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회담의 시작 ,1951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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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3 вер 2024
  • 회담은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쌍방의 연락 장교 회의를 통하여 절차 문제를 합의한 후 7월 10일부터 개성시 고려동 내봉장에서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쌍방 대표의 상견례에 이어 7월 11일부터 본격적인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유엔군 측은 협상 의제의 선택, 군사 분계선의 설정, 휴전 감시 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전쟁 포로에 관한 문제 등 휴전에 선행되어야 할 순 군사적인 문제만을 다루자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공산군 측은 쌍방이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문제와 한반도로부터 외국 군대의 철수 문제를 우선적으로 토의해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만을 앞세움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협상 개시 16일 만인 7월 26일에야 비로소 쌍방은 다음과 같은 협상 의제와 토의 순서에 합의하였다.
    양측 간에 합의된 협상 의제는 제1의제로 협상 의제의 채택, 제2의제로 군사 분계선의 설정, 제3의제로 휴전 감시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제4의제로 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 제5의제로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이었다.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먼저 제2의제인 군사 분계선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1951년 7월 17일에 시작된 군사 분계선 설정에 관한 협상은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 측의 주장과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공산군 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회담이 교착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문제는 현재 접촉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 측의 주장이 관철됨으로써 1951년 11월 27일 쌍방은 군사 분계선의 설정 협정에 조인하였다. 그 요지는 첫째, 휴전 협정이 조인 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둘째,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씩 4㎞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한다. 셋째, 상기의 군사 분계선 및 비무장지대는 30일 이내에 휴전 협정이 조인될 경우에 한하여 유효하다. 넷째, 만일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군사 분계선은 휴전 협정이 조인 될 당시의 접촉선으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한편 휴전 회담이 개시될 때,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협상이 최종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 전제 하에 회담을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휴전 회담 기간 중의 군사작전은 휴전 회담의 추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은 협상이 결렬될 경우나, 유엔군이 요구한 협상 조건을 공산군 측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전투를 재개했다. 유엔군은 협상 중에도 제한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공산군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면서 적의 공격 기도를 분쇄했다. 공산군은 휴전 협상 과정에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전력 증강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들이 빼앗긴 진지를 탈환하여 군사력을 과시하거나, 휴전 회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유엔군 진지 중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거나 취약한 진지에 대해 공격을 실시했다. 그 결과 휴전 회담장에서는 설전(舌戰)이, 전선에서는 혈전(血戰)이 전개되었다.

КОМЕНТАРІ • 26

  • @TV-cw4we
    @TV-cw4we 11 днів тому +11

    헬리 호데스 오타, 제7사단 부사단장에서 제8군 부사령관 헨리 어빙 호즈 (Henry Irving Hodes) 소장, 제24사단장으로 참전.

  • @박경란-b7e
    @박경란-b7e 11 днів тому +6

    감사합니다

  • @길잃은늑대
    @길잃은늑대 11 днів тому +7

    귀한 영상 감사합니다.

  • @대한국인-l9q
    @대한국인-l9q 9 днів тому +1

    귀한 영상 감사합니다
    고생하십니다

  • @TV-cw4we
    @TV-cw4we 11 днів тому +6

    휴전 회담 중공군 대표는 세팡(解方) 소장, 덩화(邓华) 소장. 팽더화이 중장은 중공군 사령관

  • @parmenideskim9739
    @parmenideskim9739 10 днів тому +3

    휴전 회담의 진실은 스탈린이 키를 쥐고 있었다는 것임. 스탈린은 미군의 관심을 유럽이 아니라 계속 우리나라에 묶어 두려 해서 전쟁을 질질 끌고자 했음. 반면 대만 수복 문제와 흉작으로 상황이 좋지 않은 중국은 하루라도 빨리 휴전하고 발을 빼길 원했고 북한도 미국도 모두 휴전하길 원했기에 스탈린의 고집이 아니었으면 1951년 봄에 휴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큼. 결국 휴전은 스탈린이 죽은 다음에 성립되었고 지금 러우 전쟁도 그 꼬라지임.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끝내고 싶으나 바이든이 허락을 안 해 줌.

  • @찌리-s4v
    @찌리-s4v 10 днів тому +1

    전에 있던 영상 아님?

  • @WHATEVERKOREA-x6o
    @WHATEVERKOREA-x6o 11 днів тому +10

    한미동맹 강화하여 자유통일 이룩하자!

  • @쬬
    @쬬 11 днів тому +1

    ㄷㄷ

  • @sanmicheal6754
    @sanmicheal6754 9 днів тому +5

    백선엽 당시 30살짜리 어린애가 한국 대표라니.. 참 한심한 시절이었다

    • @user-bg5cj9pp9c
      @user-bg5cj9pp9c 3 дні тому +2

      군에서 최고위급인데 그럼 뭐 나이많은 일반농민을 내보낼까?

    • @sanmicheal6754
      @sanmicheal6754 3 дні тому

      @@user-bg5cj9pp9c 내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아냥 거리건가? 이런 능지로 세상 어떻게 살아가노?

    • @sanmicheal6754
      @sanmicheal6754 3 дні тому

      @@user-bg5cj9pp9c 선엽이가 대일본제국 중위였는데 5년만에 최고위급 장성이 되었으니 나라가 얼마나 개판인지 개탄 하며 쓴글인데 개소릴하고 자빠졌노?빠가야로

    • @user-bg5cj9pp9c
      @user-bg5cj9pp9c 3 дні тому

      @@sanmicheal6754 ㅋㅋㅋㅋㅋ 역시 딱 그짝 수준 드러낼줄 알았다 ㅋㅋㅋㅋ 그럼 군창설되고 10년도 안된 시점인데 영관급 위관급들이 전쟁지휘하고 미군이나 유엔군이랑 협조하냐? 전쟁을 그럼 뭐 야야 김일성아 우리 장교들 스타 달려면 2~30년은 기다려야되니까 그때 들어와라 그러냐??

    • @sanmicheal6754
      @sanmicheal6754 3 дні тому

      @@user-bg5cj9pp9c 그러니까 한심한 시절이라 한거 아니냐? 대일본제국에선 중위 나부랭이가 장성급으로 있으니 군대가 개판이지 ㅋㅋ 넌 그럼 이게 좋아보이냐?

  • @davidkoh3719
    @davidkoh3719 11 днів тому +3

    역사적으로 항상 미국은 협상 당사자인 우방국 제켜 놓고 불평등한 결과를 가져온 낙제점입니다.😂

    • @Ooodkdk
      @Ooodkdk 11 днів тому +6

      중국어 번역한티 납니다. 차라리 현지 한국인한테 돈주고 시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