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다하루: 프로 커리어 초반에는 1할 타율의 비참한 성적을 기록했는데, 은사 아라카와 히로시 코치가 보다못해 "너는 공이 오는 타이밍을 잡는 게 너무 서투르니 아예 오른쪽 다리를 들고 기다려라. 왼발의 다리힘은 네가 알아서 길러라"는 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플라밍고 타법을 연마. 연습이 끝난 후, 방에서도 스윙을 했는데 발가락이 지면을 쥐는 감각을 익히기 위해 맨발로 연습을 해서 발바닥 가죽이 벗겨지고 다다미에 피가 스며들었을 정도. 피에 물든 다다미를 본 아라카와 코치가 놀라서 "연습을 멈출 줄 아는 것도 프로다"고 말릴 정도로 연습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던 인물. 착화신장 177cm에 어깨도 그리 넓지 않아 슬러거로서 큰 체형이 아니었으나 다리만은 육상 선수급이었다고 할 정도로 하체가 강했고, 은퇴를 결심한 1980년(40세)에도 30홈런을 칠 정도로 하체의 강인함은 유명함. 요미우리 지도자 시절에는 "왜 너희들은 현역 때의 나처럼 연습을 못하는가?"고 선수들을 갈궈대는 걸로 악명이 높았지만 다이에 호크스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게 됨. 이치로: 당시 오릭스의 도이 쇼죠 감독이 이치로의 타격폼을 극혐해서 2군에 처박아놨고 후임 오우기 아키라 감독이 이치로를 발굴한 것처럼 보도가 되어 도이 감독이 꼰대의 대명사로 욕을 많이 먹었지만 이치로는 그것이 잘못된 보도라고 해명함. 자신이 너무 마른 체형이고 풀시즌을 뛸 체력이 없어서 도이 감독이 2군에 보낸 것이고 오우기 감독에게 자신을 추천한 인물도 도이 감독이었다고. 잘못된 보도가 일파만파로 퍼져나간 이유는 도이 쇼죠가 현역 시절 요미우리 출신이고 오우기 아키라는 지방(후쿠오카) 출신이다 보니 도쿄 출신이면 까도 된다고 생각한 칸사이 지역 기레기들이 도이 감독을 무차별적으로 까는 기사를 만들었기 때문이었음. 이치로는 자신이 아무리 해명해도 정정 보도를 하지 않는 기자들에게 실망했으며 기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고 함. 타케노우치 마사시: 세이부에서 현역의 대부분을 보냈으나 말년에 한신으로 이적해서 거포로서 꽃을 피운 늦깎이 슬러거. 본래 완력이 좋았는데 배트에 힘을 전달하는 타격폼을 찾지 못해 많은 시도를 했고, 결국 타격의 화타로 알려진 나카니시 후토시 코치(랄프 브라이언트를 지도한 것으로 유명)의 도움을 받아 넬슨 크루즈처럼 배트를 둘러매고 공을 기다리다가 최단거리로 배트를 휘두르는 타법을 완성시킴. 당시에는 너무나 생소한 타격폼이었기에 아직 현역 투수였던 호시노 센이치가 "저건 야구를 똑바로 하겠다는 선수의 자세가 아니다!"고 격분할 정도. 타격폼 때문에 히팅 포인트가 극단적으로 몸에서 가까웠는데 '몸쪽 공을 피하려 들면 장타는 언제 치느냐'는 생각을 가졌기에 프로 통산 데드볼 166개를 기록함. 이는 기요하라의 196개 다음 가는 NPB 역대 통산 최다 데드볼 2위임. 은퇴 후, 코치로서 '폼이 추해도 좋다. 자신의 힘을 가장 잘 전달하는 폼을 찾아야 한다'는 지도 방식으로 똑딱이를 지향하는 우타자들을 슬러거로 개조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명성을 얻음. 야에가시 유키오: 야쿠르트에서만 23년을 보낸 야쿠르트의 프랜차이즈 스타, 그리고 후루타 이전의 '안경 쓴 포수.' 극단적인 오픈 스탠스 폼 때문에 인지도는 높지만 타격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이는 급격한 시력 저하로 오랫동안 고생하면서도 당시 통념에 따라 시합에서 안경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기 때문이었음. 안경을 쓰고 플레이 하기로 결심하면서 타격폼도 오픈 스탠스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곁눈질로 공을 보면 (렌즈 밖이니까) 잘 보이지 않아서." BQ가 높았고 한방의 타격이 있었으며 체형과 달리 외야 수비(포수로서 눈이 나빴지만 당대의 강견)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성적보다는 대타나 수비요원 같은 살림꾼으로 더 기여함. 