이 유배길 9 통영별로 응령역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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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년 종교 박해로 양반가 규수 9살 유섬이(柳暹伊) 처자의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큰오빠 유중철와 올케 이순이, 작은 오빠 유문석은가 전주 풍남문에서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이하의 형제 6살 남동생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 3살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 둘째 올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벽동군 관비가 되어 유배 떠나갔습니다. 1801년 10월 쌀쌀한 날에 어리고 어린 9살 유섬이 처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경상도 거제부 관비가 되어 포졸에 의하여 압송되어 유배길을 떠났습니다. 유섬이 처자가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에서 출발하여 현재 지명 전주역, 전동성당, 치명자산 성지, 상관성당, 슬...
산청군청 앞 역사 왜곡 바로잡기 집회 2024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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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청은 가짜 버들류 류의태를 실존 인물로 만들기 위하여 도적질해간 숙종 어이 묘금도유 유이태 선생의 사적을 가짜 버들류 류의태 사적으로 바꾼 책 세 권을 간행했습니다. 산청군청은 도적질해 간 숙종 어이 묘금도유 유이태 선생의 사적을 돌려달라! 산청군청은 역사를 왜곡마라! 동의보감촌의 버들류 류의태는 가짜입니다. 버들류 류의태는 산청군청에서 지어낸 가짜입니다. 버들류 류의태는 태어난 적도 없습니다. 버들류 류의태는 족보에도 없는 가짜입니다. 버들류 류의태는 허준의 스승이 아닙니다. 버들류 류의태는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정태에서 태어난 적 없습니다. 가짜 버들류 류의태 동상 철거하라! 가짜 버들류 류의태 가묘 철거하라! 가짜 버들류 류의태 숭모제 지내지 마라! 산청에 온적 없는 허준 동상, 기념비, 구...
9살 유섬이 유배길 8 신혼 첫날 밤 하립 김삼의당 이야기
Переглядів 4412 місяці тому
유튜브 소개문 1801년 신유년 종교 박해로 양반가 규수 9살 유섬이(柳暹伊) 처자의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가 전주 풍남문에서 능지처참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이하의 형제 6살 남동생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 3살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 둘째 올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벽동군 관비가 되어 유배 떠나갔습니다. 1801년 10월 쌀쌀한 날에 어리고 어린 9살 유섬이 처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경상도 거제부 관비가 되어 포졸에 의하여 압송되어 유배길을 떠났습니다. 유섬이 처자가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에서 출발하여 현재 지명 전주역, 전동성당, 치명자산 성지, 상관성당, 슬치재, 관촌공소(오원역)...
9살 유섬이 처자 유배길 7 남원 쑥대머리
Переглядів 3482 місяці тому
1801년 신유년 종교 박해로 양반가 규수 9살 유섬이(柳暹伊) 처자의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가 전주 풍남문에서 능지처참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이하의 형제 6살 남동생 유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 3살 유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 둘째 올케 이순이(李順伊)는 평안도 벽동군 관비가 되어 유배 떠나갔습니다. 어리고 어린 9살 유섬이 처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오빠와 올케, 작은 오빠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경상도 거제부 관비가 되어 포졸에 의하여 압송되어,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에서 현재 지역 전주역, 전동성당, 치명자산 성지, 상관성당, 슬치재, 관촌공소(오원역), 임실성당, 말재, 오수역참, 오수성당, 최명희 문학관, 동도역참, 남원역, 도통동성당...
9살 유섬이 유배길 2 둘째날 나들이 2박 3일 오수 임실 남원 1
Переглядів 4633 місяці тому
9살 유섬이 유배길 2 둘째날 나들이 2박 3일 오수 임실 남원 1
독녀성을 개발하여 생초를 서부경남의 관광중심지로 만들자 export
Переглядів 1 тис.4 місяці тому
독녀성을 개발하여 생초를 서부경남의 관광중심지로 만들자 export
군에서 모든것을 인정하고 새롭게 역사바로세우기를 시도하도록 군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것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 너무 훌륭하신 의인이십니다 ~~
잘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있어면 아님니다 역사왜곡이 바로잡아야 합니다 🇰🇷🇰🇷🇰🇷.👐😔😔🙏
영상을 만들어 알려주신 분 정말고맙습니다 제대로 알려져서 후손들이 알수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두손모아 봅니다👍🍀🙏
중요한 역사를 이제야 제대로 알게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루빨리 긴잠에서 깨어납시다 세계통일 대한민국 🇰🇷🇰🇷🇰🇷👍😇🙏신인님 허경영강연 제대로알고 불로유먹고 건강하게 나라살리자 허경영 허경영 허경영 🍀🍀🍀허경영 허경영 허경영 허경영 허경영 허경영 허경영
유이태 명의 제대로 공부해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이엄청난 역사를 누가 해야 하나요 👐😔
복식이 한복이 아니라 일본 의복처럼 보이니 복식을 다시 수정해야하지 않을까요.
