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부터 1997년까지 15시즌동안 아홉번의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9번 모두 우승한 KS 전설의 팀. 1980년 5월의 그 날 이후, 핍박받고 짓밟히며 외롭고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던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호남 사람들.... 해태가 경기에서 승리하거나 우승의 감격의 순간에 관중석에서 흘러나오는 응원가는 ‘목포의 눈물’ 이었고 이 노래에는 정치인으로서 DJ의 영욕의 삶을 절실히 표현해준 구슬픈 곡이었다. 호남 사람들에게 (특히, 광주시민들에게는 더욱) 해태타이거즈는 자존심이자 내 심장과도 같았으며.. 지금은 챔피언스필드옆에 쓸쓸히 남아있는 낡은 무등경기장은 그 당시 호남사람들이 술한잔 기울이고 맘껏 소리치고 응원하며 울분을 삭힐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프로야구 출범이후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5월18일에는 해태의 광주 홈 경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생각보다 없다는... 그 정도로 군사정권이나 특정 세력들이 두려워했던 그 무언가) 서러웠던 패배와 차별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승리의 희열을 부르짖고, 무한하게 자부심을 품을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 아버지와 삼촌들이 목놓아 소리치시던 그 시절을 함께한 1인) 지금은 추억의 뒤켠으로 저물어간 빨간상의에 검정바지, 김응용 감독이하 기라성 같았던 대 선수들 김봉연/김종모/김일권/차영화/서정환/김정수/문희수/박철우/장채근/정회열/이강철/신동수/한대화/김성한/이순철/홍현우/이대진/김종국/임창용, 아기호랑이 김상진 등등 타이거즈팬들 기억속 영웅들... 그리고 한국야구의 투타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 선동열, 이종범까지.... 그게 바로 해태 타이거즈였다. 타이거즈여 영원하라! -30여년전 타이거즈 어린이회원 드림- P.S. 전국의 오랜 호랑이 팬분들 모두 건강하시길 ^^
제 조부모님,부모님은 김천분이셨습니다. 제가 해태팬이었다고 친할머니가 매일 저를 전라도 새끼, 빨갱이 새끼라고 욕했어요. 초등학생 어린 나이에 왜 그렇게 욕을 들어야하는지, 경상도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소위 어른이란 분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덕에 제가 5.18에 대해 찾아보고, 진실을 알게 되었네요. "길위에 김대중"을 보며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맨 처음 김대중을 외칠 때 광주 구장에 있었습니다. 사연은 여러기지가 있었지만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당시 김대중이란 투수가 있었던 걸로 기억 됩니다. 그 투수가 나와서 신기 하기도 하고 장난 비슷하게 외첬던 것이 시작이 되었고 그 투수만 나오면 김대중을 연호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하게 맞습니다. 1988년도 인가 부터 김대중 선수가 프로에서 뛰기 시작하셨고 김대중 연호는 1989년 4월 8일 인가 개막전 해태 빙그레 광주 구장에서 할 때 마지막에 등판한 선수가 빙그레 김대중 투수 그 때 김대중 연호가 시작 된 걸로 기억 납니다 그 때 중계 방송 캐스터도 황당해서 웃었어요 ... 그 언론인도 광주 구장 팬들 광주 시민들 왜 그러는지 말면서도 그냥 웃으시며 "야구장에서 저러면 안되는데.... "그렇게 멘트 하고 넘어갔죠
1980년대 해태 경기 후반. 해태팬들은 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호남인들의 한. 설움. 눈물을 잠시나마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해태 선수들은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죽기살기로 뛰어서 승리함으로써 해태팬들을 위로하여 주었다. 어느 정치인들도 하지 못한 위대한 일들을 해태 선수들은 해 주었다.
억눌린 울분을 풀 곳이 야구밖에 없었다. 정치는 잘 몰라도 이치와 도리는 아는 사림이다. 배움이 짧아 넥타이에 화이트칼라는 못되고 저기 공장 공돌이 3교대로 서울로, 부산으로, 포항, 울산,대구에 살 지언정 고향이 그리웠다. 잘 기억도 안나는 고향 말이지마는 그래도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해태 해태 내 사랑 해태 김대중 김대중 하는 우리 이모 미음을 니는 아나?
