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 - 배호. (1969) (원곡자, 이 애리수 1928) (가사 동시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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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8 лип 2020
  • 이애리수 - 황성옛터 (1928)
    작사: 왕평 / 작곡: 전수린
    한국인이 첫 번째로 작사 작곡을 한 대중가요
    그 상징성으로 인해 많은 후배가수들이 즐겨 불렀다.
    이 곡은 일본 사람들의 눈에 띄어 금지곡이 되었다가 해금된 작품이다.
    이애리수 여사 (1911 ~ 2009) 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개성 출신의 막간가수였던
    그는 18세 때인 1928년 전수린씨가 작곡하고 왕평씨가 가사를 쓴 ‘황성옛터’를 불러 일약 ‘국민가수’가 됐다.
    이후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을 갖던 중
    막간가수로 무대에 나선 이 애리수가 이 노래를
    불렀는데 이 애리수는 망국의 설움을 이 노래에 담아
    부르다가 솟구치는 오열을 참지 못해 3절에서 결국
    노래를 중단했습니다.
    그가 목이 멘 상태로 노래를 계속하자
    객석은 눈물바다가 됐다.
    1932년 빅타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황성옛터’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팔렸다.
    이 노래로 스타가 된 이애리수 여사는 22세 때
    연희전문학교 재학생 배동필과 결혼을 했다.

КОМЕНТАРІ • 1

  • @user-yp8yx3bd5m
    @user-yp8yx3bd5m  3 роки тому +3

    (1969.스테레오 힛트앨범 NO.3 /
    성음제작소.발매원:아세아레코드 ALS-165)
    배호 - 황성 옛터. (1969)
    (원곡자: 이 애리수, 1928)
    (대사 1)
    조국이여 산하여 나의 겨레여
    쇠사슬 삼십육년 그 모진 채찍 아래
    얼마나 울었드냐
    얼마나 몸부림을 쳤드냐
    못잊을 옛 노래여 황성 옛터.
    1.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쓰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대사 2)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2.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서 잠 못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이애리수 - 황성옛터 (1928)
    작사: 왕평 / 작곡: 전수린
    한국인이 첫 번째로 작사 작곡을 한 대중가요
    그 상징성으로 인해 많은 후배가수들이 즐겨 불렀다.
    이 곡은 폴리돌 레코드사의 문예부장 왕평씨와 작곡가겸 바이올린 연주자 전수린이 예술단의 일원으로 만주로 공연을 가면서 만주에서 어느 터를 보고 즉석에서 전수린이 바이올린으로 즉흥 연주했던 곡을 전수린이 악보로 옮기고 그 연주를 들은 왕평이 3절로 된 가사를 지어 이애리수라는 어느 악극단의 막간가수에게 무대에서 막간으로 부르게 한 다음에 음반으로 취입했는데 반응이 좋은데다가 일본 사람들의 눈에 띄어 금지곡이 되었다가 해금된 작품이다. 이경설이 이라는 제목으로 제목만 바꿔서 노래를 취입한 적이 있었다.
    이애리수 여사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개성 출신의 막간가수였던 그는 18세 때인 1928년 전수린씨가 작곡하고 왕평씨가 가사를 쓴 ‘황성옛터’를 불러
    일약 ‘국민가수’가 됐다.
    이후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을 갖던 중
    막간가수로 무대에 나선 이 애리수가 이 노래를 불렀는데
    이 애리수는 망국의 설움을 이 노래에 담아 부르다가 솟구치는 오열을 참지 못해
    3절에서 결국 노래를 중단했습니다.
    그가 목이 멘 상태로 노래를 계속하자 객석은 눈물바다가 됐다. 1932년 빅타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황성옛터’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팔렸다. 이 노래로 스타가 된 이애리수 여사는 22세 때 연희전문학교 재학생 배동필과 열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