소프트웨어가 한복으로 표시를 못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구수한 생초의 이야기와 유이태의 진실성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거창의 유의태는 거짓임이 알 사람은 다알고있죠 그곳 해설사를 당혹하게 만드는 사실
너무 재미있어요 !😅
귀한영상 잘보았습니다 👍😊😇🙏
정말 대단하십니다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내일을 바로 세우는 초석입니다
그 시대 경제세도를 유지하던 노동력은 노예제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 인지가 발전하면서 점차 없어진 것. 새삼 위대한 발견인 것 처럼. 한국의 과거를 비난할 것은 아닌듯, 허허롭기만 하다.
회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동의보감은 누가 작성했으며 사실인가요?
동의보감은 허준이 편찬했습니다. 류의태는 허준의 스승이 아닙니다
가짜유공자 가짜 역사. 온사방이 가짜가 판치니. 빨갱이 ㅅㄲ들이 다 그랬을 듯
역사는 바로 잡아야죠. 정신나간 개무원들 다 매장시켜야함
무신 뚱딴지 소리....
머리속에 박혀있는 것에 혼선이 옵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기로 합니다. 그럼 밀양 석골사 골짜기에 있는 동굴의 정체를 말로만 듣고 있었는데, 전설같은 이야기를...... 시간내어서 한번가 보도록하여야겠다 시청잘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류의태(유의태)와 허준 관련한 내용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밀양 석골사 골짜기 얼음골 이야기 모두 거짓말입니다. 유이태기념관장
안녕하세요. 동영상이 너무길었습니다. 이 동상을 주제별로 15분 내외로 만들어 올릴 것입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1. 산청 출신 명의 유이태(劉以泰) 조선의 명의 유이태(劉以泰)는 누구인가? 2. 태어나지도 않은 가짜 유의태/류의태(柳義泰)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의태/류의태(柳義泰)가 학술 논문에 등장한 과정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의태/류의태(柳義泰)가 드라마 집념에 등장한 과정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의태/류의태(柳義泰)가 소설 동의보감에 등장한 과정 산청군청에서 유의태/류의태(柳義泰)를 산청 출신으로 만든 과정 산청군청에서 유의태/류의태(柳義泰)를 동의보감촌에 유적지 조성 산청군청에서 유의태/류의태(柳義泰)를 동의보감촌에 유적지 조성 산청군청에서 지어낸 유의태/류의태(柳義泰)를 나이 추적 가짜 유의태/류의태(柳義泰)가 족보에 등장한 과정 산청군청에서 제시한 가짜 유의태/류의태(柳義泰) 실존 근거 분석 3. 산청에 온 적도 없는 허준 허준이 유의태/류의태(柳義泰)의 제자가 된 과정 허준은 스승 유의태/류의태(柳義泰)를 해부했을까? 허준은 산청에 왔을까? 허준 조모 친정과 본관은 어딜까 허준 조모 친정 부친, 오빠, 조카는 어디에 살았을까? 허준 조모 친정 부친, 오빠, 조카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 4. 산청군청에서 유이태 사적을 도적질해간 사건 산청군청에서 숙종 어의 유이태 사적을 가짜 유의태/류의태(柳義泰)으로 도적질한 사건 5. 역사 왜곡 바로잡기 역사 왜곡 바로잡기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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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할유이태 거창사람이왜 산청찐드기냐 조선 숙종조에 유이태라는 유명한 의원이 있었습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숙종 36년에 국왕의 병환으로 전국의 명의를 불러 진료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유의원도 불려 가다가 전주에 이르러 병을 핑계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으므로 조정에서 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위천면 서마리에서 태어난 거창 사람입니다. 그가 지금 수승대 어귀에 있는 어나리 서당에서 글공부를 할 때의 일입니다. 유이태가 밤늦게 글공부를 하러 오갈 때면 웬 예쁜 아가씨가 나타나서 유혹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그 아가씨를 본체만체하고 그냥 지나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달 밝은 밤에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하여 척수대에 올라 중천의 달을 보고 있는데 또 그 아가씨가 나타나 단 한번만 입맞춤이라도 하여 달라고 애원을 하니 그는 그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단 한번만 입맞춤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녀와의 접촉에서 더할 수 없는 황홀감과 달콤함을 실감하고 신비로운 향기에 도취되어 있는데 그녀의 혀 끝에서 감미로운 구슬이 굴러들어와 형용하기 어려운 쾌감에 젖을때면 구슬은 다시 그녀의 입으로 빨려 가고 이렇게 두 사람의 입으로 구슬이 오감을 거듭하는 동안 긴 애무 끝에 그녀는 작별을 고하고 사라졌습니다. 이같은 일이 연일 계속되어 유이태는 밤이면 그녀를 그리워하게 되고, 이러한 밤이 수십일 계속되는 동안 유이태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지고 몸은 야위어 갔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서당훈장은 그에게 사연을 물으니 자신의 쇠약을 근심하던 그는 그 사유를 순순히 고했습니다. 고백을 들은 훈장은 심사숙고한 끝에 "그 구슬이 너의 입에 들어올 때 삼켜라. 만약, 그 구슬을 네가 삼키지 않으면 너는 반드시 죽게 된다."라고 일렀습니다. 