지금 미안마상황은 시시각각 전 세계로 전파되지만 당시 80년 광주는 얼마나 분하고 무섭고 외로웠을까? 동족을 향해 그토록 잔인했던 자들에게 절대로 어설픈 용서와 관용은 안됩니다. 시간지나니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일제식민지를 왜곡찬양하는 인간들처럼 5.18을 왜곡 비방하는 인간들에게 어설픈 관용은 큰 비극이 될것입니다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말하자 바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광주의 아픔을 다룬 노래가 1981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했으니 정권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김원중은 "세상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라는 노랫말에 나타나듯 광주항쟁에 모인 시민들과 폭압적 진압을 폭풍우에 비유하며 고립된 광주를 '바위섬'에 빗대어 노래했다. 사실 이 노래는 배경을 모르면 처럼 서정적인 노래로 들리지만, 속뜻을 알고 들으면 그렇지 않다. 특히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는 대목은 더 이상 서정적이지 않게 들린다. 슬픔을 딛고 살아남은 자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22대 국회서 실현되나
지금은 야구의 응원도 약간 퇴색했고, 지역색도 조금은 없어져서 요즘 이재명지지율이 호남에서 65% 정도에 있는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좀더분석해보면 아직도 대한민국은 경상인의 세상임이 틀림없읍니다.김대중을 제외하고는 여든야든 전부 경상인이 대통령 이었던것이 사실이죠. 즉 지난 30여년가까이 독재가 아직도 국민의 마음속에 경상인이 자리잡고있다는 반증입니다 .이번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충청의 윤석렬이나 이는 경상인의 집권연장선이 틀림없죠. 올바로 투표가되도 이재명경상인이 되는것이지만 크게보아 이는 차선책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우리는 눈에보이는 독재를 막았으나 후에 그여파로이루어지는 경상패거리독재를 막아 정상적인 민주국가를만드는것이 518영령들로부터 우리가 물려받은 책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이번선거는 형편없는 가족사기단과의 대전이니 반드시 힘을 합하여 올바른세상을 만들어야될것으로 생각됩니다....!!!!
@@Kelly-zz3mn 근데 당신은 안겪었자나 그게 중요하지 꼰대든 아니든 모르는 사람의 평가는 내 알바 아니고 겪어본 사람의 회고로는 문제가 많은 소요사태였다. 의도는 숭고하나 과정에 많은 하자가 있었다. 전라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공격하거든 이걸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대응해야 한다는게 이글의 의미인데 공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게 문제지 무슨 성역이여
@@송탄수면제 왜 죄다 논리가 막히면 공부하고 오라는 댓글이 달리네 안타까움 현실이 불편하다고 부정하는건 지성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4.19는 자유당정권의 몰락, 6월항쟁은 직선제를 통과시켰고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의 종말을 앞당겼고 이런 역사적 진보를 이끌어내었다고 공통된 평가를 받는데 5.18은 어떤 역사적 의의가 있는가요? 아무리봐도 신군부독재의 제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데요. 광주시민의 역사라고 하는데 저희 친지가족들 이웃들은 죄다 무서워서 집에 숨어있었습니다. 대다수 광주시민들 사이에서도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운동권 대학생들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이야 재조명하고 석연찮은 과정을 통해서 민주화운동으로 승격했습니다만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회척결의 일환으로 재조명된거라 5.18에 대한 정확한 분석없이 급작스럽게 된건 맞습니다. 그 일례로 유공자에 대한 납득이 가는 보훈방식도 없었고 그냥 시위에 참석했다고 하면 유공자가 되었죠. 그러니 반대편에서 그걸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안타깝네요.
김대중 대통령도 해태 팬들은 물론 KIA 팬들을 그리워할것이다.
호남의 자존심 해태 타이거즈 그립습니다.눈물도 나네요.우리의 히어로들 건강들 하십시요.
1983년부터 1997년까지 15시즌동안 아홉번의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9번 모두 우승한 KS 전설의 팀.
1980년 5월의 그 날 이후, 핍박받고 짓밟히며 외롭고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던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호남 사람들....
해태가 경기에서 승리하거나 우승의 감격의 순간에 관중석에서 흘러나오는 응원가는 ‘목포의 눈물’ 이었고 이 노래에는 정치인으로서 DJ의 영욕의 삶을 절실히 표현해준 구슬픈 곡이었다.
호남 사람들에게 (특히, 광주시민들에게는 더욱) 해태타이거즈는 자존심이자 내 심장과도 같았으며.. 지금은 챔피언스필드옆에 쓸쓸히 남아있는 낡은 무등경기장은 그 당시 호남사람들이 술한잔 기울이고 맘껏 소리치고 응원하며 울분을 삭힐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프로야구 출범이후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5월18일에는 해태의 광주 홈 경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생각보다 없다는... 그 정도로 군사정권이나 특정 세력들이 두려워했던 그 무언가)
서러웠던 패배와 차별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승리의 희열을 부르짖고, 무한하게 자부심을 품을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 아버지와 삼촌들이 목놓아 소리치시던 그 시절을 함께한 1인)
지금은 추억의 뒤켠으로 저물어간
빨간상의에 검정바지,
김응용 감독이하 기라성 같았던 대 선수들
김봉연/김종모/김일권/차영화/서정환/김정수/문희수/박철우/장채근/정회열/이강철/신동수/한대화/김성한/이순철/홍현우/이대진/김종국/임창용, 아기호랑이 김상진 등등
타이거즈팬들 기억속 영웅들...
