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님 영상 감사합니다. 전공은 아니지만 역사에 항상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고려사의 권58지 권제12 지리3의 동계 함주도독부 공험진에 예종6년에 공험진에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이미 상실하여 여진에 반환할 때 반환 목록에도 없던 곳에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그냥 오기일까요? 어떤 해석이 가능할런지요?
거란과의 관계.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내내 저는 거란과의 문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고려가 과연 17만 대군을 유지할 능력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7만의 대군을 유지할 능력이 있었다면 여진의 반발이 거셌다하여도 동북9성을 내줄 이유도 없었을텐데 하는 생각. 여진의 반발, 거란과의 문제 그리고 17만 대군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고려 내부적인 부담. 이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동북9성을 돌려줄 수 밖에 없었나 봅니다. 역시 일시적으로 남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과 그것을 우리 영토로 귀속하고 유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인가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도 초강대국인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지만 유지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 처럼 당대 초강대국도 아니었던 고려가 점령한 영토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모구씨kor 보통 길주설, 두만강 700리설이 있고 함주설은 일제때 식민사관으로써 왜곡 축소한 이야기고 조선 4대 세종 치세 4군 6진을 개척할때 6진에 공험진의 선춘령 비문을 이야기 하는걸로 보아 두만강 700리설이 타당하다 보는 경향이 있기에 고려가 허접한게 아닌 총력을 다했으나 주르첸의 결사적으로 막은 엄청난 접전의 전쟁 이었던거죠
@@미제드론 조선시대 초의 군사력은 상당히 강력했습니다. 세조이후 군사력을 키우지 않아 약해진 것입니다.ㅡ 세종의 4군 6진도 다행으로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이마져도 명나라의 눈치를 보며 차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명나라 때문에 북방으로 영역을 넓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네요 동북 9성의 존재가 12성일 가능성, 윤관이 동북 6성을 축조하고 영주청벽상기에 고구려의 옛땅을 얻은걸 하늘의 뜻이라 말하는것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너무 쉽게 전쟁을 멈추고 땅을 돌려준게 아쉽네요 분명 고려도 타격이 있고 계속 지키는게 힘에 부치지만 그건 주르첸도 매한가지일텐데 고려에서 회의를 할때 반대한 2명처럼 솔직히 정 3품 이상의 고위직들이 너무 쉽게 포기한것 같아 아쉬워요 또한 키타이의 견제가 있다고 하는데 기억은 안 나지만 어디선가 이야기를 들을때 키타이가 고려와 주르첸의 전쟁을 보고 있다가 둘다 약해지면 어부지리를 노린다는 이야기를, 주르첸도 자기 부족내 부정적 여론에 급박하고, 고려는 키타이가 만약 군사력의 공백을 노리고 공격하면 큰일이기에 조속히 마무리 할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죠 금사의 기록은 아는데 혹시 다른 사료나 기록들은 없나요?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高麗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죠.
거란 역사를 보면 몽골제국은 세계를 정복 했는데 얘들은 왜? 이런 의심이 듭니다. 항상 뒷심부족, 고질적 문전처리 미숙 으로 항상 2% 부족했기에 세계제국이 되지 못한 정복국가 였네요. 거란이 고려의 여진정벌을 반대 했다는 걸 보면 얘들은 얼마나 외교적으로 미숙했는지 보입니다. 결과론적 해석입니다만 거란은 여진에게 멸망하죠. 머리가 돌아가는 작자였으면 고려를 부추겨 여진과 전쟁을 계속하게 하는 이이제이 전략을 펼치는게 장기적으로 보면 거란에게 훨씬 이익이었습니다. 고려 역사를 보면 전쟁은 아쉬운 면모가 있었지만 외교만큼은 기가 막힌 찍기 실력을 보여줘서 (서희의 외교 담판, 귀주대첩 전후 처리, 윤관의 여진정벌 후 전후 처리, 원종의 쿠빌라이 항복..) 나라를 이끌어갔는걸 볼떄, 거란 얘들은 외교 찍기도 드럽게 못했네요.
