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HD역사스페셜 -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풍납토성 / KBS 2005.6.1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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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30 вер 2024
  • -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풍납토성!
    백제의 첫 도읍지가 한성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첫 수도 위례성의 위치는 고려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지난 1997년 이래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엄청난 양의 초기 백제유물이 속속 발굴되면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위례성이었음이 확실시되고 있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어떤 유물이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일까?
    - 한성백제, 잃어버린 한국 고대사를 복원하다
    3세기 한반도를 잘 묘사한 것으로 알려진 삼국지위지동이전은 이 시기 백제를 고대국가가 아닌 변변한 성곽도 없는 조그만 부족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성곽축조연대를 확인하기 위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한성백제는 적어도 2세기에는 연인원 100만 명을 동원해 국가적인 토목공사를 수행할 만큼의 고대왕국으로 성장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풍납토성에서는 한성백제가 고대국가로서의 위용을 갖추고 동아시아 물류 네트워크의 중심지에 있었음을 시사하는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는데...
    - 목조우물, 한성백제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다
    풍납토성 동벽지점의 성 밖에서 나무로 정교하게 엮어 만든 목조우물이 발견됐다. 그동안 돌과 나무를 섞어 만든 우물은 발굴된 적이 있지만 이런 완전한 목조우물은 최초였다.
    이 우물의 발견은 성 안과 성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시사한다. 성 밖의 한성백제인들은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HD역사스페셜에서는 나무두레박, 똬리 등 우물 발굴시 출토된 유물만으로 한성백제의 우물가 풍경을 복원한다.
    HD역사스페셜 7회 -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풍납토성 (2005.6.17.방송)
    history.kbs.co.kr/

КОМЕНТАРІ • 567

  • @이쁜이-p7n
    @이쁜이-p7n 10 місяців тому +13

    제가풍납동에 89년부터살았는데그때는문화재라는개념이없어 토성위에 파농사를 많이 지었습니다
    본인땅도아닌곳에 버젓이 농사를짓고

  • @user_ihrjtetiiz
    @user_ihrjtetiiz 6 місяців тому +9

    와 정말 송파구 풍납동 강동구 성내동 하남시 감일동 춘궁동까지 어마어마한 백제 유물들이 지금의 집들 밑에 많이 있겠네요
    지금은 아파트와 다세대 건물등이 뺵뺵하게 지어져있어서...

  • @ack3145
    @ack3145 3 роки тому +114

    다른나라에서는 저런 고대유물들 나오면 까무라치면서 발굴 연구하는데 이놈의 나라는 어떻게 되먹은게 문화재를 너무 우습게 안다.

    • @alanshore8440
      @alanshore8440 2 роки тому +9

      뭘 보고 우숩게 여긴단거지?
      우린 기와 반쪽만 나와도 공사 중지인데?

    • @고려정자-y4y
      @고려정자-y4y 2 роки тому +3

      그러게...예전은 몰라도 요즘은 다른나라 못지않게 발굴에 있어 소홀하게 하진 않아요

    • @damonkim2921
      @damonkim2921 2 роки тому +11

      @@alanshore8440 그냥 지혼자 빡쳐서 무지성 뇌피셜로 싸지르는거임

    • @bamboosoap8434
      @bamboosoap8434 2 роки тому +10

      @@damonkim2921 무지성이 아닌게 중도 레고랜드만 봐도 상황이......

