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영상 퀄리티에 놀라 감동이 따릅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광개토태왕과 고구려군이 위례성을 포위하다." "백제 아신왕 항복하다." 백제 개로왕 이전에 아신왕께서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 항복한적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광개토대왕은 동족이라 여겼는지....백제를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일까요? 그 후에 있던 개로왕시절 땐 흔히 한성 백제 멸망? 이라는 학자들이의 연구. 아니 백제 멸망으로 보는 시각도 많은데.. 어째서 아신왕 때의 항복은 멸망으로 간주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백제가 고구려에 두번씩이나 멸망 할 뻔한 것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공주 공산성하고 대전 월평동 세종 부강면은 구 도로 기준으로도 차로 한시간 이내 거리죠. 신탄진 바로 옆 금강변 소문산성에 그 지역 전설에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서로 도발했다는 내용도 있는거 보면 아마 공주로 내몰린 백제 세력이 차령산맥과 금강 미호천 계룡산 등을 마지노선 삼아 필사적으로 고구려 세력을 막으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도림 이야기는 태국 북부에서 타이족들이 기존의 북부를 차지하던 하리푼차이를 공격할 당시의 이야기와 아주 흡사합니다. 비록 바둑을 두지는 않았지만요. ㅋㅋㅋ 말씀하신대로 그 행간에는 더 많은 흥미진진한 암투들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도림이란 이름 덕분에 상상의 날개를 살짝 펼쳐봅니다. 감사합니다.
아아 양나라가 아니네요 남제이네요 음 삼국사기 488년 동성왕 10년 위가 군사를 보냈으나 백제에 패했다 자치통감 위나라가 백제를 공격했으나 패했다 남제서 위가 기병 수십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으나 사법명 해례곤 목간나 등에게 패했다 저도 예전에 역사스페셜인가에 동성왕이 중국쪽 무슨나라에 북위 기병을 무찔러서 자신들의 장군들을 매라왕 면중후? 뭐 이런 왕과 제후에 봉해달라고 외교 서찰이 발견되었다 라는 부분을 방송했는데 동성왕이라고 하니 그게 생각나서 여쭤봤습니다~~ 궁금하잖아요 유튜에 역사를 다루는 채널이 많은데 딱 학교에서 배우는 수준으로만 하는 분도 있고 이게 진짠가 할만하게 국뽕차오르게 하는 분들도 있도 또 그 중간도 있고.. 그래서 항상 아쉽네요 우리는 항상 다른이가 그들의 가치관으로 쓰여져 변방의 이민족 취급을 받으며 써진 역사서로 공부해야 하고 우리손으로 쓰여진 삼국사기유사등등은 정사로 인정 받지도 못 하고 논란만 ㅠㅠ 정작 만들어진지 2000년이 넘은 사마천의 사기는 정사라고 그대로 믿는데 ㅠㅠ 에휴 말이 길어졌네요 항상 아쉽더라구요~ 우리끼리 맞네 아니네 싸우는 모습이
동성왕때 난데 없이 북위가 처들어왔다는 황당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 대목에 대해 교수님 왈! 고구려 군 속에 뭔가 다른 조금 대륙(중국)스런 복장과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있어 현장에 있던 장수들과 역사를 기록하던 자들이 아마 북위 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적었을 것이라 아주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던 것 기억납니다. 이 대목이 수상해서 나중에 답사때우연히 만난 타 대학 교수님께 한잔 하면서 슬쩍 물어보니 술맛 떨어진다? 는 핀잔과 함께 고구려를 상대했는데 남조에 상? 받을려고 북위를격파 했다 허풍을 떤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느낀것이 와 이쪽은 상상력이 좋아야 된다는 것 이었습니다.
백제가 중국과 교역할때 한성에서는 인천쪽에서 출발하는건 당연하게 생각할수 있는데 웅진이나 사비는 금강을 이용해서 진포 (기벌포)에서 교역의 거점을 삼을수 있는데 당진쪽에서 교역을 한것은 산동반도와 거리가 가까워서 일까요? 왜와 교역하는것은 웅진이나 사비에서 출발했던것 같은데 중국과의 교류는 당진쪽을 이용한것이 무슨 의도가 있었을지 궁금해지네요.청양이 사비에서 당진으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서 방어시설이 많이 생긴것이군요.부여 청양 홍성 예산 당진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던 백제인의 자취가 있겠군요.