갠적인 생각으론 발해인들중 고구려계쪽은 고려로 상당수가 넘어왔고 말갈계통은 여진족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까요? 왕건 후삼국 통일이 936년. 990년대부터 당시 최강 거란과 전쟁을 시작했는데. 60여년만에 고려가 강군을 육성한대는 발해인들의 내투가 상당부분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저는 공교육이. 문제라고 봅니다. 그걸 구체화. 시킨 사람들 총독부 식민. 사학자라고 봅니다. 그걸 지금 공교육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서희 강동. 6주가.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땅. 구성 등. 인가요 서희가. 동서남북도 모르는 바보인가요. 지금 거란전쟁에 나오는 강동6주가 압록가믈 기준으로 한다면 강남인가요. 강동인가요. 강남 이잖아요. 또. 위화도가 있어요. 지금 위화도. 그 조금한. 섬에서. 얼마나 주둔 햇겟어요. 1천명? 또 지금 위화도는 장마지면 잠겨요. 위화도는 지금. 위화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또 요나라 남쪽이나. 동쪽은 국경 표시로. 불탑을. 세웁니다 요나라가. 압로캉. 두만깅 지역에. 요 불탑 흔적. 있나요? 그렇다면. 윤관이 압뢰강. 두만강 이북에서. 전투를 치뤗다는 겁니다 저. 교수니이. 헛다리 짚고 있어요,
동북 국경과 서북 국경을 이렇게 설명하다니.. 스스로 설명하면서 얼마나 모순을 느낄까?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동북 국경(두만강 북부 공험진 선춘령)에서 남서쪽으로 내려 가면 심양 쪽 서북 국경이 된다고 설명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원산쪽에 쌍성총관부가 있다고 스스로 말했으니 오연총이 동북에서 깨지는데 서북쪽에서 윤관을 움직여 지원한다는 것이 말이 안돼지... 그러니 스스로 말하며 이상하다고...쑥스럽게.. 나중에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변경할까? 정말 궁금하네요.
식민. 사학자. 입에서 나오네요 나 장말 님 역사 듣다보면 여켸와서. 다 못. 들어요. 자. 이야기. 해 보자자요 1. 자신이 승리. 햇으면. 협상 사는가요 그리고 윤관이 북동 9성을. 개척 햇다는 겁니다. 그럼 북동 9성. 이이기. 할수 잏나요. 정확히. 아세요. 북쪽. 동으로 9성이란 이야기입니다. 그럼 자 북쪽으로 9성이 어디인지 설명하고 이야기 하란 이야기입니다 북동. 9성이 어딘대요. 모르지요 말씀 해 보세요
북한의 아오지 탄광 이름이 까만돌이란 뜻의 여진족 사투리 .. 청태조 누르하치가 멧돼지 가죽이란 뜻인데 우리말로 「 누렣치 」, 멧돼지 가죽이 누렇죠 . 만약 여진족이 우리와 합쳤으면 제주도 사투리 정도로 여겼을 여진족의 말 일 테지만 .. 북한과의 통일이 되지 못한다면 먼 훗날 북한이나 조선족도 우리와는 다른 , 여진족 같은 존재가 될겁니다 .
터키의 99.9999프로는 아랍인종이나 유럽인종,그러나 몽골인과 조상이 같은 아시안이 그 시조..그래도 터키는 그 돌궐로 국가의 정체성을 삼음. 여진족보단 몽고족이 한민족이 시조를 공유하는 민족.그러나 유전자는 여진족 한민족이 쌍둥이처럼 일치하고 몽고는 한민족과 유전적 거리가 멈.또 여진,만주족은 역사도 한민족 고대국가들을 자신들의 시원으로 여김..돌궐이란 정체성을 지키고 사는 터키와는 다르게 만주족은 숙신,읍루에게선 언어만 물려받고,한민족의 유전자와 역사를 받아들이고 한민족의 방계가 돼버린 것. 청황제가 감수한 만주원류고에 몽고에 대해선 일도 언급없이 한민족 조상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기술하고 있음.당시 세계제국 청이 한민족시원을 자신들의 뿌리라 여긴 것.여진인들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여긴 것이 같은 맥락. 고려는 그들을 멸시했지만... 역시,후에 만주족이 다시 뭉쳐 소국이라도 세운다면 한민족 고대국가들에 자신들의 뿌리를 댈 것이다..한국은 이제 말갈,여진만큼은 그리고 일본에 막부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일본고대사는 한민족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 청의 만주족이나 무로마치막부 이후의 일본은 타국으로 기술하는 것이 맞고
아니. 계속 보니 안타까운 분이시네요. 님이 그렇게 역사를 잘 알고 똑똑하십니까? 당신에게는 유튜브 하시는 분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비난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런 권리를 행사하고 싶으시면 스스로 유튜브해서 보란 듯이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바로 잡아 주시죠? 제가 보러 갈게요. 아님 책이라도 내시던가요. 그럴 능력이 있으시면요. 그것도 안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도 즐기고 있는 이곳에서 분탕질 하지 마시구요.