    • @soosoosoo1234
      @soosoosoo1234 Рік тому +1

      ​@@damonkim2921레고랜드 그냥 덮음 ㅋㅋㅋㅋ 방송을 그렇게많이 했는데도 덮음ㅋㅋㅋ

  • @iderok5368
    @iderok5368 3 роки тому +16

    백제 초기성이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전성기때 백제 위례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음. 더구나 강에 너무 붙어있어서 홍수에 취약하고. 하남 이성산성,춘궁동 일대가 아닐까 싶은데 형세가 좁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배산이 남쪽이라. 더우기 삼국사기에 위례성 남쪽에는 벌이 있다고 했는데 춘궁동 남쪽은 남한산성부터 이어지는 산지대. 결국 위례성은 나성구조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성산성이 도시 외곽을 싸고 있는 구조가 아닐까 개인적 추측. 서로는 풍납토성, 남으로 몽촌토성이 방벽이 되고 동으로는 일자산이 이성산이 막고 있고 지금은 개발로 없어졌지만 암사동쪽에서 예전에는 작은 산성하나가 있었고. 결국 풍납토성 동쪽인 지금의 길동,천호동 일대에 궁성이 있지 않았나 싶지만 이미 수많은 건물들이 덮고 있어서 확인 불가. 하남 감일동일대도 유력하다고 생각하지만 몇년전 고분군이 발견되었다니 그쪽은 궁성이 있는곳은 아닌것 같고. 궁터가 발견된 곳이 없다는것은 딱 하나. 이미 궁터를 발굴하지 못하거나 보고도 덮은채 강남개발되며 건물과 아파트와 주택이 그 위에 들어앉아 찾을수가 없는것.

    • @soosoosoo1234
      @soosoosoo1234 Рік тому

      강 줄기는 바뀐단다 아그야 70년대 한강이랑 지금한강도 줄기가 다르구만 2000년 전인데 안바뀌긋냐?? 상식이 적으로

  • @layerrare1398
    @layerrare1398 3 місяці тому +2

    풍납토성과 석촌동 주변으로 발굴을 잘 했으면 신라 경주에 버금가는 문화유산들이 많이 나왔을 것임
    서울의 역사적 가치도 더 올라갔을 것임 돈의 논리로만 생각해 난개발을 해대니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것이 저렇게 초라한 것이다

  • @yi01471
    @yi01471 4 роки тому +243

    180년 충청백제 시기에 나온 유물이 500년 한성 백제보다 많다는건..
    하남, 송파, 강남 아파트 지을때 얼마나 많은 백제유물이 시공업체에 의해 파괴되었는지ㅜㅜ 짐작할만 합니다

    • @김동욱-z9p
      @김동욱-z9p 4 роки тому +11

      01471 Yi 어이 김씨 죽고싶어 그냥 묻어버리라고

    • @v이너프미네랄스
      @v이너프미네랄스 4 роки тому +41

      사기업과 한국 정부의 콜라보
      석촌 백제 왕릉들이 일제때 수십개 이상이 있었다는데 산업화때 싹 다 밀림

    • @MA-it1oh
      @MA-it1oh 4 роки тому +46

      웃긴건 현재 세계최대의 무덤 문화유적지이자 일본 16대 닌토쿠천황의 무덤지로 추정되는 곳을70. 80년대에 일본에서 발굴하려다가 백제유물 존나나와서 존내 놀래서 현재는 발굴자체는 금기하고 있음. 백제가 왜국에 직접적인 군사력으로 영향력을 휘두르지 않았어도 분명 문화적 그이상의 무언가 엄청난영향력이 있었단 증거 백제는 근초고왕의 전성시절엔 요서지방도 지배했다하니 대단하긴함

    • @도요다다이쥬-x9h
      @도요다다이쥬-x9h 4 роки тому +17

      엄청 날조 선동해대는데 저긴 왕터가아닙니다. 왕터라하긴 동네 반의반수준으로 너무작고 유물도별거없고 초석도몇개되지도않고 너무한강가에 맨날 홍수나고 바로 아차산에서보입니다. 저런곳을 왕터로하지않아요..백제수도인 하남위례성은 풍납동이아닌 말그대로 하남교산이 유력합니다. 풍납동은 옆에산도없이그냥 바람엄청들어오는 평지예요. 어느멍청이가그런곳에왕성터를잡습니까?? 전쟁을할려면 제사지내는곳이잇는거고.

    • @snsjssjllkaw5653
      @snsjssjllkaw5653 4 роки тому +3

      @@도요다다이쥬-x9h 지형은 시대마다 계속 변하던데 그 당시도 그러한지 아나요?

