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의 실체 『중용, 과연 대단한 철학인가? 』 매화선생

Поділитися
Вставка
  • Опубліковано 29 вер 2024
  • 대한민국의 문화 키워드를 이야기합니다.
    그 일곱 번째 키워드, 중용(中庸)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댓글과 구독 또한 부탁드려요 :)
    매화선생: 조명화 교수
    저서: 논어역평 (현암사)
    #논어 #유교 #중용 #주희 #공자 #철학 #인문학 #동양
    #대한민국 #문화정체성 #문화비판

КОМЕНТАРІ • 34

  • @메이커그랜드루트
    @메이커그랜드루트 27 днів тому +1

    동양학을 전공하였다는 날라리 도올이 이분 한테 좀 배워야 하겠다는 느낌. 도올 같은 얼치기 말고 이런 제대로 된 학자를 티비에서 황금시간대 편성하여 전국민 시청하게 하라

  • @까리끼낏
    @까리끼낏 Місяць тому

    공자가 말한 중용이 쉽지않다는것은 일반 백성들이 윗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않기란 보통 어려운게 아니다라는 뜻인거같은데
    즉 스스로 생각할줄 모르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힘든 백성 이라고 표현한거라고 생각합니다

  • @흰눈이소복소복
    @흰눈이소복소복 2 місяці тому +3

    중용에대한 이해가 넘 평범하네..도올선생은 넘 오바하고..

  • @정지웅-c9u
    @정지웅-c9u 17 днів тому +1

    중도 ~ 영적 평화 상태, 태초의 상태. ~~~ 진공묘유

  • @jirongli7213
    @jirongli7213 Місяць тому

    싱가폴이라는 나라가 중용의 처신철학을 잘 실천하는것 같네요. 그게 요즘 싱가폴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한 몫 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 @ChoMyungHwa
      @ChoMyungHwa Місяць тому

      중용의 처신이나 중용의 철학을 싱가포르라는 나라와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는 저의 머리에서 당장 떠오르지 않습니다.
      싱가포르는 지금 국가경쟁력이 강합니다. 앞으로도 일정 기간은 그럴 것입니다. 그 나라의 플랫폼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효율을 발휘할 수 있게 셋팅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나라가 바람직한 공동체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저는 회의적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국가의 플랫폼은 시작 단계에서는 한두 사람의 설계로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이 세대를 뛰어넘어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외부 환경도 바뀌어 갑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나면 결국 그 나라 국민 전체의 일체감이 그 나라의 포텐셜을 결정하게 됩니다. 지금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설계가 아직 유효하여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도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혁신이 이루어지면서 그 혁신의 플랫폼을 전체 국민이 일체화해야만 합니다. 한 가지 더 필요합니다. 국민들의 사유가 자유로워야 하고 창의적이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없이는 강대국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강대국은 군사력과 경제력만을 따지지 않습니다. 다른 국민들이 부러워하는 문화를 갖는 나라입니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라는 한계를 갖고서 태어났고, 또 현대사회는 양극화가 심하기 때문에 첨단의 경쟁력을 유지하기만 하면 국민 전체의 일체화나 창의력에 기대지 않고도 어느 정도는 국가경쟁력을 유지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외부에서 제가 보기에 그 나라는 부러운 나라는 아닙니다.

  • @WilltoSurvive51
    @WilltoSurvive51 2 місяці тому +3

    도올 김용옥의 중용에 대한 침소봉대, 견강부회를 보면 기가 막힙니다.

    • @ChoMyungHwa
      @ChoMyungHwa 2 місяці тому +3

      저는 도올 선생의 를 읽었는데, 그 분은 공자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데 진력하는 분이더군요. 그 분이 중용을 강의하시면서 혹시 그 낱말이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설명하셨다면 당연히 대단한 것으로 이해하셨을 겁니다. 學界의 이론이란 것은 엄밀성과 객관성이 필수일 것으로 짐작되는 자연과학에서조차 결국 권력관계에 의해 권위를 확보하게 됩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요. 특히 중국의 고전은 근본과 출발점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고 주석가들의 '해석'만 읽게 되면 종당에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글줄 읽은 사람치고 자신이 대가라고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는 게 중국학의 실상입니다. 저의 해설도 잘 살펴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되도록이면 공자의 육성일 확률이 비교적 높은 원전을 직접 읽고서 판단하십사 권하겠습니다.