@@yuyoung7735 비판하면 안될 이유가 있습니까?? 역사해석은 기준에 따라 해석 결과가 천차만별입니다. 일본 입장에서 안중근은 제국을 만든 세력으로 볼 수 있는 조슈번의 대표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테러범이지만 조선의 후예인 대한민국 입장으로 보면 위인이자나요. 일본에 유리하도록 서술된 기존의 해석때문에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의 양식으로 쓰이고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의 당위성을 주는 한국사를 비판하면 왜 안됩니까? 이렇듯이 고려역사 해석이 일제 해방 이후 지금까지 거의 바뀐게 없이 지금까지 똑같은 내용만 반복하고 있는데 그 사이 새롭게 발견해서 주장되는 내용들은 99% 배척하고 있어요. 제가 유튜브 영상을 만들기 전에 이미 퍼져있는 영상들이나 한번 보시고 그런 얘기하시죠. 그래서 이익주씨가 얘기하는 해석들이 식민사학이라고 조롱받는겁니다. 이에 대해 왜 비판하면 안되나요? 이익주씨와 강단사학계가 신성불가침입니까? 세종실록지리지에 버젓히 고려 동북면 경계를 두만강 북쪽 700리에 “선춘령”까지 라고 기록되어있음에도 고려 북방 경계선 비정해놓은 꼴을 보시면 이게 역사 왜곡이지 뭡니까? 왜 이를 반영해서 고려 강역을 수정하지 않는겁니까? 당신은 이게 타당하고 옳은 처사라고 보이십니까??여진이 중앙집권화된 나라도 아닌데 금나라가 멸망한 후 여진족들은 부족단위로 분리되어 서로 끼리도 싸우며 분열된 체로 살아갔습니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반론하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북방 경계를 압록강 이남으로 그리는 썩어빠진 강단사학 족속들을 향해 역사 왜곡 하지 말고 고려사와 조선사에 기록되있는 바에 따라 제대로 더 연구해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수정 보완해나가라고 하는게 뭐가 잘못된겁니까? 당신이 한국사를 진정 사랑한다면, 이를 비판해야 온당한 것 아닙니까? 이런 식이니까, 러시아 학자가 연해주에 발견된 고려 관련 추정 유적 건으로 동북아 역사학자들을 초빙했을 때 ”주변국 역사학자들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서 영역을 넓히려 하는데 대한민국은 버젓히 있는 역사 조차 부정하려 한다.“고 핀잔이나 듣지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도 흥미진진하게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영주청벽상기에 대한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들었네요 감사합니다
윤관은 누구야'라는 의문을 갖고 1부에 이어 2부를 봤는데, 이 영상을 만든 이유가 뒤에 나오네요. 감사합니다!!
윤관의 동북 9성 설치가 고구려 영토 회복을 의의로 들었다는 것은, 서희의 외교단판과 함께 고려의 고구려 계승승의 상징적 의미가 큰거 같네요.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아무래도 고려거란전쟁 후속 사극은 여진정벌 전일꺼 같다
고려여진전쟁
굳이 실패의 역사를?
윤관 척준경 오연총 이자겸 왕ㅈㅈ
동북9성 진출이
거란을 의식해야 했다는 건 모르고 있었네요.
박사님 영상 감사합니다. 전공은 아니지만 역사에 항상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고려사의 권58지 권제12 지리3의 동계 함주도독부 공험진에 예종6년에 공험진에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이미 상실하여 여진에 반환할 때 반환 목록에도 없던 곳에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그냥 오기일까요? 어떤 해석이 가능할런지요?
