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하면 정유재란 당시 청야술을 사용한 건 아니고, 다만 불가피하게 산성전투를 우선시 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지 싶네요. 일본군의 침략시기가 추수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 시점이라 청야전술을 사용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닙니다. 대체로 청야전술이란 북방민족을 상대로 할때 효과적인 전술인데, 이는 북방민족이 주로 침입하는 시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추수기가 끝나고 강들이 얼어붙는 동절기 상황에서 추수한 곡식들을 성내로 최대한 모두 모으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림으로써 상대가 국내에서 군량조달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게 요체입니다. 수성에 성공하면서 장기전으로 가면 적군은 결국 지쳐서 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때 적의 퇴로나 후미를 공격하여 괘멸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진출로상의 교통의 요지마다 있는 읍성을 중심으로 최대한 요새화하여 순차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가장 좋고, 산성전투는 불가피한 경우나 특정한 상황에만 하는게 일반적입니다. 산성은 상대가 보기에 꼭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굳이 피해와 시간을 감수하며 공격할 이유가 없지요. 아직 명군의 대규모 본대가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고, 칠천량해전의 패전으로 수로를 통한 보급로가 이미 열려 있는 상태인데 미약한 조선군 홀로 읍성들을 방어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고, 피해도 더욱 키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판단합니다. 그런점에서, 조선이 택한 산성전투는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상당부분 효과도 있었다고 봅니다. 꼭 전투를 해서 수성을 하고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진격을 막는다기 보다는 당시 조선의 상황상 산성으로 백성과 병력들을 최대한 대피시켰다는 것이 어쩌면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원성이 8월 16일, 전주성이 8월 19일경 일본의 좌우군에게 각각 함락됩니다. 8월 25일경 전주에서 합류한 일본군은 29일경 우군은 북상을 좌군은 전라도를 초토화하기 시작합니다. 우군은 크게 보면 2개 부대로 나누어 북상한 것으로 보이는데, 좌군의 경로는 명확치는 않습니다. 일부는 부여,서천의 충청도 서쪽 방면으로 나머지는 남하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황상 여러 방면으로 부대를 나누어 전라도 전역을 대상으로 초토화 시킨 것으로 보이며. 금구전투도 이 시점에 벌어진 전투로 보입니다. 간양록에서 9월 14일경 일본군이 영광에 출몰했다는 것은 단순히 소문을 들은 것일 수도 있고, 강항이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피납된게 9월 23일경이니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UCIO6EUeUGDTayjd31wsuP6w 이순신의 세째아들인 이면이 아산에서 일본군에게 죽었으니, 인근 지역까지는 진출한 것은 확인이 됩니다. 그리고, 태안까지는 모르겠고, 서산 해미까지는 일본군이 올라왔다는 정탐기록은 있습니다. 체찰 부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3일에 홍주(洪州)의 향리(鄕吏) 이해(李海)가 청양(靑陽)·부여(扶餘) 등처를 체탐(體探)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왜적이 백마강(白馬江)에 이르러 나룻배를 빼앗아 종일토록 강을 건너는가 하면 얕은 여울로 건너기도 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잇따라 체탐인이 와서 보고한 것에 의하면 ‘은진(恩津)·부여·석성(石城) 등처에는 왜적의 기세가 몹시 성하여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 부여의 도천사(道川寺), 은산역(恩山驛) 등처에서 분탕질하였다…….’ 하였습니다. 호서(湖西)의 내포(內浦)는 왜적의 기세가 날로 성하여 수일이 못 되어 장차 여러 고을에 가득하게 될 텐데 병사(兵使)·방어사(防禦使)·찬획사(贊畫使)가 모두 좌도(左道)에만 있고 내포에는 정수나 병졸 한 사람도 파수하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조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지금 홍주(洪州)에 있는데 해미(海美) 등처에 왜적이 쳐들어와 도로가 막혀 통하지 못하게 되면 배를 타고 강화도(江華島)로 갈 계획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9월 9일 병신 5번째기사
@@다시쓰는징비록임진왜 그렇군요.감사합니다.대부분의 책에서 왜군의 진출로지도가 그럼 오류가 많네요.대부분의 지도에서 부여에서 꺽어서 내려오는 그림밖에 없더라고요.그렇다면 왜군은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의 완수하고 퇴각한셈이군요.결과적으로 직산전투나 명량이 왜군의 퇴각에 영향을 줬다고 보기 힘들군요.