  • @safin84
    @safin84 3 місяці тому +4

    선생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후대에서 중용이라는 것을 곡해하였으나(의도가 있는지, 한문의 특성으로 인한 해석의 오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쨋든 후대까지 전해지면서 끊임없이 재 해석되어 온 유학이라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냥 사장되는 철학들과 사조들이 한가득인데, 지금까지 동북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죠. 제가 느끼기에 선생님이 뜻하시는 바는 그저 금과옥조처럼 선인들의 말을 받들지 말고 재해석하고 비판하면서 받아들이자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경제학을 하는 사람인데 경제학도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를 이롭게 한다는 말을 후대에서 거의 신격화하였습니다(경제학의 이론 전개 방식에서 수학을 완전히 차용하면서 발생한 결과입니다만). 사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최고로 쳤는데, 두 책을 조합해보면 개인이 이기심을 부리더라도 사회가 허용하는 바운더리 안에서 부려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어느 순간에는 원작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식으로 이론이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결국 제대로 비판하려면 원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켠으로는 참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네요.

    • @ChoMyungHwa
      @ChoMyungHwa 3 місяці тому +2

      곡해라기보다는 편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지요. 제가 자주 비유하는 "빨가면 사과, 사과는 달다, 달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다~" 방식의 해석이지요. 그리고 그런 해석이 주희라는 권위자가 내린 것이라면,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게 됩니다.
      유학이 그런 식으로 수천 년 이어질 수 있었던 원인은 그것이 체제교학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제군주 체제를 지키는 데는 가장 적합한 교학으로 끊임없이 이용되었습니다. 심지어 몽골과 만주족이 지배할 때도 그랬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경우뿐 아니라 대개의 고전 해석에는 그런 함정들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함정은 고전 자체를 세밀히 분석하면 드러나기도 하지만, 고전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공부할 때 더욱 잘 드러날 것입니다.

  • @yunf1
    @yunf1 2 місяці тому +1

    아랫사람 잡아족치는 이념이 극도로 발달된 유교.
    무슨 소리를 해도 좋게 들리질 않는다.

  • @seok-holee6955
    @seok-holee6955 3 місяці тому +2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모두가 특별하고싶어하는 이시대에 중용을 지키는사람이 정말 특별한 사람인것 같아요. 계속 좋은말씀 많이 올려주세요.

  • @thetreeonthefield
    @thetreeonthefield Місяць тому

    잘 들었습니다. 다만, 중용이 평범한 뜻이었으면... 주희가 불교랑 도교에 대응해서 형이상학을 고안하기 위해 중용을 재발견하지도 않았겠지요.

    • @thetreeonthefield
      @thetreeonthefield Місяць тому

      저는 儒者는 아닙니다.

    • @ChoMyungHwa
      @ChoMyungHwa Місяць тому

      1천여 년이나 동아시아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중용이라는 용어가 그처럼 평범하지만은 않지 않겠느냐는 선생님의 말씀은 매우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자로 표현된 것들을 필요 이상으로 고매하게 여기는 관행이 있습니다. 한자는 입말을 적는 기호가 아니라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주희는 불교랑 도교에 대응하는 형이상학을 고안했다."라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선배들의 교조를 활용하여 자기 방식의 관념론을 제창했을 뿐이지 주희의 저술에는 불교에 대응하려는 자세도 立論도 없습니다. 도교야말로 불교에 대응하기 위해 일어난 것인데, 워낙 급조하다 보니 교주를 老子로 삼고 나머지는 이것저것(주로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것들을) 가져다 형식만 채워 놓은 것이라 유자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는 공자가 중용이라는 말을 할 때는 무게를 두지도 않았을 뿐더러, 실리적인 스탠스를 취하라는 차원의 발언이라고 볼 뿐입니다.

    • @thetreeonthefield
      @thetreeonthefield Місяць тому

      @@ChoMyungHwa 뭐 중용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니깐요. 존중합니다. 다만... 주희가 성리학을 집대성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도가와 불교를 누르고 다시 유교를 세우겠다는 의도였습니다.

    • @thetreeonthefield
      @thetreeonthefield Місяць тому

      @@ChoMyungHwa 주희는 신랄하게 불교와 도교 같은 '그들 입장'에서의 '이단'을 비판합니다.