  • @philly3604
    @philly3604 11 місяців тому +5

    1970년대 어린 시절 이 근처 암사동에 살았는데 국민학교 아이들이 장난으로 칼싸움을 하는데 한 아이가 땅속에서 나온거라면서 엄청 옛날 단검으로 놀던거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삼국시대 유물 아닌가 싶다

  • @Luminary03
    @Luminary03 4 роки тому +58

    작년에 볼게 좀 있는 유적지인줄 알고 일부러 찾아 가봤는데... 그냥 주택가더라구요. 차라리 몽촌토성에 가시면 한성백제 박물관도 있고 올림픽공원 내부라 볼게 좀 있어요.

    • @쉴레이만은솔로몬유수
      @쉴레이만은솔로몬유수 4 роки тому +4

      그래도 산책하긴 좋던데요 뭘 ㅋ

    • @뽀리깡-c1x
      @뽀리깡-c1x 3 роки тому +6

      그곳 밑에 다 백제 유적이 깔려있음 전두환대에 졸속 주택개발로 무시해서그렇지

    • @1967IlIlIl
      @1967IlIlIl 3 роки тому +1

      @@하이러너-s3r 병신이세요? ㅋㅋ 일본은 4세기에 겨우 중앙집권화 비스무리한거 성공하고도 백제망할때까지 오나홀 그 이상도 아니였는데 왜 뇌내망상을 싸지름 ㅋㅋ

    • @행운아-l7s
      @행운아-l7s Рік тому

      백제 유적은 무슨요.ㅡㅡ 서울 땅 파서 유적 안나오는곳 없어요. 이거 다 조작으로 밝혀질꺼에요.

  • @junyshin5843
    @junyshin5843 2 роки тому +5

    저기가 성터였을거 같지 않은데.....뻘토양에 장마철 항상 범람하는 지역인데...거기다가 성을 지었다고??? 매년 물난리 났었을건데ㅎㅎㅎㅎ500년이 아니라 5년도 못버텼을거 같은데...
    나 어릴때도 풍납동 반지하는 거의 매년 침수됐는데.... 옆에 아산병원들어오면서 펌프랑 배수시설 정비하고 부터 침수가 안된건데...고대 기술이 현대기술보다 얼마나 좋았길래 매년 침수를 막을수 있었을까??? 토성 쌓은거만 봐도 옛날사람들도 뻘층인거 인지하고 있었구만...거기다가 성을 짓는다고요?? 주변에 좋은땅 널리고 널렸을 고대 시기에...굳이 뻘층에다가 성을 짓고 500년 살았다???
    그냥 무역이랑 제사관련 시설 이런거만 있었을거 같은데....
    그리고 토성은 안쪽 보호 용도가 아닌 반대편을 보호하기 위한 제방같은 용도 아니였을까?? 차라리 몽촌토성쪽이 성터 였다는게 더 맞을거 같은데...

  • @튜터-h8p
    @튜터-h8p 4 роки тому +36

    위례성 안까지 개발이 되어있네. 저러면 발굴도 거의 힘들듯

    • @scap4437
      @scap4437 3 роки тому +4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거 같아서 말씀드립니다만
      전라도는 백제가 아닙니다
      전라도는 6세기까지 독자세력을 유지하던 변두리 마한입니다
      동성왕 무령왕때에도 여러차례 전라도 정벌의 기록이 있으며
      백제 말기에 식민지 형태로 복속되었을뿐
      벡제인의 정체성은 한번도 가진적 없던 지역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왜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전라도에만 있다는것이 그 대표적 근거죠
      백제는 서울,경기,충청권이고 많이쳐줘봤자 익산까지이며
      그 밑 전라도는 백제인의 정체성과 다른 지역입니다
      정작 충청도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유독 전라도 사람들이 백제인 빙의해서 자부심 느끼는거 보면 너무 웃기길래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 @scap4437
      @scap4437 3 роки тому

      @@학종이-t1v 현대에 와서 날조된거지 뭔 기록이 있어요 있기는 ㅋㅋ
      330년 기록은 신라본기 에 "벽골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고
      또한 790년 신라본기 에 "벽골제"를 증축하였다는 기록인데
      무슨 백제가 벽골제를 만들었다는 쌉소리를 하는건지? ㅋㅋㅋ
      일단 "벽골지"와 "벽골제"가 같은 것인지도 불분명 할 뿐더러 둘 다 신라가 만든 것이고
      이걸 현대에 와서 "백제의 기록이 신라의 기록으로 잘못들어간 것일것이다"

    • @김인직-m5y
      @김인직-m5y Рік тому

      ​@@scap4437 맞습니다. 한성백제는 안성천을 건너 목지국(천안)을 정복한 바 있고, 차령(천안논산고속국도)을 넘어 공주부터는 식민지라고 봐야합니다. 전라도는 마한과 침미다례국일 뿐입니다. 후에 규슈로 넘어가서 정착하고요. 사실 무령왕도 40세까진 일본에서 살았으니까요.