요 며칠 남성골산성 앞의 부강포에 대해 관심이 생겨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부여의 규암나루까지 바닷배가 들어오고 거기서 강배로 교체하여 부강포구로 왔다고하니 당시 남성골산성의 고구려군은 배를 이용한 압박을 했지않았을까 합니다 영상 중 5세기 말까지 남성골산성에서 고구려군이 머물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무령왕이 갱위강국을 선언하기 직전 남성골에서 떠나지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가불성과 원산성 함락 직후 기병 3천으로 위천 북쪽에서 싸워이겼다는 기록을 읽고 늘 위천이 어딜까 궁금해 하고 있는데 혹여 짐작하시는 바 있는지 여쭈어도 될런지요?
오 498년, 동성왕이 사정성을 세운곳이 대전 사정동이 맞다면 인근의 수많은 성들중 하나라고 보며, 시기상 고구려가 월평동산성을 점령했을무렵이라보고 도기동산성이 6세기까지 사용되었으므로 전투가있었던512년이면 고구려의 남하를 차단하던 전투였을것이라고 보아 고구려정착이 발견된 대평리유적이나 상봉리고분군 인근의 하천일 확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송두리면 진천 백곡천, 상봉리면 미호강으로 볼수 있겠습니다🤔
송파주민들은 풍납토성때문에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아마도 재개발문제나 이런 것들때문에 다들 난리네요. 원만한 해결이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단순히 장수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했다고하지만 문주왕이 다시 위례성을 탈환한건 처음 알고 갑니다. 백제가 위례성을 계속 차지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가지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울역사는 조선인가 백제인가때문에 말도 많은 요즘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영상 입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
정말 좋은 영상 잘보고갑니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
시청 감사드립니다😌😄
사적돌 문과 교수들 100명분 몫을 해내네요. 환빠에 안빠지고, 협소함에도 치우치지 않고. 유튜브에 최적화!
좋은말씀 감사드립니다😌 한결같은모습으로 계속하겠습니다😄
사적돌님 덕분에 산성 및 사적답사라는 취미가 생겼습니다. 모기와 열심히 싸우고 있어요. 더운 날씨에 고생 많으십니다
후원 감사드립니다😌😄
답사가 취미가 되셨다니 동지를 뵙는것 같습니다
날이 너무 더우니 열사병 조심하세요😌
오늘도 재밌게 봤습니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자동차 주행거리가 꽤 되겠어요
너무 고단하시겠어요 ㅜㅜ
ㅎㅎㅎ 염려감사드립니다, 유튜브가 이정도로 일이 많을줄은 미처 몰랐네요😱
매번 영상 퀄리티에 놀라 감동이 따릅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광개토태왕과 고구려군이 위례성을 포위하다."
"백제 아신왕 항복하다."
백제 개로왕 이전에 아신왕께서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 항복한적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광개토대왕은 동족이라 여겼는지....백제를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일까요? 그 후에 있던 개로왕시절 땐 흔히 한성 백제 멸망? 이라는 학자들이의 연구. 아니 백제 멸망으로 보는 시각도 많은데.. 어째서 아신왕 때의 항복은 멸망으로 간주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백제가 고구려에 두번씩이나 멸망 할 뻔한 것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당시 고구려 내부 정치문제 아니었을까 생각하고있습니다, 개로왕때 방어선이 너무 쉽게 무너진것도 요인이고요🤔
참고로 ⛰️行을 하실때..어깨끈 빽 보다는..베낭을 메고 등ㅇㅔ 딱 붙여 다니씨는게 훨씬더 편하실 겁니다..😂
오 말씀 감사드립니다😌
오늘영상도 감동적입니다
우산성의 지리적위치를 보았을태
제이수도로 삼으러하지 않을가하는 생각이듭니다 천도후계속했서 반란으로 위했서 왕들이살했되었다면
웅진이 위기있기에 들어다는생각이 듭니다 또한 왕족들과 권문세력을 견제하기 위했서 축조하지 않을가합니다 백제고분군있다기에😊
무더운 여름철에 건강조심 하세요
다음영상은 남부지방이라 하는데
어느지방 있지요 감동적인 영상부
탁드립니다
공주 공산성하고 대전 월평동 세종 부강면은 구 도로 기준으로도 차로 한시간 이내 거리죠. 신탄진 바로 옆 금강변 소문산성에 그 지역 전설에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서로 도발했다는 내용도 있는거 보면 아마 공주로 내몰린 백제 세력이 차령산맥과 금강 미호천 계룡산 등을 마지노선 삼아 필사적으로 고구려 세력을 막으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전남지방을 한동안 못가서 요청지가 많이 쌓였습니다, 골고루 분포해 있네요 산성들이 많습니다😄
배운적이 없는건지 기억이 없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르던 역사를 배우네요
소개의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이제..서서히..