    • @ChoMyungHwa
      @ChoMyungHwa Місяць тому

      @@thetreeonthefield 네, 일반적으로 유학 개설서에서는, 특히 중국철학사 같은 책에서는 그렇게 서술합니다. 예컨대 풍우란 같은 이는 신유학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저의 발언이 다소 도발적으로 들리시겠지만, 저는 주희를 그렇게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주희의 주장은 자신의 사유를 통한 철학체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언어(사유보다는)에서 몇 가지를 발췌해서 '강조'만을 했을 따름입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이론은 없습니다. 러프하게 말하자면 그는, "理라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理라는 것이 있다", 이런 정치적 발언만 크게 했을 뿐입니다. 자신이 강조하는 理가 무엇이라는 설명을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불교를 누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불교보다 더 세력을 떨칠 수 있는 '言說'을 베풀고자 했을 뿐입니다.
      저의 이런 견해는 주희라는 인물 전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아닙니다. 주희는 마호메트 이후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교주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 태도 또한 가볍게 볼만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공자처럼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기를 기대했고, 그 기대를 위해 진지한 노력을 평생 했던 사람입니다.

  • @jaekunyoo8509
    @jaekunyoo8509 2 місяці тому +1

    안녕하세요. 감사히 잘 봤어요.
    2024년 7월 3일 수 13시 태평양 시간

  • @gumyour4545
    @gumyour4545 Місяць тому

    감사한.맘으로.잘듣고.있습니다.
    오랫만에.올려주셔서.감사할따름입니다.오랫동안.기다리고.있었습니다.
    건승을.기원드립니다

  • @kh7757
    @kh7757 Місяць тому

    변화에 대처하기 좋은 기회주의적인 중용이 아니라 경도되지 않고 일일신 하기 위한 중용이다.

  • @jirongli7213
    @jirongli7213 Місяць тому

    오랜만에 올려주신 강의 참으로 감사합니다!

  • @두루-x3m
    @두루-x3m Місяць тому

    중용에 대한 개념을 잘못말하십니다
    중은 말씀하시는게 맞지만
    용은 틀린말입니다
    평범하게 중간에 있으라는 처음 듣는 말입니다
    용은 상황에 딱 맞게 쓰는것으로 시중의 의미지
    어정쩡하게 중간에 회색분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검정이 그상황에 딱 맞을 때는 검정을 쓰는것이 중이지 이도저도 아닌 중간 회색분자가 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검정과 백색을 선택해야 하는것은 나자신이니 그 선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먼저
    수신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중용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보다 먼저 수신이 먼저 인것입니다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중용은 비슷한거 같지만
    개념이 전혀 다른겁니다

    • @ChoMyungHwa
      @ChoMyungHwa Місяць тому

      선생님께서는 저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으신 듯합니다. 저는 中은 중간, 庸은 '특별하지 않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개아무개-c9k
    @개아무개-c9k Місяць тому

    중용을 읽으면서 뭔가 불교와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사실은 불교의 사유체계에 대항을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어서 그랬던 것이군여...ㅋ
    근데 조선의 유학자들도 주자학을 추종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으니 뭐라고 할 것은 못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상이란 교조의 말만으로 성립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치 홍익인간이 그 시대에는 과일 한쪽도 나눠 먹는 것을 의미했을지라도 지금은 범 세계적인 박애주의 이념으로 활용을 할 수 있는 것 처럼요...
    그래도 어쨋든 공자의 원래 의도를 아는 것도 무지 중요하다라고 생각을 하며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 @ChoMyungHwa
      @ChoMyungHwa Місяць тому +1

      격려 고맙습니다. 함께 공부하시자고 청하겠습니다. 저는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 @quite123useless
    @quite123useless Місяць тому

    단번에 팬이 되었습니다.

  • @으악-s9r
    @으악-s9r 3 місяці тому

    존속의 지혜 중용을 영상소재로 돌아온 이유을 영상 제작을 이제 존속하기위해 영상 업로드 쉬지 않는걸로 이해하겠습니다. (?)

  • @리처드-l4z
    @리처드-l4z 3 місяці тому

    1착

  • @framedriven2123
    @framedriven2123 2 місяці тому

    중용과 중도이 설명을 듣고 싶네요

    • @dotong119
      @dotong119 2 місяці тому

      중용 도덕실천에 있어 최고 경지. 중도는 불교적 인식에서 최고의 경지.
      완전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