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12절 설교/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 절망 속에 주신 복음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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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30 вер 2024
  •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NIV]
    12. So in everything,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for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2-14)
    우리 주 예수님은 여기에서 참 경건의 기본 요소인 사람에 대한 의(義)와 보편적인 의(義)의 기본 요소인 하나님께 대한 경건에 관하여 강조하고 계시다.
    Ⅰ. 우리는 의를 우리의 규범으로 삼아야 하며, 그것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12절). "그러므로" 의로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이것을 너희의 생활 원리로 규정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앞서 말한 특별한 교훈을 따르기 위하여, 또한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도록 일반적으로 이 규칙을 표준으로 삼아라(너는 비난받게 되지 않을 것이니. 비난하지 말라).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이 앞에 말씀하신 약 속의 축복을 얻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공의의 법칙이 기도의 법칙에 적절히 추가되었는데, 이는 우리의 대화가 정직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사 1:15-17, 58:6, 9; 슥 7:9, 13). 만일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서 "정직하고 훌륭하고 평판이 좋은" 아름다운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받으려고 하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헌신적이고 정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헌신은 외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1. 규정된 공의의 규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가 단지 알고 믿어야 할 것에 대해서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하여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우리와 동일한 신앙과 입장을 가진 동료나 제자들에게 분만 아니라 우리와 관계된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행해야 할 바를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다. 공평의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와 같이 해 주는 것이다. 이교도의 황제인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는 이 황금률의 위대한 신봉자였으며, 그의 서재의 벽에 이 구절을 적어 놓고 가끔 재판을 할 때에 인용했으며, 이 구절 때문에 그리스도를 존경하였으며 그리스도인에게도 호의를 가졌다. Quod tibi, hoc alteri-"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 구절은 부정적으로 취하든지(Quod tibi fieri non vis, ne alteri feceris), 긍정적으로 취하든지 결국 그 의미는 동일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악한 일을 행하였거나 또는 그들이 악을 행하려고 마음먹더라도 그 일을 그들에게 행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행해졌다면 우리의 생각대로 해서는 안 되며 꾸준히 견딤으로써 우리가 소원하던 것이 이루어지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품은 것과 꼭 같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과 같이, 동일한 선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이 규율의 의미는 3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우리는 스스로 적합하거나 합리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이웃에게 행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의 판단에 호소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경우가 될 때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내용과 관계되어 있다.
    (2)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우리 자신과 같은 수준에 놓고, 그들이 우리에게 빚진 것만큼 우리도 그들에게 빚진 것으로 생각하라.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공의를 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도 또한 우리와 같이 공의로 말미암은 혜택을 얻을 수 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 스스로를 상대방의 특수한 경우와 처지에 똑같이 두고, 대하여야만 한다. 만일 내가 이러한 사람과 계약을 맺는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겪는 질병과 고통을 당한다면 나는 어떻게 취급되기를 바랄 것인가? 그들의 경우가 언제 속히 실지로 우리의 경우가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추측인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행하지 못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남에게 행했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심판하지나 않으실까 하는 것이다.
    2. 이 규율을 강화하기 위하여 제시된 논거.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조목으로 된 큰 계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구절 외에 또 한군데가 있다. 즉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강령이니라"(마 22:40)이다. 이 구절은 단순히 "율법과 선지자"라는 두 단어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것은 곧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이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의무(그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에 관해 거기에 언급된 모든 것은 이 규율에 함축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 규율을 황금률에 적용시키고 있다. 구약과 신약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우리에게 규정해 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이 규율에 의해 추천되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 규율에 비추어 판단을 받는다. Aut hoc nonevangelium, aut hi non evangelici- 즉 이것이 복음이 아니거나,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황금률이라고도 하는 7장 12절의 위대한 진술에 접근할 때 첫째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산상설교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본 진술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여기 이 12절의 허두에서 '그러므로'란 말씀에 마주치게 됩니다. 어째서 '그러므로'가 나옵니까? 이 말씀은 별개의 독립된 진술이 아니라 앞의 진술들과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말씀해 줍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환언하면 우리 주님은 아직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주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주제를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7-11절을 하나의 괄호 부분으로 본다면 이 비판 문제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의 공급이 필요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 부분(7-11절)이 거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는 축복받는 법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법과, 기독교인의 삶을 충분히 살 수 있는 법을 보여주시고 나서 다시 원주제로 돌아오셔서, 비판의 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관계와 관련해서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규칙으로 삼아라'란 뜻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에 관한 이 일반적 주제를 살피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7장에 뚜렷한 내적 통일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기도에 관한 교훈과 관련해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독립된 별개의 진술이 아니라 비판에 관한 주제와 관련해서 우리를 올바른 위치에 데려오기 위한 일대 요지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즉 '본절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주제의 계속이라고 한다면 주님은 어째서 본문을 6절 뒤에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주님은 어째서 기도의 주제를 소개하셨는가? 어째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나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하시지 않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 대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진술은 비판에 대한 전체 문제를 요약하고 있으며, 기도에 관한 저 간략한 진술에 비추어 볼 때 훨씬 더 큰 힘과 설득력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권면에 대한 거대한 논법이 우리에게 절실히 느껴지는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해주신 것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하나님의 처리하심을 주께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 후 뿐인 것입니다. 이 권면을 상세히 검토하게 될 때 이 점을 더 고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문제와 그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관련된 주님의 마지막 말씀에 접하게 됩니다. '황금률'이란 말은 참으로 잘 된 표현입니다. 얼마나 비상하고 괄목할 만한 진술입니까. 이것이 우리 주님이 다른 대목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란 말씀으로 요약하신 바 여러 계명들의 대략인 것은 물론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 그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하는 문제로 곤란한 처지에 있다면 너희가 이렇게 행해야 한다고 주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 관한 것에서 시작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무엇과 같은가?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나를 도와주고 격려를 해주는 것들은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런 다음 스스로 묻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나를 낭패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속에서 가장 나쁜 것을 초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속에 가증하고 낙심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이것들 곧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행위에서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에서 여러분의 전체 생활과 활동과 관련해서 자세히 풀어 보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주는 곧바로 세목을 고찰하는 데로 나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문제를 자세히 다루어야 할 것은 필수적입니다. 이 같은 진술을 읽거나. 그 해석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 해석을 책에서 읽거나, 이것이 전달하는 그림을 보고 '그러니 신기하고 놀랍다'라고 말은 하면서도 이것을...
    2024년 6월 4일 화요 새벽
    #goldenrules #황금률 #jesus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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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cyreform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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