  • @eugenehwang808
    @eugenehwang808 3 роки тому +73

    한성백제 500년이 백제 전체 역사 중에 거의 70~80%나 차지하고 있는데
    공주, 부여 심지어 익산까지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데 비해
    한성백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 @코노맨
      @코노맨 2 роки тому +10

      더욱이 안타까운건 근현대사에 파괴된게 엄청많다는거죠

    • @iam_ch_ris
      @iam_ch_ris 2 роки тому +3

      @@코노맨 일제강점기와 6.25전쟁때 너무 많이 파괴된듯요

    • @독튜브-o3k
      @독튜브-o3k 2 роки тому +5

      백제 초기 도읍 한성이 풍납동이 아니니까요. 산동 인근 래주가 백제의 초기 발상지임.

    • @letme409
      @letme409 Рік тому

      밝혀진 유적이 너무 적어서 였겠지요. 백제문화유적지구에 추가로 포함되거나 별도 지정되는 날이 올 수도...

    • @Ronaldo-x1p5w
      @Ronaldo-x1p5w Рік тому +1

      파괴된게 아니라 토조차 없는거입니다.
      반도에는 오랫동안 공토였습니다.

  • @nanyoungkim444
    @nanyoungkim444 3 роки тому +137

    이런 프로그램은 계속 만들어져야 합니다. 쓸데없는 예능프로가 너무 많아요. 그나저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강남은 인기 만발이군,,

    • @scap4437
      @scap4437 3 роки тому +14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거 같아서 말씀드립니다만
      전라도는 백제가 아닙니다
      전라도는 6세기까지 독자세력을 유지하던 변두리 마한입니다
      동성왕 무령왕때에도 여러차례 전라도 정벌의 기록이 있으며
      백제 말기에 식민지 형태로 복속되었을뿐
      벡제인의 정체성은 한번도 가진적 없던 지역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왜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전라도에만 있다는것이 그 대표적 근거죠
      백제는 서울,경기,충청권이고 많이쳐줘봤자 익산까지이며
      그 밑 전라도는 백제인의 정체성과 다른 지역입니다
      정작 충청도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유독 전라도 사람들이 백제인 빙의해서 자부심 느끼는거 보면 너무 웃기길래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 @scap4437
      @scap4437 Рік тому +2

      @@YJ-- 변두리 마한이라 표현했지만 실상 전라도는 마한도 아니였죠
      전방후원분은 빼더라도 아파트식 고분 같은건 한반도에서 전라도 지역 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같은 문화권이 아니였다는 얘기죠
      다시한번 말하지만 전라도는 백제 말기에 식민지 형태로 복속 되었기 때문에 백제의 정체성은 가지지 못했어요 오히려 통일신라에 의해 직접 지배 당하고 문화를 받아들인거죠

    • @scap4437
      @scap4437 Рік тому

      @@YJ-- 삼국지 동이전

      >
      후한서
      이와 같이 마한 남쪽과 변진이 왜와 접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고 교차검증이 가능하므로 전라도 지역은 마한이 아니라 왜(倭)라고 보는게 더 타탕합니다
      이것은 고고학적 유물이 뒷받침 해주고 있죠

    • @busong-rz3sc
      @busong-rz3sc 10 місяців тому +2

      山东半岛的莱州是百济发祥地。

    • @busong-rz3sc
      @busong-rz3sc 10 місяців тому +1

      @@scap4437 백제의 발상지는 산둥반도 래주 근처에 있다.

  • @dms6325
    @dms6325 3 роки тому +46

    백제는 서울 및 수도권 개발과정에서 사라진 유물때문에 잊혀진 것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백제사를 그대로 묻어버렸다. 정말 슬픈 현실...

