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으로] 베트남 디엔비엔푸 -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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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1 жов 2024

КОМЕНТАРІ • 10

  • @uks9220
    @uks9220 Рік тому +4

    차분한 해설과 영상 잘 봤습니다...^^
    프랑스군이 고립된 디엔비엔푸에 들어간 것은
    사실 과거 나산전투의 승리로 자신감이었는데
    베트남군이 그정도의 역량을 발휘할 줄은 몰랐지요.
    반대로 이전투에서 승리한 베트남은 캐산에서
    다시 한번 디엔비엔푸승리의 재현을 노렸지만
    미해병대의 투혼와 물량공세에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물론 전략적 모호함으로 미군은 캐산에서 철수하지만..
    역사는 참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 @j_historian
      @j_historian  Рік тому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김동명-p6w
    @김동명-p6w 3 місяці тому +2

    정말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kdk6954
    @kdk6954 Рік тому +4

    앞으로도 좋은(?) 관점으로 영상으로 풀어 주세요~~

  • @kakalim8410
    @kakalim8410 Рік тому +3

    내용이 참 좋습니다.
    베트남 근현대사에 대해
    많은 동영상 부탁드립니다.

  • @ilnyunkim864
    @ilnyunkim864 Рік тому +4

    책에서만 보던 디엔비엔푸! 직접 가보셨네요 ㅎ 부럽소 ㅠ

  • @huyquang6308
    @huyquang6308 Рік тому +4

    Cảm ơn bạn đã làm video về lịch sử của Việt Nam

  • @leeheechang6656
    @leeheechang6656 Рік тому +3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만든 규슈 아하타 제철소에 선친이 일할 때 태어난 막내삼촌이 월남전에 백마부대 소속 병사으로 참전한 후 귀국했었다. 2차 세계대전의 끝이 보였을 때 연합국 '수뇌부'들이 카이로와 포츠담에 모여서 회담할 때 전후 식민지 처리를 언급한 곳은 '조선'뿐이었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수많은 식민지는 언급조차 하지않고 일본의 노예상태인 조선을 적당할 때 해방시킨다는.... 즉 제국주의 서구세력들은 전쟁후에도 식민정책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네덜란드와 독립 전쟁을 치뤘고 2차대전으로 쪼그라든 프랑스에게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비용 70% 이상을 미국이 감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J교수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는 전쟁비용을 어떻게 충당했는지를 말해야 했다. 그래야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