1분전은 못참지
한국전쟁 때 세계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미 해병대조차 수성에 실패한 지역입니다. 방어선이 너무길어 공격하는 쪽이 굉장히 유리하죠. 더구나 세입도 안나오는데 유지비가 막대하게 들어가니 국가 경제가 휘청거리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거란과의 관계.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내내 저는 거란과의 문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고려가 과연 17만 대군을 유지할 능력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7만의 대군을 유지할 능력이 있었다면 여진의 반발이 거셌다하여도 동북9성을 내줄 이유도 없었을텐데 하는 생각. 여진의 반발, 거란과의 문제 그리고 17만 대군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고려 내부적인 부담. 이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동북9성을 돌려줄 수 밖에 없었나 봅니다. 역시 일시적으로 남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과 그것을 우리 영토로 귀속하고 유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인가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도 초강대국인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지만 유지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 처럼 당대 초강대국도 아니었던 고려가 점령한 영토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함경남도 일부점령한다고 17만대군사용했다면 고려 허접하다.
공험진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입니다. 이곳은 남의 영토가 아니고 부여.고구려.발해의 고토입니다. 국력을 다해 차지한 영토를 지켰으면 좋았을 텐데 거란의 침공을 우려해 돌려주었다고 보입니다.ㅡ
모용선비족이 뭐라고@@gn.l3762
ㅜㅡ😊ㅣ
@@모구씨kor
보통 길주설, 두만강 700리설이 있고
함주설은 일제때 식민사관으로써 왜곡 축소한 이야기고
조선 4대 세종 치세 4군 6진을 개척할때 6진에 공험진의 선춘령 비문을 이야기 하는걸로 보아
두만강 700리설이 타당하다 보는 경향이 있기에
고려가 허접한게 아닌 총력을 다했으나 주르첸의 결사적으로 막은 엄청난 접전의 전쟁 이었던거죠
강으로 국경을 만든 4군 6진을 기획하신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자주 올려주세요^^ 재밌게 보고 있고 공부도 되네요~~~
고려거란전쟁때문에 교수님 유튜브를 보게되었습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고려동북9성의 위치는 어디라고 생각하시는지 고견을 방송으로 부탁드립니다
환단충 냄새나네 ㅋㅋ
@@jiwonmoon9083, 남의좋은 향기는 싫지 ?
식빠를 여기서 똥내풍기네!
@@sweetfan3250 , 지냄새는 모르지 ?
@@jiwonmoon9083 환단충? 벌래 눈에는 벌래만 보이지, 버러지들도 글자를 쓰네,
윤관 9성의 끝에 경계비를 세운 선춘령 공험진은 어디 입니까.ㅡ 함경도입니까 아니면 동북만주 두만강 북쪽 700리일까요. 17만 대군이 동원 되었다면 후자가 맞는것 같은데요.
문헌상으론 두만강북쪽700리로 돼있습니다
@@부드러운카리스마-x8b 강단사학자들은 윤관의 9성이 함경도로 되어있습니다.ㅡ때문에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조선시대에도 4군6진 간신히 차지했는데 인구와 생산력이 조선보다 부족했던 고려시대에 뭔 수로 삼강평원까지 실효지배를 합니까 함흥에서 온성 이런데까지 거리가 서울-대전 거리보다 멀어요
@@미제드론 조선시대 초의 군사력은 상당히 강력했습니다. 세조이후 군사력을 키우지 않아 약해진 것입니다.ㅡ 세종의 4군 6진도 다행으로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이마져도 명나라의 눈치를 보며 차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명나라 때문에 북방으로 영역을 넓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6성 영역의 둘레가 300리라면 윤관의 9성은 함남 전체 해안지역과 함북 일부의 해안지역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네요.
고려는 옛 고구려의 고토에서 일어난 왕조라 확실히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음
태조 왕건의 고향이 고구려땅이었으니 당연한 거라 생각됨 그지역만의 정서가 있는거니 고토수복에 대한 열망이 있었을듯
윤관의 여진정벌 과정은 현대사회에 많은걸 시사합니다
예를들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네요
동북 9성의 존재가 12성일 가능성, 윤관이 동북 6성을 축조하고 영주청벽상기에 고구려의 옛땅을 얻은걸 하늘의 뜻이라 말하는것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너무 쉽게 전쟁을 멈추고 땅을 돌려준게 아쉽네요
분명 고려도 타격이 있고 계속 지키는게 힘에 부치지만 그건 주르첸도 매한가지일텐데
고려에서 회의를 할때 반대한 2명처럼 솔직히 정 3품 이상의 고위직들이 너무 쉽게 포기한것 같아 아쉬워요
또한 키타이의 견제가 있다고 하는데
기억은 안 나지만 어디선가 이야기를 들을때 키타이가 고려와 주르첸의 전쟁을 보고 있다가
둘다 약해지면 어부지리를 노린다는 이야기를,
주르첸도 자기 부족내 부정적 여론에 급박하고,
고려는 키타이가 만약 군사력의 공백을 노리고 공격하면 큰일이기에
조속히 마무리 할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죠
금사의 기록은 아는데
혹시 다른 사료나 기록들은 없나요?