    • @denoir3583
      @denoir3583 3 роки тому +1

      슬프긴 한데 조상님들의 안목이 대단하셔서
      그 터가 오늘날에도 대도시로 이어지는..

  • @윤문희-p7q
    @윤문희-p7q 3 роки тому +12

    아~몰랐어요
    백제의수도 풍납토성이 위례성이었는지...

  • @dooyeopkim6896
    @dooyeopkim6896 3 роки тому +15

    백제 700년 역사에서 도읍지는 400년 넘게 한성.. 현재의 서울입니다

    • @독튜브-o3k
      @독튜브-o3k 2 роки тому +4

      漢水가 흐르는 곳이 漢城입니다. 漢水는 黃河의 지류입니다. 백제는 대륙에서 기원한 국가임

    • @soosoosoo1234
      @soosoosoo1234 Рік тому

      ​@@독튜브-o3kㅉㅉㅉ 가야나 제대로 설명해라

    • @FX-No1-captain
      @FX-No1-captain Рік тому +1

      서울이 아니라 백제의 도읍지는 대륙입니다.

    • @이타키온
      @이타키온 Рік тому

      설마
      토성위에 궁을 지었을까요?
      하남 하북은 황하를 얘기합니다
      우리는 강으로 쓰죠
      한강 낙동강 백마강 대동강

  • @honeeey2107
    @honeeey2107 3 роки тому +18

    하남도 위례 유물 꽤 많은데... 그냥 다 콘크리트 붓는대요 신고하면 공사 미뤄지니까
    하남 춘궁동도 백제 위례로 지목되는 곳인데 한번 다뤄주면 좋을거같요!

  • @freeman4823
    @freeman4823 3 роки тому +60

    백제가 망해서 유물이 없어서 그렇지...한반도 최고 알짜베기땅 서울을 중심으로 충청 전라도 곡창지대 알짜 땅을 차지한거 보면 고대 최대 강국임에 틀림 없음..

    • @kimiso855
      @kimiso855 3 роки тому +3

      서울 중심, 충청 전라가 아니라 서울중심에서 충청남도 지역 일부와 전라북도 지역 일부로 쫒겨간 것이죠. 게다가, 전라남도 전부와 전북 일부는 6세기 초까지도 백제가 아닌 다른 정권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많은 증거 또한 있습니다.

    • @몽구-w4o
      @몽구-w4o 3 роки тому +3

      @@kimiso855 다른세력이라면 아무래도 마한이겟죠 근초고왕 때에 그 아래 목지국과 마한까지 점령하엿다고 나오지만 사실 목지국은 점령지배 마한은 그냥 내정간섭 정도로만 여겨지는게 맞다고 봅니다.

    • @데롯-k6o
      @데롯-k6o 3 роки тому +1

      @@kimiso855 혹시 환빠세요?

    • @donotinvite
      @donotinvite 3 роки тому +1

      응 신라가 훨 잘 살아서 이긴거죠

    • @estebanchoi9176
      @estebanchoi9176 3 роки тому +1

      쥐죹만한나라에서 누가 우월하니 누가 앞서가니 이지랄하고있네.. ㅋㅋㅋㅋ어우 진짜 개토나온다

  • @박용훈-j8m
    @박용훈-j8m 2 роки тому +7

    연애인이라는 몰건들 놀아나는 방송보다 백배 더 나은 방송이다.

  • @이일강-l8s
    @이일강-l8s 4 роки тому +7

    삼한과 진나라晉 의 교역이 왕성했었다. 그 증거유물이 가장 많은 지역이 풍납토성이다. 이른바 신미제국의 위치이다.
    백제는 서너번 진나라와 교역했지만, 삼한(마한)은 수십회 진나라와 교역을 했었다.
    진나라와의 교역 증거품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이 풍납토성, 몽촌토성이다. 낙랑군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 낙랑군이라며 ?