노무라 감독은 묘하게 미신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기에 (시합에 이긴 날 입은 빤스를 계속 입는 바람에 야쿠르트가 여름에 연승하자 코치들에게만 괴롭다고 털어놓은 일화가 있음) 안경 쓴 포수의 전례를 남긴 야에가시가 아니었더라면 후루타도 안경을 쓰고 플레이하지 못했을 것임. 타네다 히토시: 왼쪽 어깨가 일찍 열리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고민하다가 처음부터 왼발을 투수를 향하게 놓으면 배트를 휘두르는 순간까지 어깨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게다리 타법'을 만들어냄. 즉, 보기에는 괴상하지만 타격 이론에 합당한 폼임. 나카무라 노리히로: 저런 타격폼과 빠던을 만들어낸 계기는 아마추어 시절 입은 손목 부상이 완치되기도 전에 계속 시합에 나가다가 결국 손목 통증이 고질병이 되었고 악력이 극단적으로 약했기 때문임. 나약한 악력으로 장타는 커녕 똑딱이도 될 수 없어서 처음부터 몸의 회전으로 장타를 만들려고 했고, 호쾌한 빠던을 한 이유는 공을 때리면 그냥 손을 놓아버렸기 때문임. 오치아이 히로미츠: 타네다와 정반대로 어깨가 먼저 열리고서 배트가 나오는 타격 이론의 이단 그 자체인 폼. 오치아이가 이런 폼을 만든 이유는 타케노우치와 정반대로 '데드볼을 피하기 위해서'였음. 왼쪽 어깨가 열리면서 공이 자기 몸쪽으로 날아드는지 확인하는데, 동시에 강인한 오른다리의 힘으로 배트가 나오는 것을 늦출 수 있었고, 그것으로 안타를 때려낼 수 있었음. 오치아이는 공의 밑부분을 때려서 공을 띄우는 기술이 좋았기 때문에 왼쪽 어깨가 열린 다음에 공을 때려도 홈런을 만들 수 있었음. 오치아이는 '공이 빠르든 말든 타이밍만 잡으면 때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공의 밑부분을 때리는 것'이라는 지론이 있어서 스프링캠프 때에는 패스트볼을 치는 연습은 하지 않고 커브볼 때리는 연습만을 했음. 다만 자신의 타격 이론을 선수들에게는 전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에게만 맞는 연습법'이라서. 쓰쓰고 요시토모가 오치아이의 타격법을 따라하다가 폭망한 적이 있음.
김단장님이 언급하신 오가사와라의 영혼까지 대출받아 휘두르는 풀스윙은 정말 간지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와 정말 특이한 폼들이 많았네요😅
오 사다하루: 프로 커리어 초반에는 1할 타율의 비참한 성적을 기록했는데, 은사 아라카와 히로시 코치가 보다못해 "너는 공이 오는 타이밍을 잡는 게 너무 서투르니 아예 오른쪽 다리를 들고 기다려라. 왼발의 다리힘은 네가 알아서 길러라"는 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플라밍고 타법을 연마. 연습이 끝난 후, 방에서도 스윙을 했는데 발가락이 지면을 쥐는 감각을 익히기 위해 맨발로 연습을 해서 발바닥 가죽이 벗겨지고 다다미에 피가 스며들었을 정도. 피에 물든 다다미를 본 아라카와 코치가 놀라서 "연습을 멈출 줄 아는 것도 프로다"고 말릴 정도로 연습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던 인물. 착화신장 177cm에 어깨도 그리 넓지 않아 슬러거로서 큰 체형이 아니었으나 다리만은 육상 선수급이었다고 할 정도로 하체가 강했고, 은퇴를 결심한 1980년(40세)에도 30홈런을 칠 정도로 하체의 강인함은 유명함. 요미우리 지도자 시절에는 "왜 너희들은 현역 때의 나처럼 연습을 못하는가?"고 선수들을 갈궈대는 걸로 악명이 높았지만 다이에 호크스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게 됨.
이치로: 당시 오릭스의 도이 쇼죠 감독이 이치로의 타격폼을 극혐해서 2군에 처박아놨고 후임 오우기 아키라 감독이 이치로를 발굴한 것처럼 보도가 되어 도이 감독이 꼰대의 대명사로 욕을 많이 먹었지만 이치로는 그것이 잘못된 보도라고 해명함. 자신이 너무 마른 체형이고 풀시즌을 뛸 체력이 없어서 도이 감독이 2군에 보낸 것이고 오우기 감독에게 자신을 추천한 인물도 도이 감독이었다고. 잘못된 보도가 일파만파로 퍼져나간 이유는 도이 쇼죠가 현역 시절 요미우리 출신이고 오우기 아키라는 지방(후쿠오카) 출신이다 보니 도쿄 출신이면 까도 된다고 생각한 칸사이 지역 기레기들이 도이 감독을 무차별적으로 까는 기사를 만들었기 때문이었음. 이치로는 자신이 아무리 해명해도 정정 보도를 하지 않는 기자들에게 실망했으며 기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고 함.