댓글이
많이
달리기 시작 하네요😄😄😄
구독자분들도 많이 늘었고 댓글도 소화할수 없을정도로 많이 달리네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도림 이야기는 태국 북부에서 타이족들이 기존의 북부를 차지하던 하리푼차이를 공격할 당시의 이야기와 아주 흡사합니다.
비록 바둑을 두지는 않았지만요. ㅋㅋㅋ
말씀하신대로 그 행간에는 더 많은 흥미진진한 암투들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도림이란 이름 덕분에 상상의 날개를 살짝 펼쳐봅니다.
감사합니다.
오 태국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군요😮 신기합니다😄
도대체 저 북위는 어디서 출몰한걸까요? 백제 북은 고구려 서쪽은 서해가 막고 있는데 미스테리입니다
그래서 육로로 보냈는데 고구려에게 차단되어 돌아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사적돌 아 그럼 동성왕이 양나라인가? 중국왕에게 알린 승전보 및 공을 세운 장수들을 왕과 제후에 봉하는 문서는 신빙성이 떨어지나 보군요
@@사적돌어디에 그런 기록 있을까요? 출처 좀 공유 부탁드립니다.
오 송구합니다 북위가 아니고 송입니다. 착각했네요😌
아아 양나라가 아니네요 남제이네요 음 삼국사기 488년 동성왕 10년 위가 군사를 보냈으나 백제에 패했다 자치통감 위나라가 백제를 공격했으나 패했다 남제서 위가 기병 수십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으나 사법명 해례곤 목간나 등에게 패했다 저도 예전에 역사스페셜인가에 동성왕이 중국쪽 무슨나라에 북위 기병을 무찔러서 자신들의 장군들을 매라왕 면중후? 뭐 이런 왕과 제후에 봉해달라고 외교 서찰이 발견되었다 라는 부분을 방송했는데 동성왕이라고 하니 그게 생각나서 여쭤봤습니다~~ 궁금하잖아요 유튜에 역사를 다루는 채널이 많은데 딱 학교에서 배우는 수준으로만 하는 분도 있고 이게 진짠가 할만하게 국뽕차오르게 하는 분들도 있도 또 그 중간도 있고.. 그래서 항상 아쉽네요 우리는 항상 다른이가 그들의 가치관으로 쓰여져 변방의 이민족 취급을 받으며 써진 역사서로 공부해야 하고 우리손으로 쓰여진 삼국사기유사등등은 정사로 인정 받지도 못 하고 논란만 ㅠㅠ
정작 만들어진지 2000년이 넘은 사마천의 사기는 정사라고 그대로 믿는데 ㅠㅠ 에휴 말이 길어졌네요 항상 아쉽더라구요~ 우리끼리 맞네 아니네 싸우는 모습이
동성왕때 난데 없이 북위가 처들어왔다는 황당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 대목에 대해 교수님 왈!
고구려 군 속에 뭔가 다른 조금 대륙(중국)스런 복장과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있어 현장에 있던 장수들과 역사를 기록하던 자들이 아마 북위 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적었을 것이라 아주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던 것 기억납니다.
이 대목이 수상해서 나중에 답사때우연히 만난 타 대학 교수님께 한잔 하면서 슬쩍 물어보니 술맛 떨어진다? 는 핀잔과 함께 고구려를 상대했는데 남조에 상? 받을려고 북위를격파 했다 허풍을 떤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느낀것이 와 이쪽은 상상력이 좋아야 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일본서기 읽어보면 분명 택도 없는 소설이지요,
거기서 옥석을 잘추려내면 우리 고대사를 거의 해독할수 있을정도지만 그대로 읽어버리면😨
우리나라 삼국시대문화를 이렇게 깊게 파고드는 영상은 제가 알기론 유일 하신거같은데 너무 재밌고 흥미로운소재들이네요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그런가요😮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동성왕이 구세주였지만 정조처럼 한분으로는 부족하지요ㅠㅠ
백제왕실의 중앙집권이 빨랐다면 완전히 다른 역사가 쓰였을텐데요🤔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기름값 좀 넣었습니다
고액의 후원 감사드립니다😌 매번 너무 신세지는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겠습니다😄
백제가 중국과 교역할때 한성에서는 인천쪽에서 출발하는건 당연하게 생각할수 있는데 웅진이나 사비는 금강을 이용해서 진포 (기벌포)에서 교역의 거점을 삼을수 있는데 당진쪽에서 교역을 한것은 산동반도와 거리가 가까워서 일까요? 왜와 교역하는것은 웅진이나 사비에서 출발했던것 같은데 중국과의 교류는 당진쪽을 이용한것이 무슨 의도가 있었을지 궁금해지네요.청양이 사비에서 당진으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서 방어시설이 많이 생긴것이군요.부여 청양 홍성 예산 당진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던 백제인의 자취가 있겠군요.