  • @jjuhyung
    @jjuhyung 4 роки тому +68

    지금은 위례성을 찾고 발굴하고 싶어도 개발로 인해서 망가져서 찾기 힘들다던

    • @하이러너-s3r
      @하이러너-s3r 3 роки тому

      미화되지 않은 백제의 진짜 역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
      백제는 항상 왜의 군사지원을 받음
      광개토대왕비에는 유독 백제를 “ 백잔”이라 비하함
      고구려가 거란의 공격을 받을때 백제는 고구려의 뒷통수를 쳐서 공격함 393, 4, 5년
      백제 아신왕은 왜의 도움을 받아 숙부인 진사왕 뒤통수를 쳐서 죽이고 왕위에 오름 392년
      왕권 교체 구테타도 왜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
      백제 아신왕은 직접 광개토한테 무릎을 꿇고 "앞으로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 맹세함 396년
      또다시 뒤통수를 계획한 아신왕은 왜의 군사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태자 전지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냄 397년
      왜와 통교를 끊겠다고 무릎꿇고 서약했으나 또 뒤통수를 치고 왜를 끌여들임 399년
      왜를 끌여들여서 한 짓이 신라를 공격한것임 ㅋㅋ
      이때 또다시 고구려 뒤통수 칠 준비하자 백성들이 신라,왜로 도망가고 백제왕족 유즈키노키미 가 대인구를 이끌고 야마토로 망명 399년
      이때 왜국의 군사지원을 얻으려고 태자도 보내고 아직기,왕인도 보내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왜국을 키워줌 (6.25때 일본이 폭풍성장 한것처럼)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무릎 꿇고 맹세했던 백제는 또다시 고구려의 뒤통수를 침
      그것도 왜놈을 끌여들어 고구려를 또 침 404년
      심지어 고구려는 후연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백제 종특 뒤통수가 제대로 나온거임 404년
      백제 아신왕이 죽자 동생 훈해가 섭정을 했는데 막내동생이 뒤통수를 쳐서 형을 죽이고 왕이 됨 405년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왜에 볼모로 갔던 전지가 왜의 도움을 받아 삼촌을 뒤통수 쳐 죽이고 왕이 됨 405년
      또다시 왕권 교체 구테타를 왜의 도음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ㅋ
      이게 수백년에 걸친 사건이 아니라 단 10년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것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뒤로로 백제의 통수는 이루말할 수 없이 굉장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배신과 뒤통수의 심볼이 바로 "백제"임
      2탄
      왜놈을 끌여들여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비유왕) 고구려에 밀려 수세에 몰리자 염치없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함 ㅋㅋㅋㅋ
      그것도 비굴하게 3번이나 조공 갖다바치며 요청함 433년 7월, 434년 2,9월
      그 후 신라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여러번 도와줬지만 백제는 또 신라의 뒤통수를 침 (관산성전투 후술하겠음)
      백제 개로왕은 중국에 비참하게 구걸하면서 고구려 좀 쳐달라고 애걸복걸 함 472년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匹夫)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
      위 사실을 알게된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정벌에 나섬 475년
      성이 함락당하자 개로왕은 뒷구멍으로 도망쳤는데 백제인 배신자 재증걸루, 고이만년의 뒤통수에 참수당함 475년
      이때 먼저 도망간 백제 개로왕 동생 문주는 신라에 구원 요청을 하고 신라는 구원군 1만명을 보냄
      이때 백제 귀족 군사는 신라 지원군 보다 더 늦게 도착하는 뒤통수를 때림 ㅋㅋ
      백제 문주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비참하게 살아남음
      한국사 역사상 강제로 쫒겨서 수도를 옮긴건 백제가 유일함 ㅋㅋㅋ
      이때 또 골때리는건 한성 함락 이후 백제가 위기 상황을 겪을 때 일부 지방 세력은 사실상 독립하여 자체 국호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는 통수까지 침
      한성이 무너진 이후로 백제 왕권은 그야말로 좁밥이 되어 대성팔족의 뒤통수가 시작 됨
      결국 백제 문주왕도 백제 배신자의(좌평 해씨가문) 뒤통수로 죽임당함 477년
      문주왕이 죽자 아들인 심근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심근왕 세력인 진씨 가문과 해씨 가문이 서로 배신하며 뒤통수 쳐서 수천명의 군사가 죽음 ㅋㅋㅋ
      결국 심근왕도 3년만에 의문사로 죽음 (진씨 가문의 뒤통수로 추정함) 479년
      진씨 세력은 다음으로 동성왕을 지들 손으로 뽑음 479년
      왜를 끌여들여 계속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 염치없이 동성왕때에 또 비굴하게 신라에 사신을 보내 청혼을 요청함 493년
      신라왕은 자신의 여식을 보내지 않고 신하인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냄 ㅋㅋㅋ 493년
      동성왕은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결혼 함
      동성왕 또한 어김없이 백제 배신자 백가의 뒤통수에 의해 죽임당함 501년
      백제왕은 대부분이 배신자의 통수 통수 통수에 의해 죽었음 ㅋㅋㅋ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이 모두 뒤통수로 죽임을 당함
      21대 개로왕은 고구려 뒤통수 치다 백제인 배신자 고이만년에게 참수당하고
      26대 성왕은 신라 뒤통수 치다 참수당함
      이후 27대 위덕왕, 태자 아좌, 28대 혜왕, 29대 법왕도 뒤통수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함
      백제는 정권 교체 자체가 곧 왕의 시해 즉, 뒤통수를 뜻하는거였음
      3탄도 기대하세요^^