정황을 보건대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대신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서 정치적으로 윤관을 몰아낸 것으로 여겨집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등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고려가 9성을 운영하는 1~2년 동안 거란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 조치도 안취했나요??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高麗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죠.
(1)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옥저인들을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2) 왕조의 지배 영역을 넓히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왕고는 당시 압록강에 있던 맥국도 외면했는데, 같은 맥락입니다.
고구려를 종족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은 겁니다.
도대체 고려의 국경이 어디인건가 ? 전형적인 식민사학자의 모습을 보고 씁쓸하네
진짜 이렇게 아무때나 식민사학이니뭐니 식민딱지붙이려고드는 민족주의자들보면 화가난다. 이익주가 식민사학자라고?ㅋㅋㅋ
거란멸망의 나비효과?
17만 고려군과 싸워던 여진은 섬기기로 하고 9성 지역을 반환받고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네요.
영토 확장한 세종이 진짜 대단했던 거구나..
단재선생은 예종이 한 때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윤관을 뒷받침하였어야 했다며, 문약한 조정대신들에 의한 9성환부는 우리의 강역과 진취적 기상을 잃게 된 중대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거란 역사를 보면 몽골제국은 세계를 정복 했는데 얘들은 왜? 이런 의심이 듭니다. 항상 뒷심부족, 고질적 문전처리 미숙 으로 항상 2% 부족했기에 세계제국이 되지 못한 정복국가 였네요.
거란이 고려의 여진정벌을 반대 했다는 걸 보면 얘들은 얼마나 외교적으로 미숙했는지 보입니다. 결과론적 해석입니다만 거란은 여진에게 멸망하죠. 머리가 돌아가는 작자였으면 고려를 부추겨 여진과 전쟁을 계속하게 하는 이이제이 전략을 펼치는게 장기적으로 보면 거란에게 훨씬 이익이었습니다.
고려 역사를 보면 전쟁은 아쉬운 면모가 있었지만 외교만큼은 기가 막힌 찍기 실력을 보여줘서 (서희의 외교 담판, 귀주대첩 전후 처리, 윤관의 여진정벌 후 전후 처리, 원종의 쿠빌라이 항복..)
나라를 이끌어갔는걸 볼떄, 거란 얘들은 외교 찍기도 드럽게 못했네요.
걍 갈라수 전투에서 ㅊㅓ발리고 주력부대를 다 잃었기 때문. 걍 금나라가 ㅈㄴ 셌다.
의주는 국경 안쪽 아니었던가
평안도 의주가 아님
15:00 아니 그러면 두만강 남쪽이 아니고 두만강 너머 북쪽 영토 아닌가?? 와 고려 진짜 미쳤네.. 미친듯이 고수 했었으면 지금 남북한 지도가 바뀌었을텐데
설혹 그렇게 했었도 뒷역사상 조선시대때 빼앗겼을 가능성 100프로
자기전 야식먹으면서 보는 최고의 영상
그냥 진걸로 암
발해인들 대다수는 여진족이 됐겠죠?
갠적인 생각으론 발해인들중 고구려계쪽은 고려로 상당수가 넘어왔고 말갈계통은 여진족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까요? 왕건 후삼국 통일이 936년. 990년대부터 당시 최강 거란과 전쟁을 시작했는데. 60여년만에 고려가 강군을 육성한대는 발해인들의 내투가 상당부분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고려, 아니 한국사 진정한 최악의 참패라 할 수 있는 갈라수 전투가 안 나온 것 같습니다?...
여진이 살수있는땅이 없어서 ...... 9성을 돌려달라는건 핑게다
전체 여진이 몇명되지도 않는대 ....... 만주지역(동만주.연해주) 대부분이 .....여진인들이 살았는대 (지금의 한반도의 몇배나된다)
..... 이 넓은영토가 모자라서 살곳이 없다 ???