그리고 한국야구의 투타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
선동열, 이종범까지.... 그게 바로 해태 타이거즈였다.
타이거즈여 영원하라!
-30여년전 타이거즈 어린이회원 드림-
P.S. 전국의 오랜 호랑이 팬분들 모두 건강하시길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진짜 멋진글인거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정말 멋지고 훌륭한 말씀.
감사합니다.
멋있네요
제 조부모님,부모님은 김천분이셨습니다. 제가 해태팬이었다고 친할머니가 매일 저를 전라도 새끼, 빨갱이 새끼라고 욕했어요. 초등학생 어린 나이에 왜 그렇게 욕을 들어야하는지, 경상도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소위 어른이란 분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덕에 제가 5.18에 대해 찾아보고, 진실을 알게 되었네요. "길위에 김대중"을 보며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에휴… 저도 그럽니다….
저희집은 경남함양이 본가이고
저는 서울태생에 대전거주중인데
아버지와 제 동생은 삼성 작은아버지는 롯데…
저만 기아였어요…..
해태때부터 그렇고 경기가 그렇게 재밌게하고
포기를 모르는 팀이었기 때문에
이기든 지든 기아경기는 재밋어서 기아팬됐습니다
명절때 집안 어른들 모이면
집안에서는 다들 삼성롯데응원할때
저만 속으로 이종범응원하며 장성호 응원하며
해태기아를 응원한 기억납니다
왜 기어응원하냐고 어르신들이
호남빨갱이 그만응원하라고 언지준 기억나네요
근데 일부 사실은 맞잖아요
@@DaeguLotte’대구‘
이게 뭐라고 이리 울컥하냐...눈물이 핑도네...나도 어쩔 수 없는 전라도 보성넘이구만..
다 고생 하셨습니다 우리도영이
맨 처음 김대중을 외칠 때 광주 구장에 있었습니다. 사연은 여러기지가 있었지만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당시 김대중이란 투수가 있었던 걸로 기억 됩니다. 그 투수가 나와서 신기 하기도 하고 장난 비슷하게 외첬던 것이 시작이 되었고 그 투수만 나오면 김대중을 연호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하게 맞습니다.
1988년도 인가 부터 김대중 선수가 프로에서 뛰기 시작하셨고
김대중 연호는 1989년 4월 8일 인가 개막전 해태 빙그레 광주 구장에서 할 때
마지막에 등판한 선수가 빙그레 김대중 투수
그 때 김대중 연호가 시작 된 걸로 기억 납니다
그 때 중계 방송 캐스터도 황당해서 웃었어요 ...
그 언론인도 광주 구장 팬들 광주 시민들 왜 그러는지 말면서도 그냥 웃으시며
"야구장에서 저러면 안되는데.... "그렇게 멘트 하고 넘어갔죠
1980년대 해태 경기 후반.
해태팬들은 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호남인들의 한. 설움. 눈물을
잠시나마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해태 선수들은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죽기살기로 뛰어서 승리함으로써
해태팬들을 위로하여 주었다.
어느 정치인들도 하지 못한 위대한 일들을
해태 선수들은 해 주었다.
요거시 바로 우덜의 한이란 것이제.. 서울 올라와서 집 얻기도 어렵고, 취직도 안되고, 우덜을 차별허고, 우덜을 벌레 취급했당께... 우덜은 야구 끝나고 목포의 눈물을 울면서 합창허고
슨상님 슨상님을 외치며 울면서 연호했제..
롯데팬인 나한텐 정말 부러웠죠 롯데 우승은 최동원 염종석을 갈아 넣으면서 우승을 했는데 해태는 끝판왕 느낌이 강했으니까요
이겨야 잠을 편히 잘수있었던 지면 울분에 잠못이루었던 기억이 나네요~
나는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을
잊지 못하고 존경합니다.
지금의 기아 선수들은 해태 선수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아 별로 애정을 느끼지 못하겠음.
