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지역 신라-고려-조선 수군진영 배치 변화 | 장보고 임진왜란 이순신 | 화구 해적 | 경상좌수영 진관체제 | 신미양요 척화비 | 그레이트 게임 고종 러시아 보호국 부동항 영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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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0 вер 2024
  • 안녕하십니까.
    2020년, 포항시는 흥해읍 칠포리에서, 조선시대에 축성된 칠포리 수군만호성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조사지역 성벽에서 ‘정덕십년 을해조축 성 (正德十年 乙亥造築 城)’ 명문을 발굴하여, 수군진영이 1515년 축성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포항
    #흥해읍
    #칠포리
    오늘은, 포항지역의 수군 진영 배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➀ 신라는, 지금의 청하면 월포리인, 청하 개포(介浦)에 수군이 주둔하며, 왜의 선박이 침입하면, 봉수로 연락해, 즉각 대응토록 했습니다. 신라시대 왜구의 침입기록을 보면, 혁거세왕 8년인 기원전 50년(BC 50년)부터, 소지왕 22년인 500년까지, 25차례에 이릅니다.
    해적들에 납치되어 노예로 살아가는 신라인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분개한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신라 수군을 강건히 일으켜, 해적 토벌과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합니다. 장보고가 활약하는 시기에는, 해적들의 약탈과 신라 노예 매매가 사라졌습니다.
    #수나라, 당나라 화구 (중국 해적)
    #신라
    #신라수군
    #장보고
    ➁ 통양포수군만호진영지(通洋浦水軍萬戶鎭營址)
    고려시대에도, 해로(海路)를 통한 외세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916년, 거란이 요나라를 세우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자, 발해 지역의 여진족은 해상을 이용해 고려와 일본을 약탈합니다. 현종3년인, 1012년에는, 청하, 흥해, 영일, 장기 등지에, 동여진이 침입하여, 고려 군사가 동여진 해적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여진족 해적
    1300년대 시기에는, 동아시아 지역은 한랭 기후변화로 식량 위기를 맞습니다. 고려 말엽인 1350년부터 1381년까지는, 일본 왜의 노략질이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흥해 지역이 왜에 함락돼, 수령이 다른 마을로 수년간 피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니, 백성들이 겪었을 수난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왜의 행패가 날로 극심해지자, 고려 우왕 13년인 1387년, 신라시대에 설치했던 청하의 개포 수군진을, 지금의 영일만 두호동인, 통양포 두모적포로 옮기고, 병선 8천과 수군 218명을 배치합니다.
    #고려
    #고려수군
    #수군진
    ▶ 조선실록 경상도 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육군인 군관과 해군인 수군을 체계적으로 재배치합니다. 경상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은 낙동강을 경계로 관할지가 구분됩니다.
    #조선실록
    #경상도
    #경상도지리지
    #경상좌수영
    경상 좌수영은 낙동강 남해안에서 경북 동해안 지역으로, 편제는, 동래현 부산포에 본영을 두고, 총 11개 진영을 갖추었습니다. (염포, 해운포, 다대포, 두모포, 개운포, 서생포, 감포, 포이포, 통양포, 오포, 축산포)
    ➂ 현재 영일만 내에 있는 오천 해병대 부지에, 영일진을 설치하고, 군관 3백 1명, 성을 지키는 수성군 80명을 배치합니다.
    ➃ 장기 모포항 위치에, 포이포진을 설치하고, 병선 8척, 군사 5백 89명을 배치합니다.
    ➄ 흥해에 칠포진을 설치하고, 고려시대에 통양포 두모적포에 배치한 병선 8척, 군사 2백 18명을 칠포진으로 이동합니다.
    #영일진
    #포이포진
    #칠포진
    이것은, 소규모 해적단인 왜구를 방어하는데 적합한 도(道) 단위의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 수군은, 세조 때 도입한 진관체제를 유지합니다.
    #진관체제
    #경상좌수영
    #임진왜란
    ▶ 포이포만호진영지(浦伊浦萬戶鎭營址)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경상 좌수영의 모든 수군은 수영성 관할로 이동하여, 왜군과의 전쟁에 참여합니다.
    임진왜란 후, 왜군의 대규모 해상 침략에 대비 하고자, 효종 9년인 1658년, 장기의 포이포, 기장의 두모포, 울산의 개운포를, 동래 부산포로 옮깁니다.
    영조 27년인 1751년, 효율적인 수군 운영 유지를 위해, 경주의 감포, 영덕의 축산포, 흥해의 칠포, 장기의 포이포 등, 경북 동해안 수군진영은 대부분 혁파되고 사라집니다.