그날 밤에도 예외없이 두 남녀의 밀회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문득 스승의 말씀이 떠올라 몇번인가 굴러 들어온 구슬을 눈을 딱 감고 꿀꺽 삼켰더니 웬일인지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아가씨는 순식간에 비명을 지르면서 한 마리의 흰 여우가 되어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훈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다음날 뒷간에서 그 구슬을 찾아와 소중히 간직하라고 하였습니다. 구슬을 얻은 날부터 아가씨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몸도 완연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유이태의 총명이 비상하게 늘었다는 일입니다. 한번 듣거나 본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천재가 되었고 이때에 그는 의서를 열심히 공부하여 의술의 대방가로서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되어 마침내 국왕의 병환에 부름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의 보배인 구슬이 온 데 간 데가 없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구슬을 잃고난 뒤부터는 그도 평범한 재주밖에 없게 되었고 기억력도 줄어서 마침내는 건망증까지 걸렸다고 합니다. 어느날 그의 며느리가 감기몸살에 걸렸는데 콩나물을 달여 먹이려던 것이 콩나물을 잊어버리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떠오르지 않아 "비녀나물 비녀나물 "이라고 하다가 며느리를 놓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지금 연극고등학교 뒷편 언덕에 유이태가 침을 놓았다고 하는 침대롱바위가 남아 있습니다. 유이태(劉以泰, 1652~1715) 선생은 거창 출신 실존 인물로 조선시대 홍역 전문치료서인 <마진방痲疹方>을 저술한 명의입니다. 참고로 소설과 드라마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는 실존인물이 아니며 허준보다 백년 후에 태어난 거창 출신의 명의(名醫) '유이태'를 모델로 설정된 캐릭터입니다.
아이들이 유배를 받아들일 정도로 개독교는 사람들의 정신을 개조합니다. 조상에게 제사드리면 우상숭배라고 가르쳐서 유교사회에서 천주교인을 박해하고 죽였지요. 그런데 이제는 천주교에서 조상제사는 우상숭배 아니라고 태세전환했습니다. 게다가 죽음의 원인제공자로서 천주교의 만행을 사과하지 않고, 죽어간 고인들과 유배당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천주교를 미화하는 군요. 역시 🐕버릇 어디 안 가는군요.
허준은 선조때의사 유의태는 숙종때의사
유섬이 처자의 유배길을 다큐 또는 사극으로 제작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감상 잘하고 갑니다. 동영상 다운 받아갑니다.
저자 대단한 분이 십니다 선조 의성 유이태 선생의 전기도 잘읽었습니다 기대 하고 기다리겠읍니다
아예 수고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산티아고 가는길 기다려지는군요
항상 건강하십시오
자료화면이 내용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또...무슨 돈을 빼먹을려고...
생초인들이 개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독녀성 산주께서 무상사용 허락을 받았습니다. 나는 또다른 순례길 만들자고 제안 중입니다. 저는 선생께서 지적한 국민혈세 빼먹는 사람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
유철호 박사님 고향인 생초 역사 발전에 많은 관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잘들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아 주신는 일에 몰두하시는 선배님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참할일 없네
신의 유이태 선생님은 300년 전에 홍역의 치료와 예방법을 설명해 주신 훌륭한 명의였음을 잘 알려주신 훌륭한 의사였음을 잘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응원합니다~♡
유철호님 연일 수고가 많으십니다~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묘금도 유씨와 버들류씨를 구분못하고 남의 족보를 마음대로 바꾸어 없는 역사를 조작하는 그런 못된짓을 누구한테 배웠는지 묻고싶다. 산청군은 하루빨리 역사 왜곡한것에 대한 사죄를 하고 신의 유의태를 제자리로 돌려놓길 바란다~
유철호님 수고 많으십니다.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산청군에서도 이 모든 사실을 잘알고 있으나 관광객에 의한 돈벌이가 역사적사실 보다 우선으로 생각하니ㅡ 나아가 흙을 쌓아올려 그 에 제사를 지내고 행사까지 하니 전래의 산청의 기상은 없어지고 돈벌이에 눈밝히는 실정
그렇습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남의성씨를 팔아 시체팔이(조상) 하는 산청군수는 명확한 답변을 해주시고 오류가 있었다면.. 강릉.묘금도 유씨종친회장님께' 사죄하시기 촉망합니다.
유철호님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모든게 가짜다. 박종인 기자 유투브 참조.
가짜류의태로 배경으로 역사인물을 왜곡한 산청군 한방단지내 류의태동상부터 폐기하라
우여곡절이 없지 않겠지만, 진실-진리가 승리할 겁니다.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후손으로서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허구 인물 유(류)의태를 만들어낸 산청군청 관계자들은 모두 형사 처벌 받아야 합니다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왜곡된 역사로 관광지를 만들었으니....공무원들 습성상 절대로 책임지지 않으려고 할텐데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계속해서 사실을 알려나가 이슈로 만들어야 겠습니다...
역사인물을 가짜로 만들어 산청군. 한방단지 내 류의태 동상이그렇다 ㆍ실존인물인 유이태 선생을 덮어쒸운 이름이 류의태다
진실은 밝혀집니다. 유철호 박사님을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