우리나라 공교육의 대표적 왜곡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여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들을 가르치지 않고, 9성의 반환도 마치 여진을 위해 적선했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
저는 공교육이. 문제라고 봅니다. 그걸 구체화. 시킨 사람들 총독부 식민. 사학자라고 봅니다. 그걸 지금 공교육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서희 강동. 6주가.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땅. 구성 등. 인가요 서희가. 동서남북도 모르는 바보인가요. 지금 거란전쟁에 나오는 강동6주가 압록가믈 기준으로 한다면 강남인가요. 강동인가요. 강남 이잖아요. 또. 위화도가 있어요. 지금 위화도. 그 조금한. 섬에서. 얼마나 주둔 햇겟어요. 1천명? 또 지금 위화도는 장마지면 잠겨요. 위화도는 지금. 위화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또 요나라 남쪽이나. 동쪽은 국경 표시로. 불탑을. 세웁니다 요나라가. 압로캉. 두만깅 지역에. 요 불탑 흔적. 있나요?
그렇다면. 윤관이 압뢰강. 두만강 이북에서. 전투를 치뤗다는 겁니다
저. 교수니이. 헛다리 짚고 있어요,
이런거 설명할때 말로만 하지 말고 지도 좀 놓고 설명하세요.
인문학자들은 너무 말로만 때워..... 말로만 하면 그게 맞는지 안맞는지 어떻게 아냐고...
동북 국경과 서북 국경을 이렇게 설명하다니.. 스스로 설명하면서 얼마나 모순을 느낄까?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동북 국경(두만강 북부 공험진 선춘령)에서 남서쪽으로 내려 가면 심양 쪽 서북 국경이 된다고 설명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원산쪽에 쌍성총관부가 있다고 스스로 말했으니 오연총이 동북에서 깨지는데 서북쪽에서 윤관을 움직여 지원한다는 것이 말이 안돼지... 그러니 스스로 말하며 이상하다고...쑥스럽게..
나중에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변경할까? 정말 궁금하네요.
식민사학자 !!!!!
식민. 사학자. 입에서 나오네요
나 장말 님 역사 듣다보면 여켸와서. 다 못. 들어요. 자. 이야기. 해 보자자요
1. 자신이 승리. 햇으면. 협상 사는가요
그리고 윤관이 북동 9성을. 개척 햇다는 겁니다. 그럼 북동 9성. 이이기. 할수 잏나요. 정확히. 아세요. 북쪽. 동으로 9성이란 이야기입니다.
그럼 자 북쪽으로 9성이 어디인지 설명하고 이야기 하란 이야기입니다 북동. 9성이 어딘대요. 모르지요
말씀 해 보세요
환단고기 읽어대는 무식한놈들 이제 죽을나이 안됐음?
북한의 아오지 탄광 이름이 까만돌이란 뜻의 여진족 사투리 ..
청태조 누르하치가 멧돼지 가죽이란 뜻인데 우리말로 「 누렣치 」, 멧돼지 가죽이 누렇죠 .
만약 여진족이 우리와 합쳤으면 제주도 사투리 정도로 여겼을 여진족의 말 일 테지만 ..
북한과의 통일이 되지 못한다면 먼 훗날 북한이나 조선족도 우리와는 다른 , 여진족 같은 존재가 될겁니다 .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럼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은 종교 문제로 갈라선지 500년 넘는데 같은 독일어권 국가라고 하지!! 여진 만주족은 그냥 시초부터 한민족하고 갈래가 달라
터키의 99.9999프로는 아랍인종이나 유럽인종,그러나 몽골인과 조상이 같은 아시안이 그 시조..그래도 터키는 그 돌궐로 국가의 정체성을 삼음.
여진족보단 몽고족이 한민족이 시조를 공유하는 민족.그러나 유전자는 여진족 한민족이 쌍둥이처럼 일치하고 몽고는 한민족과 유전적 거리가 멈.또 여진,만주족은 역사도 한민족 고대국가들을 자신들의 시원으로 여김..돌궐이란 정체성을 지키고 사는 터키와는 다르게 만주족은 숙신,읍루에게선 언어만 물려받고,한민족의 유전자와 역사를 받아들이고 한민족의 방계가 돼버린 것.
청황제가 감수한 만주원류고에 몽고에 대해선 일도 언급없이 한민족 조상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기술하고 있음.당시 세계제국 청이 한민족시원을 자신들의 뿌리라 여긴 것.여진인들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여긴 것이 같은 맥락.
고려는 그들을 멸시했지만...