타케노우치 마사시: 세이부에서 현역의 대부분을 보냈으나 말년에 한신으로 이적해서 거포로서 꽃을 피운 늦깎이 슬러거. 본래 완력이 좋았는데 배트에 힘을 전달하는 타격폼을 찾지 못해 많은 시도를 했고, 결국 타격의 화타로 알려진 나카니시 후토시 코치(랄프 브라이언트를 지도한 것으로 유명)의 도움을 받아 넬슨 크루즈처럼 배트를 둘러매고 공을 기다리다가 최단거리로 배트를 휘두르는 타법을 완성시킴. 당시에는 너무나 생소한 타격폼이었기에 아직 현역 투수였던 호시노 센이치가 "저건 야구를 똑바로 하겠다는 선수의 자세가 아니다!"고 격분할 정도. 타격폼 때문에 히팅 포인트가 극단적으로 몸에서 가까웠는데 '몸쪽 공을 피하려 들면 장타는 언제 치느냐'는 생각을 가졌기에 프로 통산 데드볼 166개를 기록함. 이는 기요하라의 196개 다음 가는 NPB 역대 통산 최다 데드볼 2위임.
은퇴 후, 코치로서 '폼이 추해도 좋다. 자신의 힘을 가장 잘 전달하는 폼을 찾아야 한다'는 지도 방식으로 똑딱이를 지향하는 우타자들을 슬러거로 개조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명성을 얻음.
야에가시 유키오: 야쿠르트에서만 23년을 보낸 야쿠르트의 프랜차이즈 스타, 그리고 후루타 이전의 '안경 쓴 포수.' 극단적인 오픈 스탠스 폼 때문에 인지도는 높지만 타격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이는 급격한 시력 저하로 오랫동안 고생하면서도 당시 통념에 따라 시합에서 안경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기 때문이었음. 안경을 쓰고 플레이 하기로 결심하면서 타격폼도 오픈 스탠스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곁눈질로 공을 보면 (렌즈 밖이니까) 잘 보이지 않아서." BQ가 높았고 한방의 타격이 있었으며 체형과 달리 외야 수비(포수로서 눈이 나빴지만 당대의 강견)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성적보다는 대타나 수비요원 같은 살림꾼으로 더 기여함. 노무라 감독은 묘하게 미신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기에 (시합에 이긴 날 입은 빤스를 계속 입는 바람에 야쿠르트가 여름에 연승하자 코치들에게만 괴롭다고 털어놓은 일화가 있음) 안경 쓴 포수의 전례를 남긴 야에가시가 아니었더라면 후루타도 안경을 쓰고 플레이하지 못했을 것임.
타네다 히토시: 왼쪽 어깨가 일찍 열리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고민하다가 처음부터 왼발을 투수를 향하게 놓으면 배트를 휘두르는 순간까지 어깨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게다리 타법'을 만들어냄. 즉, 보기에는 괴상하지만 타격 이론에 합당한 폼임.
나카무라 노리히로: 저런 타격폼과 빠던을 만들어낸 계기는 아마추어 시절 입은 손목 부상이 완치되기도 전에 계속 시합에 나가다가 결국 손목 통증이 고질병이 되었고 악력이 극단적으로 약했기 때문임. 나약한 악력으로 장타는 커녕 똑딱이도 될 수 없어서 처음부터 몸의 회전으로 장타를 만들려고 했고, 호쾌한 빠던을 한 이유는 공을 때리면 그냥 손을 놓아버렸기 때문임.
오치아이 히로미츠: 타네다와 정반대로 어깨가 먼저 열리고서 배트가 나오는 타격 이론의 이단 그 자체인 폼. 오치아이가 이런 폼을 만든 이유는 타케노우치와 정반대로 '데드볼을 피하기 위해서'였음. 왼쪽 어깨가 열리면서 공이 자기 몸쪽으로 날아드는지 확인하는데, 동시에 강인한 오른다리의 힘으로 배트가 나오는 것을 늦출 수 있었고, 그것으로 안타를 때려낼 수 있었음. 오치아이는 공의 밑부분을 때려서 공을 띄우는 기술이 좋았기 때문에 왼쪽 어깨가 열린 다음에 공을 때려도 홈런을 만들 수 있었음. 오치아이는 '공이 빠르든 말든 타이밍만 잡으면 때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공의 밑부분을 때리는 것'이라는 지론이 있어서 스프링캠프 때에는 패스트볼을 치는 연습은 하지 않고 커브볼 때리는 연습만을 했음. 다만 자신의 타격 이론을 선수들에게는 전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에게만 맞는 연습법'이라서. 쓰쓰고 요시토모가 오치아이의 타격법을 따라하다가 폭망한 적이 있음.
역시 타네다는 들어있구나. 예전 일본야구 한참 볼 때 인상 깊게 봤었는데.
7:30 시작은 유킬리스인데 끝마무새는 트라웃이네요 ㅋㅋ
크로마티 선수 타격폼 대박이네 간지
이치로 mlb버전은언제나오나용
2:30 이 사람에 비하면 다 평범한데???
소위 말하는 신주타법이 많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