충남 서북부 지역이 중국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로 문화적으로 번성해서
많은 불교유적이 남아있기도합니다. 과거에는 바다를 건너는 일은 가능하면 짧게하려고했지요😮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의 천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해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요. 역시 역사나 설화는 단순하진 않군요
고구려출신이라는것을 알았을테니 의심도 했을터이고,
대신말은 안듣고 고구려출신 승려말만 더 듣는것도 말이 안되지요🤔
백제출신 장수들에 의한 군사기밀노출이 크지 않았나 합니다,
요 며칠 남성골산성 앞의 부강포에 대해 관심이 생겨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부여의 규암나루까지 바닷배가 들어오고 거기서 강배로 교체하여 부강포구로 왔다고하니 당시 남성골산성의 고구려군은 배를 이용한 압박을 했지않았을까 합니다 영상 중 5세기 말까지 남성골산성에서 고구려군이 머물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무령왕이 갱위강국을 선언하기 직전 남성골에서 떠나지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가불성과 원산성 함락 직후 기병 3천으로 위천 북쪽에서 싸워이겼다는 기록을 읽고 늘 위천이 어딜까 궁금해 하고 있는데 혹여 짐작하시는 바 있는지 여쭈어도 될런지요?
오 498년, 동성왕이 사정성을 세운곳이 대전 사정동이 맞다면 인근의 수많은 성들중 하나라고 보며, 시기상 고구려가 월평동산성을 점령했을무렵이라보고
도기동산성이 6세기까지 사용되었으므로 전투가있었던512년이면 고구려의 남하를 차단하던 전투였을것이라고 보아
고구려정착이 발견된 대평리유적이나 상봉리고분군 인근의 하천일 확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송두리면 진천 백곡천, 상봉리면 미호강으로 볼수 있겠습니다🤔
네이버 지도에서 7:56 청양읍 적누리 적누저수지 북쪽의 산 통행로를 보니 영락없는 테뫼식 산성의 입지 같습니다. 부여로 통하는 길을 감제하기 좋은 곳이네요. 우산성의 모습은 십여년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군요. 잘 봤습니다.
확실히 뭔가 있는것 같습니다😄 시청 감사드려요😌
송파주민들은 풍납토성때문에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아마도 재개발문제나 이런 것들때문에 다들 난리네요. 원만한 해결이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단순히 장수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했다고하지만 문주왕이 다시 위례성을 탈환한건 처음 알고 갑니다. 백제가 위례성을 계속 차지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가지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울역사는 조선인가 백제인가때문에 말도 많은 요즘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영상 입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일괄 서울시에서 매입하기로 되어있으니..
아파트같이 기저층으로 파고들어 유구가 망실된 경우는 제외하고 지속매입하는것으로 압니다🤔
한강의 역사가 한반도의 역사지요😄
@@사적돌 아 한강의 역사가 한반도의 역사다 명쾌한 해답이네요 감사합니다
사실 한성을 탈환했어도 뺏고 빼앗기는 그런지역이 아닐까요? ?
꼭 지배해야하고 포기하면 안되는곳이지요
신라가 백제 뒤통수치며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유가 있지요🤔
산성 고고학 연구하시는 책에서 보았는데 칠갑산에 막혀있는 이유등으로
지방 행정의 중요역할을 했을거라고 하더라구요 ~ 방성은 아닐지라도 ?
우산성이 고량부리현의 치소가 아닐까보기도 하더군요
그만큼 중요한곳이고 인근 사시량현과 연계한 관방유적이 특기할만 하지요😄
고구려 군대가 세종 대평동? 까지 왔었다는것은 알고 있네요 세종에서 웅진까지 얕은 구릉을 넘응 ~ 지척이니 천도를 생각😊했겠지요?
동성왕 시절 - 북위가 쳐들어왔다는건
대륙백제설에 힘을 실을수 있는 기록일까요?
북위 고구려 연합군으로 보고있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에 해당 군대를 흉리 험윤이라 칭하는데, 이는고구려의 멸칭입니다.
@@사적돌 흉리와 험윤 중 무엇이 고구려 멸칭인가요? 그리고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사료적 근거가 있을까요?
한성백제 위례성은 진짜 어디였을까요??
서울은 도시화로 흔적 찾기 힘들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 도굴과 파괴로 찾기 힘들텐데…
근초고왕의 릉으로 보이는 왕릉이 나온다면 대한민국 역사계는 흥분할거 같은데…
학계의 의견은 이제 거의 좁혀진것 같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재개발때문에 드러나는 시가지유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