이 질문 이전에 제 스스로에게도 던저본 질문이고, 가끔 관련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관련 영상도 유투브에 올라와 있더군요. 실제로 정유재란 당시 통신사 황신의 보고를 통해 일본의 재침시에 그 1차적 대상이 조선 수군과 전라도, 제주도가 될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선 조정에서도 제주도 침략에 대해 우려한 기록과 제주목사 이경록에게 제주도 방어에만 전력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지요. 이 질문에 대해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면 현재로서는 조선과 일본측 어디 기록에도 당시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략하지 않은 이유를 명확히 알려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 추정일 뿐입니다. 혹자 처럼, 명량해전 때문이다라고 하기에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본군이 순천까지 철수한 사항으로 조선 수군이 전라도 남서쪽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해서 그런 거다라고 설명하는 분들이 계시던데, 일정부분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전에도 왜구들이 직접적으로 제주도를 노략질 한 예도 많았고, 1612년 막부의 명을 받은 시마즈 가문이 제주도 보다도 멀고 그 세력도 만만치 않았던 유구(오키나와)를 침략하여 사실상 복속시킨 점이나, 1555년을 전후하여 명의 절강,복건성 일대를 초토화한 전례를 본다면 굳이 전라도 연안을 조선 수군이 장악해서 그런거다 라고 설명하기에도 뭔가 부족한게 사실이지요.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 추정을 물으신다면, 당시 일본의 군사전략적 우선 순위에서 제주도가 후순위로 밀려 있었고, 이후 벌어진 일련의 국내외적 상황이 제주도를 침공할 만한 상황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이전에 정유재란은 일본이 단순히 하삼도 일대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침략을 통해 조선의 전쟁수행능력을 감퇴시키고, 명에 대해서는 장기화되는 전쟁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켜 일본에 유리한 선에서 전쟁을 종결하러 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던 적인 있는데요. 이런 점에서 일본의 의도대로 이후 상황이 전개되어 군사-정치-외교적으로 조명 양국에게서 경기남부 지역을 할양받을 수 있다면, 지리적으로 그 남부에 있는 제주도는 당장 침공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일본의 영향권하에 들어온다는 점때문이겠지요. 실제로 제주도는 전라도의 속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재발하자 일본의 당초 의도와는 달리 명군의 대규모 파병과 울산성 전투를 시작으로 한 대규모 전투 및 대치 상황, 이어지는 풍신수길의 사망과 사로병진에 따른 전투와 조선에서의 철군이 긴박하게 맞물리면서 당초의 제주도 침공 계획은 유야무야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강사님.궁금한게 있습니다.정유재란때 조선은 청야술을 썼었는데 청야술은 성공적이었다라고 보시는지요?황석산성말고는 일본이 함락한 산성이 별로 없었나여
엄밀히 말하면 정유재란 당시 청야술을 사용한 건 아니고, 다만 불가피하게 산성전투를 우선시 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지 싶네요.
일본군의 침략시기가 추수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 시점이라 청야전술을 사용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닙니다.
대체로 청야전술이란 북방민족을 상대로 할때 효과적인 전술인데, 이는 북방민족이 주로 침입하는 시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추수기가 끝나고 강들이 얼어붙는 동절기 상황에서 추수한 곡식들을 성내로 최대한 모두 모으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림으로써
상대가 국내에서 군량조달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게 요체입니다.
수성에 성공하면서 장기전으로 가면 적군은 결국 지쳐서 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때 적의 퇴로나 후미를 공격하여 괘멸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진출로상의 교통의 요지마다 있는 읍성을 중심으로 최대한 요새화하여 순차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가장 좋고, 산성전투는 불가피한 경우나 특정한 상황에만 하는게 일반적입니다.
산성은 상대가 보기에 꼭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굳이 피해와 시간을 감수하며 공격할 이유가 없지요.
아직 명군의 대규모 본대가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고, 칠천량해전의 패전으로 수로를 통한 보급로가 이미 열려 있는 상태인데 미약한 조선군 홀로 읍성들을 방어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고, 피해도 더욱 키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판단합니다.
그런점에서, 조선이 택한 산성전투는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상당부분 효과도 있었다고 봅니다.
꼭 전투를 해서 수성을 하고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진격을 막는다기 보다는 당시 조선의 상황상 산성으로 백성과 병력들을 최대한 대피시켰다는 것이
어쩌면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질문있읍니다.강항의 간양록에 보면 14일에 이미 일본육군이 영광에 진출했다고 하는데 일본이 전남으로 남하한건 그이후인 정읍회의 이후 아닌가여? 14일에 금구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어떻게 14일에 이미 영광이 침략당할수가 있을까요.강항의 단순착각이었을까요
남원성이 8월 16일, 전주성이 8월 19일경 일본의 좌우군에게 각각 함락됩니다.
8월 25일경 전주에서 합류한 일본군은 29일경 우군은 북상을 좌군은 전라도를 초토화하기 시작합니다.
우군은 크게 보면 2개 부대로 나누어 북상한 것으로 보이는데,
좌군의 경로는 명확치는 않습니다.
일부는 부여,서천의 충청도 서쪽 방면으로 나머지는 남하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황상 여러 방면으로 부대를 나누어 전라도 전역을 대상으로
초토화 시킨 것으로 보이며. 금구전투도 이 시점에 벌어진 전투로 보입니다.