    #수군진영
    ▶ 조선의 통상수교와 문호개방
    ➀ 1866년 병인양요 - 병인박해와 프랑스 극동함대
    ➁ 1871년 신미양요 -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미국 군함
    ➂ 1876년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합니다. 병인양요 이후, 동해안에 서양의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자, 1784년 혁파한 구호곡을 수송하던 포항창진을, 1870년 수군 기지로 재활용합니다.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웁니다.
    1872년 지방지도 포항진지도를 살펴보면, 척화비와 포항창진 앞에 선박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통상수교를 맺고, 해외에 문호를 개방 합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흥선대원군
    #척화비
    #포항창진
    ▶ 칠포진영지 (漆浦鎭營址) 발굴작업
    포항 흥해읍 칠포리에서, 조선시대 칠포수군 성곽 유적 발굴작업이 있었습니다. 포항시 홈페이지 연구용역 자료에서, 정밀지표조사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고자, 흥해군 칠포리 해안에 칠포수군성을 축성하고, 수군이 주둔했다고 합니다. [경국대전] 기록에 의하면, 조선 수군은 이곳에 5척의 선박을 배치하고, 수군 120명이 주둔했다고 합니다.
    발굴과정에서, 성벽 유적에 쓰여진, '正德十年 乙亥造築 城(정덕십년 을해조축 성)'이란 명문을 찾아내, 1515년에 축성을 마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 포항 영일만과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정부가 저급 불량쌀로 지급하여 발생한 사건.
    ➁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 왕비 민비와 민씨 친족의 부정부패, 매관매직, 그리고 청나라에 의존하는 민씨 중심의 수구당을 타도하고, 조선 정치를 쇄신해 보려는 젊은 개화파의 봉기.
    #임오군란
    #갑신정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을 겪은 뒤, 고종의 권위는 땅에 떨어집니다.
    청나라, 일본, 영국 등, 대다수 국가들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레이트 게임’을 별이는 국제적 상황에서, 조선 고종은, 국제 정세의 흐름을 오독한 체, 홀로 ‘외교적 도박’에 나섭니다. 고종은,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국경을 맞댄 ‘제3의 세력’인 러시아의 힘을 빌려 오기로 합니다.
    1884년 12월, 고종의 외교자문 ​묄렌도르프는, 주일 러시아 공사관에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삼고,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200명의 해군으로 구성된 함대를 인천에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대가로, 한반도 남부의 부동항인 운콥스키만(포항 영일만)을 러시아 해군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국제 정세상 조선의 보호국 요청을 거절합니다.
    1885년 2월, 이번에는, 조선 병사 2000명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장교 4명과 하사관 16명으로 구성된 러시아 군사교관을 조선에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러시아는 군사교관을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이 사실이 청나라,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연합국에 알려지자, ‘그레이트 게임’의 풍랑이 한반도에 몰아칩니다. 1885년 4월15일,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전함을 보내 거문도를 점령합니다.
    고종과 묄렌도르프의 ‘비밀 외교’가 국제적 문제로 드러나자, 1885년 7월, 고종과 조선 조정은, 모든 책임을 ‘묄렌도르프의 월권’ 탓이라고 변명하며, 묄렌도르프를 파면합니다. 버림받은 묄렌도르프는 8월에 면직돼고, 11월에 조선을 떠납니다.
    이후, 분노한 청나라 리훙장(이홍장)은, 고종을 견제하기 위해, 임오군란 이후 3년이나 잡아 두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1885년 9월 귀국시키고, 11월엔, 27살 위안스카이(원세개)를 조선에 보내 가혹하고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나섭니다.
    1886년 9월, 청나라와 러시아는, 고종이 벌인 ‘서커스 외교’의 뒷수습을 위한, 톈진 협상에서, 러시아는, 조선 영토의 현상 유지와, 한반도로 남하하지 않겠다고 구두 약속을 합니다. 청나라가, 러시아의 뜻을 영국에 전하자, 1887년 2월, 영국해군은 거문도에서 철수합니다.
    러시아가 실제로 포항 영일만에 해군기지를 건설했다면, 세계열강이 한반도에서 충돌하는 참혹한 비극이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북한은 핵을 개발할 의지도 없고, 핵을 개발할 기술도 없다며, 핵을 개발하면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대한민국 국민을 속이며 북한에 돈을 퍼준 김대중 대통령, 북조선은 비핵화에 나설거라며 평양에서 대국민 평화팔이 쇼를 한 문재인 대통령. 그러나, 북조선은 미사일과 핵 무력 고도화를 통해, 자유 대한민국 국민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고, 국토를 방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아가 국제평화유지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방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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