역시,후에 만주족이 다시 뭉쳐 소국이라도 세운다면 한민족 고대국가들에 자신들의 뿌리를 댈 것이다..한국은 이제 말갈,여진만큼은 그리고 일본에 막부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일본고대사는 한민족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
청의 만주족이나 무로마치막부 이후의 일본은 타국으로 기술하는 것이 맞고
누르하치 = 지배(누르는) 하(는) 사람(치).
한반도에 없는 고려의 지명을 대청광여도에서 책보고가 북경의 상하 좌우에서 찾았읍니다. 북경,산동, 만주의 심양, 한반도를 포함한 거대한 제국이었던 것입니다. 상기 유투버의 내용이 엉터리이면 사료와 지도를 근거로 반박하는 영상을 만들어 주세요.
고려허접하다.조상은 중국을 통일했잖아.이세민의 자손이 17만대군가지고 함경남도 일부도 못지키나.참 허접하다.
지나족.섬 에가라
@@sweetfan3250 왕건이 이세민자손이야.개성왕씨들이 제사도 지낸다.
이익주씨, 아직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사나 제대로 더 연구하시고 대부분의 지명들 위치를 정할 수 없어 비정으로 님아있는 지명들 연구나 하세요.
아니. 계속 보니 안타까운 분이시네요. 님이 그렇게 역사를 잘 알고 똑똑하십니까? 당신에게는 유튜브 하시는 분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비난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런 권리를 행사하고 싶으시면 스스로 유튜브해서 보란 듯이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바로 잡아 주시죠? 제가 보러 갈게요. 아님 책이라도 내시던가요. 그럴 능력이 있으시면요. 그것도 안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도 즐기고 있는 이곳에서 분탕질 하지 마시구요.
네 다음 방구석 ㅈ문가
@@yuyoung7735 비판하면 안될 이유가 있습니까?? 역사해석은 기준에 따라 해석 결과가 천차만별입니다. 일본 입장에서 안중근은 제국을 만든 세력으로 볼 수 있는 조슈번의 대표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테러범이지만 조선의 후예인 대한민국 입장으로 보면 위인이자나요. 일본에 유리하도록 서술된 기존의 해석때문에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의 양식으로 쓰이고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의 당위성을 주는 한국사를 비판하면 왜 안됩니까? 이렇듯이 고려역사 해석이 일제 해방 이후 지금까지 거의 바뀐게 없이 지금까지 똑같은 내용만 반복하고 있는데 그 사이 새롭게 발견해서 주장되는 내용들은 99% 배척하고 있어요. 제가 유튜브 영상을 만들기 전에 이미 퍼져있는 영상들이나 한번 보시고 그런 얘기하시죠. 그래서 이익주씨가 얘기하는 해석들이 식민사학이라고 조롱받는겁니다. 이에 대해 왜 비판하면 안되나요? 이익주씨와 강단사학계가 신성불가침입니까? 세종실록지리지에 버젓히 고려 동북면 경계를 두만강 북쪽 700리에 “선춘령”까지 라고 기록되어있음에도 고려 북방 경계선 비정해놓은 꼴을 보시면 이게 역사 왜곡이지 뭡니까? 왜 이를 반영해서 고려 강역을 수정하지 않는겁니까? 당신은 이게 타당하고 옳은 처사라고 보이십니까??여진이 중앙집권화된 나라도 아닌데 금나라가 멸망한 후 여진족들은 부족단위로 분리되어 서로 끼리도 싸우며 분열된 체로 살아갔습니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반론하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북방 경계를 압록강 이남으로 그리는 썩어빠진 강단사학 족속들을 향해 역사 왜곡 하지 말고 고려사와 조선사에 기록되있는 바에 따라 제대로 더 연구해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수정 보완해나가라고 하는게 뭐가 잘못된겁니까? 당신이 한국사를 진정 사랑한다면, 이를 비판해야 온당한 것 아닙니까? 이런 식이니까, 러시아 학자가 연해주에 발견된 고려 관련 추정 유적 건으로 동북아 역사학자들을 초빙했을 때 ”주변국 역사학자들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서 영역을 넓히려 하는데 대한민국은 버젓히 있는 역사 조차 부정하려 한다.“고 핀잔이나 듣지요.
환단충 어서오고
@@user-leeb9 수준 떨어지게 왜 이래? 내용으로 반박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