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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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30 вер 2024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29.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NIV]
    28. When Jesus had finished saying these things, the crowds were amazed at his teaching,
    29. because he taught as one who had authority, and not as their teachers of the law.
    ...사람들의 문제점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산상설교가 좋다고 말하며 이 설교는 실제적이며 실생활에 적용되고 사회 질서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속죄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교훈과 서신들의 고차원적인 교리 전체와 대립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자주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문제되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산상설교를 바르게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만일 읽었다면 산상설교가 끊임없이 이 분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발견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즉시 결정적인 교리를 구성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환언하면, 산상설교는 이미 거듭 살펴본 대로 일종의 기초적 진술인 것이며 다른 것은 모두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는 교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산상설교가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 이외 아무것도 아니라는 관념은 이 설교의 가르침과는 전연 관계가 없으며 특히 여기 이 마지막 두 절에서 강조된 점과는 완전히 상관이 없는 관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 자신이 자기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산상설교에서 주님이 그렇게 하시기 위해 취한 방법 이상으로 괄목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를 살펴보고 나서, 우리는 주께서 주신 모든 교훈이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산상설교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설교의 고찰도 항상 우리를 이런 상태로 이끌어야 합니다. 여기 이 두절에는 이렇게 하는데 매우 훌륭한 방법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를 눈앞에 보면서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일 크고 높은 특권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경악 그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마 7:28-29).
    이 장면을 재현시켜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를 바라보는 것 이상 우리에게 큰 즐거움 -저는 이 용어를 심사숙고한 후에 사용하였습니다만 -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에 대해서 바른 입장에 있지 않다면 다른 모든 가르침은 무가치합니다. 모든 교훈과 신학과 또 성경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를 아는 지식으로, 주와의 친교에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되신 주님을 응시합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마음에 그려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큰 무리가 모여 있습니다. 주께서 처음에 가르치시기 위해 앉으셨을 때는 주와 제자들뿐이었으나 뒤에 가서 큰 무리가 모여들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 이 많은 사람들 앞에 앉아 있던 이 젊은 분은 갈릴리 나사렛이라 하는 작은 동네 출신의 목수로서 한 사람의 직공이요,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도 율법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가말리엘이라든가 그 밖의 위대한 권위자나 교사의 발 앞에 앉아서 교육을 받은 일도 없습니다. 일견 그는 매우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일찍이 없었던 사명을 띠고 이 시골에 나타나 이렇게 여기 앉아서,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찰한 이것들을 가르치고 설명하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랄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모두가 예기치 못한 일이었고 어느 면에서 보든 너무 이례적이었고 그들이 알고 있던 일로부터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이나 세부에 대해 너무 익숙해 있는 우리가 이런 일이 실제로 약 2천여 년 전에 일어났고 또 주님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미쳤는가를 깨닫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이 갈릴리 출신의 목수가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설명하고 그리고 이처럼 일찍이 없었던 모양으로 말씀하실 때 그들이 대경실색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앙천하고 놀라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연실색했습니다.
    여기서 찾아내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놀라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째 원인은 주님이 말씀하실 때의 권위입니다. 이 분은 법학자와 다르게 권위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치신 방법은 율법학자와 같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시다시피 율법학자의 교훈의 특색은 언제나 권위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뿐이었고 결코 그들의 독자적인 생각은 이 밖에도 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 그 자체의 전문가라기보다 차라리 율법이 최초로 모세에게 주어진 이래로 제창되어 온 여려가지 율법의 해설과 해석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해석에 관해서 언제나 대가의 의견을 번갈아 인용했습니다. 그 실례로 사건 심리 중 법정에서 자주 행하여지는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이때는 여러 가지 권위자로부터 인용의 말이 있게 됩니다. 한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고 또 다른 권위자는 저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각종 교본이 제시되고 그 해석이 제시됩니다. 이것이 율법학자들의 방법이요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의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특색은 끝없는 인용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에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습니다. 각종 저작으로부터 일련의 인용 이외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설교를 읽고 듣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유의 일이 학식이나 교양이 깊다는 인상을 줄지는 모릅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자기 학식을 크게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을 일소에 붙이고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 7:15, 마 13:5 이하)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사실은 주님의 방법에는 두드러진 특색이나 인용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환언하면, 주의 놀라운 점은 주의 독창성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는 항상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누구는 이렇게 말했다'가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에는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주의 방법은 모두가 달랐습니다. 교훈에 대한 주님의 태도 전체도 달랐습니다. 그것은 사상과 표현 방법의 독창성을 특색으로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물론이요 그 방법도 독창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일은 물론 주님이 말씀하실 때의 그 확신과 확실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맨 처음 저 위대한 팔복을 말씀하셨을 때 이미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란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어떤 의심도 어떤 의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정이나 가능성만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이 놀라운 확신과 권위는 이처럼 맨 처음부터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의 전반적 권위 이상으로 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 내용, 특히 자기에게 대해 말씀하신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그들을 경악하게 했고 놀라게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 특히 무엇보다도 자신의 교훈에, 그리고 자신의 교훈에 대한 자기의 태도에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5장에서 주님이 '옛 사람들에게 말한바 ...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를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는가를 보십시오. 주는 바리새인들이나 그들의 권위자들의 교훈을 정정하시는 일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옛 사람들'이란 말씀은 어떤 바리새인들 그리고 모세율법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나타내는 것임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쳐 놓고 정정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직공, 곧 학교도 가보지 못한 목수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을 하다니! 주는 이처럼 자신과 자기의 교훈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주는 이 성구에서 자신이 그리고 자신만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영적 해석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주의 논증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사람들은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영적 의도 및 내용을 완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오해하고 율법을 다만 외부에 나타나는 차원으로 격하시키고 있었습니다. 육체적 간음을 범하지 않는 한 그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바람과 영에 관심을 가지심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율법의 오직 한 분 참된 해석자로서 그들 앞에 계신 것입니다. 자신의 해석만이 율법의 영적 의도를 분명히 나타낸다고 주는 말씀 하셨습니다. 주는 자기를 율법 수여자로 보시며, 그렇게 말씀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산상설교의 끝에 주님이 이것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표현하시고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는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자기의 이 말씀에 중요성을 덧붙이신 점을 주목하십시오. 자기의 일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는 두 집의 무서운 장면을 사용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끝내고, 모든 것을 '나의 이 말'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셨습니다. 주는 요컨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이 말'을 실천에 옮기기를 바란다. 너희는 내가 누구이며 따라서 내 말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주는 자기의 교훈에 관한 말씀에서 자기에 대해 놀랄만한 선언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특이한 권위를 주장하고 계십니다.
    2024년 6월 14일 금요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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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cyreform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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