그때 그시절 무등경기장 1루석에서 아니 전 관중석에서 함께 어울려서 목청껏 부르짖던 해태~해태
플레이 플레이 ㅇㅇㅇ
나이스 빳다 나이스 빳다 ㅇㅇㅇ 외쳤던 그 함성이 십수년이 흘렀네요 우리 광주시민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시절 우리는 광주의 아품을 함께하지 못해서 마음이 너무 아파서 고교야구 또 프로야구장에 찾아가던 일이 생각이 나네요 그때 누군가 리더가 있어서 데모를 했다면 우리도 두려워 하지 않고 광주의 아품을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그때 당시 많은 분들의 생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가 뭐가 아파 ...
방송국 폭발을 진압해야지 그럼 놔두냐
요즘 미얀마를 보면은 알수있죠
공부좀해라
위대한 의로운 지도자 김대중 !
우승 감격 가지고 생각나서 보러 왔어요
저 때 김대중이라는 선수가 실제로 빙그레 이글스 팀에 있었어요
빙그레 팀에서 광주 원정 오면 꼭 김대중 투수를 후반에 등판 시켰어요
김대중 선수 마운드에 오른 후 부터 김대중 연호가 본격 시작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해 주셨내요
울분을 내뿜은것이지요
어떤 울분? 왜 이 나라는 북조선 에 현금 지원을 못 하는가 ?
@@이호연-l7d 생각하는거하고는
@@통통이삼촌 도대체 왜 개대중 뇌물현 을 찬양하는 거니
찬양을하긴누가찬양을해 에휴
억눌린 울분을 풀 곳이 야구밖에 없었다. 정치는 잘 몰라도 이치와 도리는 아는 사림이다. 배움이 짧아 넥타이에 화이트칼라는 못되고 저기 공장 공돌이 3교대로 서울로, 부산으로, 포항, 울산,대구에 살 지언정 고향이 그리웠다. 잘 기억도 안나는 고향 말이지마는 그래도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해태 해태 내 사랑 해태 김대중 김대중 하는 우리 이모 미음을 니는 아나?
해태 - 빙그레 경기.
빙그레 이글스 투수는 김대중.
해태팬들은 김대중 ! 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참 아이러니하고도 웃기면서도 슬픈 광경.
응원단장 임갑교님 인기4ㅗ 대단했지
잠실구장에서 제일 외쳐대던게 경기장에선 이종범 퇴장할땐 김대중
빙그레의 동명이인 투수 김대중이 광주에서 해태 팬들의 환호를 받는 광경도 있었을 정도.
지금 미안마상황은 시시각각 전 세계로 전파되지만 당시 80년 광주는 얼마나 분하고 무섭고 외로웠을까? 동족을 향해 그토록 잔인했던 자들에게 절대로 어설픈 용서와 관용은 안됩니다. 시간지나니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일제식민지를 왜곡찬양하는 인간들처럼 5.18을 왜곡 비방하는 인간들에게 어설픈 관용은 큰 비극이 될것입니다
안녕 하세요 💞 광주 방송* KBC 언제 🤔 생겼 나요 ?
1995년 5월 14일 일요일 부터 티비 전파 송신 시작
광주 대구 부산 대전 동시에
개국 특집 현지 제작 드라마가 옥이 이모 입니다
광주. 전남 , 전북의 아픔이었죠
1988년에는 빙그레. 투수 김대중 선수가 해태 선수들에게 허벌나게 맞아서 역으로 그선수를 응원했다고 하지.. 하도 맞아서 딱해서..
이게 실제 있었던 일이구나...
1:20
80년대 해태 타이거즈는 김대중 선생님과/ 먹포의 눈물아니나? 아~~~~
해태가 마지막 우승했을때 dj가 대통령 됐었죠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말하자 바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광주의 아픔을 다룬 노래가 1981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했으니 정권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김원중은 "세상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라는 노랫말에 나타나듯 광주항쟁에 모인 시민들과 폭압적 진압을 폭풍우에 비유하며 고립된 광주를 '바위섬'에 빗대어 노래했다. 사실 이 노래는 배경을 모르면 처럼 서정적인 노래로 들리지만, 속뜻을 알고 들으면 그렇지 않다. 특히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는 대목은 더 이상 서정적이지 않게 들린다. 슬픔을 딛고 살아남은 자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22대 국회서 실현되나
심장이고, 두뇌죠.
대중할배가 대통령 된 이후 아이러니하게 해태타이거즈는 부진에 빠졌다. 물론 IMF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임갑교 선생님
해태 아줌마 그립습니다
김대중 정신 타이거즈 정신~
브금이 익숙하다 했더니 킹피아 시티 광고브금...
한자까지 똑같은 김대중 빙그레 투수가 광주경기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진짜였나요?