간양록에서 9월 14일경 일본군이 영광에 출몰했다는 것은 단순히 소문을 들은 것일 수도 있고,
강항이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피납된게 9월 23일경이니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UCIO6EUeUGDTayjd31wsuP6w 이순신의 세째아들인 이면이 아산에서 일본군에게 죽었으니, 인근 지역까지는 진출한 것은 확인이 됩니다.
그리고, 태안까지는 모르겠고, 서산 해미까지는 일본군이 올라왔다는 정탐기록은 있습니다.
체찰 부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3일에 홍주(洪州)의 향리(鄕吏) 이해(李海)가 청양(靑陽)·부여(扶餘) 등처를 체탐(體探)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왜적이 백마강(白馬江)에 이르러 나룻배를 빼앗아 종일토록 강을 건너는가 하면 얕은 여울로 건너기도 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잇따라 체탐인이 와서 보고한 것에 의하면 ‘은진(恩津)·부여·석성(石城) 등처에는 왜적의 기세가 몹시 성하여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 부여의 도천사(道川寺), 은산역(恩山驛) 등처에서 분탕질하였다…….’ 하였습니다.
호서(湖西)의 내포(內浦)는 왜적의 기세가 날로 성하여 수일이 못 되어 장차 여러 고을에 가득하게 될 텐데 병사(兵使)·방어사(防禦使)·찬획사(贊畫使)가 모두 좌도(左道)에만 있고 내포에는 정수나 병졸 한 사람도 파수하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조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지금 홍주(洪州)에 있는데 해미(海美) 등처에 왜적이 쳐들어와 도로가 막혀 통하지 못하게 되면 배를 타고 강화도(江華島)로 갈 계획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9월 9일 병신 5번째기사
@@다시쓰는징비록임진왜 그렇군요.감사합니다.대부분의 책에서 왜군의 진출로지도가 그럼 오류가 많네요.대부분의 지도에서 부여에서 꺽어서 내려오는 그림밖에 없더라고요.그렇다면 왜군은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의 완수하고 퇴각한셈이군요.결과적으로 직산전투나 명량이 왜군의 퇴각에 영향을 줬다고 보기 힘들군요.
정유재란때 왜 제주도는 안쳐들어갔었을까요?전라도를 침탈뒤 제주도에도 간다했는데....명량해전과 관련있었을까요?
이 질문 이전에 제 스스로에게도 던저본 질문이고, 가끔 관련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관련 영상도 유투브에 올라와 있더군요.
실제로 정유재란 당시 통신사 황신의 보고를 통해 일본의 재침시에 그 1차적 대상이 조선 수군과 전라도, 제주도가 될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선 조정에서도 제주도 침략에 대해 우려한 기록과 제주목사 이경록에게 제주도 방어에만 전력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지요.
이 질문에 대해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면 현재로서는 조선과 일본측 어디 기록에도 당시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략하지 않은 이유를 명확히 알려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 추정일 뿐입니다.
혹자 처럼, 명량해전 때문이다라고 하기에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본군이 순천까지 철수한 사항으로 조선 수군이 전라도 남서쪽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해서 그런 거다라고 설명하는 분들이 계시던데, 일정부분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전에도 왜구들이 직접적으로 제주도를 노략질 한 예도 많았고, 1612년 막부의 명을 받은 시마즈 가문이 제주도 보다도 멀고
그 세력도 만만치 않았던 유구(오키나와)를 침략하여 사실상 복속시킨 점이나, 1555년을 전후하여 명의 절강,복건성 일대를 초토화한 전례를 본다면 굳이 전라도 연안을 조선 수군이 장악해서 그런거다 라고 설명하기에도 뭔가 부족한게 사실이지요.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 추정을 물으신다면,
당시 일본의 군사전략적 우선 순위에서 제주도가 후순위로 밀려 있었고, 이후 벌어진 일련의 국내외적 상황이 제주도를 침공할 만한 상황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이전에 정유재란은 일본이 단순히 하삼도 일대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침략을 통해 조선의 전쟁수행능력을 감퇴시키고,
명에 대해서는 장기화되는 전쟁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켜 일본에 유리한 선에서 전쟁을 종결하러 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던 적인 있는데요.
이런 점에서 일본의 의도대로 이후 상황이 전개되어 군사-정치-외교적으로 조명 양국에게서 경기남부 지역을 할양받을 수 있다면,
지리적으로 그 남부에 있는 제주도는 당장 침공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일본의 영향권하에 들어온다는 점때문이겠지요. 실제로 제주도는 전라도의 속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재발하자 일본의 당초 의도와는 달리 명군의 대규모 파병과 울산성 전투를 시작으로 한 대규모 전투 및 대치 상황, 이어지는 풍신수길의 사망과 사로병진에 따른 전투와 조선에서의 철군이 긴박하게 맞물리면서
당초의 제주도 침공 계획은 유야무야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