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장 13-17절 설교/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소외된 자 품고 고치시는 주님, 즉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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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30 вер 2024
  •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셨다.
    15. 예수께서 그 여자의 손에 손을 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그 여자는 일어나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16. 날이 저물었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NIV]
    14. When Jesus came into Peter's house, he saw Peter's mother-in-law lying in bed with a fever.
    15. He touched her hand and the fever left her, and she got up and began to wait on him.
    16. When evening came, many who were demon-possessed were brought to him, and he drove out the spirits with a word and healed all the sick.
    17. This was to fulfill what was spoken through the prophet Isaiah: "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diseases."
    =====8:14
    베드로의 집에 - 이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다.
    (4:18 - 20). 그리고 요 1:44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빌립과 마찬가지로 벱세다였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가 벱세다에서 출생하여 결혼과 동시에 가버나움으로 이거하면서 어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버나움과 벱세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설사 고향이 가버나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베세다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쨔든 예수께서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8:20) 베드로의 집에 자주 들러 거기서 거처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장모가 - 이 말은 베드로가 결혼하였음을 분명히 나타내 주는 말이다. 훗날 그의 아내는 바울과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고전 9:5). 그리고 그의 장모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마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도 함께 기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메드로의 결혼은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다소 희석(稀釋)시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열병으로 누운 것을 -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은 오늘날의 병명으로 말하자면 아마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의사인 누가는 그녀의 병을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녀를 위하여 예수께 구했던 것으로 보아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눅 4:38, 39).
    보시고 - 그 집에 들어서는 즉시 목격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주의에 사람들이 예수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환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목도(目睹) 하셨던 것이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열은 어떤 질병에 대한 증상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열 그자체를 일종의 병으로 여겼던 것같다(요 4:52; 행 28:8). 이런 이유로 해서 유대인의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생활 방식을 구정하고 있는 랍비들의 율법인 할라카(halacha)는 열병이 있는 자들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3절에서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 대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접촉이 금지된 환자를 만짐으로써 환자가 깨끗해진 것이다.
    열병이 떠나가고 - 마태복음에서 이 사건은 세번째로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순간적인 치유와 더불어 오랜동안의 건강까지 선사(膳賜)하셨던 것으로 보인다(Chrysostom). 예수께 수종들더라(카이 디에코네이 아우토). 여기서 '수종들거라'는 말의 동사 원형은 '디아코네오'(* , 시중들다, 돌보다, 섬기다)로서 본눈에서는 과거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과거 미완료형이란 것은 과거 어는 한시점을 전후해서 사건이 계속됨을 가리키는 시제로서 , 본문은 '섬기기 시작했다'(began to serve)는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가 자신을 구원한 주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구원받은 자는 그를 섬기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8:16
    저물매 - 이 사건은 막 1:32 - 34과 눅 4:40, 41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으로서 안식일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 다음에 일어났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온 시점은 저물 때로서, 곧 해가지고 저녁이 된 때인데, 이는 해가 지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유대인의 시간 개념과 연관이 있다. 즉 사람들은 노동이 일체 금지된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레 23:32에는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를 철두철미 안식하였던 것이다.
    귀신들린 자를 많이 - 성경은 육체적 질병과 뚜렷한 구별을 두고 '귀신들린 자'를 취급하고 있다(4:24; 12:22; 17:18). 따라서 이는 정신적 질환의 일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경은 정신 질환의 발병 원인을 사단의 역사로 보는 경향이 짙다(Weiss). 여하튼 예수 당시 유대 지방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적한 바 있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대단히 사악하였으며 도덕적 신앙적인 면에서 불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괴상한 마술에 심취하여 악령을 부르고 또 그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이다(Dr. Lightfoot).
    말씀으로 - 마태는 예수의 병고치는 이적을 기록할 때 이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3,8절).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능력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 여기서 귀신이란 말은 헬라어로 '타 프뉴마타'(* )로서 그문자적인 의미는 '영혼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는 이 말이 마귀들을 뜻하는 '다이모니아'(* )로 표기되어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모두 거기서 '귀신들'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신구약 중간사의 문헌들을 조사해 보면 이 '타 프뉴마타'란 것은 병을 가져다 주는 사자를 지칭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보통 악한 존재로 설명한다.
    한편 예수께서 귀신의 세력을 축출하시고 그 질환자의 정신을 맑게 하신 것은, 곧 예수께서 영 육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땅에 어두움의 세력을 완벽히 몰아내고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사 11:1 - 5; 35:5, 6).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누가는 본 사건을 어급하면서 "귓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눅 4:41)라고 그때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 마가복음은 이 구절을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막 1:34)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다'(all, NIV)란 표현이 마가복음에서는 '많은'(many, NIV)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상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 고친 것이, 곧 많이 고친 것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을 통해 마태는 예수께서 고칠수 없는 질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라는 자신감 넘치는 신앙을 은연중에 고백하고 있다.
    =====8:17
    우리 연약한 것을 짊어지셨도다 - 이말은 사 53:4의 인용으로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는 빠져 있다. 그런데 마태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고 또 다른 성경 기자들이 인용할 때 자주 사용하던 70인역(LXX)이나 아람어로 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하여 이를 번역했던 것으로 보인다(Stendahl).
    다시 말해서 4번째 '종의 노래'인 사 52:13 - 53:12에 대한 70인역이나 탈굼역은 사 53:4의 이부분을 영적인 의미로 번역하여 종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반면 마태가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어 본문은 이를 영적인 의미로 보다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의미로 더욱 강조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저인 의미로 더욱 강조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육체적인 질병을 대신 '담당하고' 또 '짊어지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개역 한글 성경 사 53:4와 본문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질고'는 '우리의 연약한 것'으로, 또 '슬픔'은 '병'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질고'와 '슬픔'은 분명히 추상적이고 영적인 의미인 것이다(사 53:4 주석 참조). 그러나 영적 육적인 고통과 슬픔의 원인은 죄에 있다는 점에서, 속죄의 교리를 담고 있는 사 53:4의 영적인 번역은 본질적으로 히브리 본문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담당하시고'(* , 에라벤)란 위치상의 '이동'이나 무엇을 '취하다'(take up)라는 뜻이며, '짊어지셨다'(* , 에바스타센)는 '참다', '들어 올리다', '고통을 참다'는 의미를 지니다. 이는 질병이나 고통이 예수께 그대로 옮겨졌다는 의미이기보다 예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질병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는 장차 감당하실 십자가 형벌의 빛나는 열매들인 것이다.
    2024년 6월 21일 금요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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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cyreform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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