빙그레 김대중 투수가 해태 타자들에게 약했다는 증언이 있긴 합니다. 내일 장채근×이상군편 방송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1989년 10월 30일 월요일 광주에서 열렸던 한국시리즈 4차전때 실제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인정 받아야 할 대통령은 3명임.
박정희 김대중 문재인
물론 다른 대통령들도 고생했지만 특히 저분들이 우리나라를 강대국으로 이끄는데 많은 공헌을 했음.
지금은 야구의 응원도 약간 퇴색했고, 지역색도 조금은 없어져서 요즘 이재명지지율이 호남에서 65% 정도에 있는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좀더분석해보면 아직도 대한민국은 경상인의 세상임이 틀림없읍니다.김대중을 제외하고는 여든야든 전부 경상인이 대통령 이었던것이 사실이죠. 즉 지난 30여년가까이 독재가 아직도 국민의 마음속에 경상인이 자리잡고있다는 반증입니다 .이번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충청의 윤석렬이나 이는 경상인의 집권연장선이 틀림없죠. 올바로 투표가되도 이재명경상인이 되는것이지만 크게보아 이는 차선책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우리는 눈에보이는 독재를 막았으나 후에 그여파로이루어지는 경상패거리독재를 막아 정상적인 민주국가를만드는것이 518영령들로부터 우리가 물려받은 책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이번선거는 형편없는 가족사기단과의 대전이니 반드시 힘을 합하여 올바른세상을 만들어야될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때당시 빙그레 투수 김대중 선수는 인기고 나발이고간에 수많은 관중들이 김대중을 하도 왜처서 다리가 후들후들함. 아~
누가 대중이를 연호해? 웃기고 있네
김대중씨가 김일성 김정일 전두환을 평생 은인으로 봤죠. 5.18 호남의 영웅으로 탄생. 무려40년을 국회의원50석이상.
후레자식아
김대중씨?? 너는 니 아버지 존함 뒤에도 씨짜 붙이냐?
니가 이런글 쓰고 다니면 하늘에 계신 니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시겠냐
@4920 seong ㅂㅅ
@@이승채-r8x 개대중 도요타다이쥬
흠...
니가 들어올곳이 아냐 언능 가그라 더럽다
@@junyseo3964 와그라노?
나도 광주 출신이지만 5.18에 대한 접근은 신중해야한다고 생각함 이 댓글들 중에 5.18을 직접 겪은 사람이 나말고 몇이나 있겠냐만 의도는 숭고하지만 과정과 결과는 모두 참혹한 실패였다는 것을 인정해야함 신군부한테 빌미를 주고 본보기 희생양을 스스로 바친거나 마찬가지
미친건가? ? 니네조상도 실패한인간일뿐 너를 태어나게했으니
여기에 518겪은 사람 너 말고도 많은데... 니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흔한 말로 꼰대라고 하지...
@@Kelly-zz3mn 근데 당신은 안겪었자나 그게 중요하지 꼰대든 아니든 모르는 사람의 평가는 내 알바 아니고 겪어본 사람의 회고로는 문제가 많은 소요사태였다. 의도는 숭고하나 과정에 많은 하자가 있었다. 전라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공격하거든 이걸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대응해야 한다는게 이글의 의미인데 공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게 문제지 무슨 성역이여
과정과 결과가 참혹한 실패라는 무지한 답글을 남긴 당신은 비록 광주 출신이지만, 광주시민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 한참 부족한듯.
아울러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해 공부좀 많이하고 오시오~ 어줍잖게 덤비지 말고 ^^
@@송탄수면제 왜 죄다 논리가 막히면 공부하고 오라는 댓글이 달리네 안타까움 현실이 불편하다고 부정하는건 지성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4.19는 자유당정권의 몰락, 6월항쟁은 직선제를 통과시켰고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의 종말을 앞당겼고 이런 역사적 진보를 이끌어내었다고 공통된 평가를 받는데 5.18은 어떤 역사적 의의가 있는가요? 아무리봐도 신군부독재의 제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데요. 광주시민의 역사라고 하는데 저희 친지가족들 이웃들은 죄다 무서워서 집에 숨어있었습니다. 대다수 광주시민들 사이에서도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운동권 대학생들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이야 재조명하고 석연찮은 과정을 통해서 민주화운동으로 승격했습니다만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회척결의 일환으로 재조명된거라 5.18에 대한 정확한 분석없이 급작스럽게 된건 맞습니다. 그 일례로 유공자에 대한 납득이 가는 보훈방식도 없었고 그냥 시위에 참석했다고 하면 유공자가 되었죠. 그러니 반대편에서 그걸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