    • @OYT0724
      @OYT0724 3 роки тому +1

      @@하이러너-s3r 백제가 마한이랑 수나라 배신 때렸던 것 빼먹으셨네요 ㅋㅋㅋ

    • @명냥이-x7i
      @명냥이-x7i 3 роки тому

      @@OYT0724 ㅂ1ㅅ

  • @wjg-ri9rn
    @wjg-ri9rn 4 роки тому +63

    서울이 백제 최초 수도이자 500년간 백제 수도 였다는건 상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사람이 많을까요? 천년 이상 지난 우리 역사가 왜 현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훼손되어야 하는지 이해도 안되고 안타깝네요. 중국이나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역사왜곡을 일삼는 상황에서 한국 역사를 명확히 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 @도요다다이쥬-x9h
      @도요다다이쥬-x9h 4 роки тому +8

      집값이문제가아니라 풍납토성은 왕성터가아닙니다. 풍납동 반반크기가무슨 왕터라는건지. 거기다가 여름이면맨날 홍수나는동네. 왕터라면나올 유적도 없어요.

    • @aerodynamic757
      @aerodynamic757 3 роки тому +6

      @@도요다다이쥬-x9h 신라의 법궁이었던 경주 월성보다 풍납토성이 더 큰데 크기 타령은... 그리고 유물 엄청나게 많이 나왔습니다

    • @도요다다이쥬-x9h
      @도요다다이쥬-x9h 3 роки тому +4

      @@aerodynamic757 월성이 그게 그냥 그크기인줄아네 ㅋㅋㅋ 그래 유물뭐나왔는데요? 왕관이라도 나왔어요?

    • @aerodynamic757
      @aerodynamic757 3 роки тому +8

      @@도요다다이쥬-x9h 물론 백제의 위례성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크기로 봤을 때 가장 유력한 곳은 서울 풍납토성입니다 발견된 유물과 유구의 수도 후보군들 중 최고 수준이고... 그리고 왕관은 주로 왕릉에서 나오죠 경주 월성에서도 왕관은 안 나왔어요

    • @도요다다이쥬-x9h
      @도요다다이쥬-x9h 3 роки тому +5

      @@aerodynamic757 그러니까 그 대단하다라는 최고수준의유물이 뭐나왓냐니까 계속 뭔소리람. 왕관나왔냐고 비꼬는것도 모르고..
      풍납이 어떤동네인지 알기나하나 모르겟네. 주변에 조그마한 산도없는 저지대고 여름엔 멀리 거마산에서 흘러오는물과 바로붙어있는 한강떄문에 맨날 큰홍수나고 겨울엔 사방이 평지에 바람엄청들어와서 춥고 그런동네에 참 잘도 왕성지었겠네요. 많게는 일년에 세네번씩 맨날 왕궁잠기는동네에?
      풍납토성은 일본애들이 백제깍아내릴려고 왕성이라 정한거구요. 좀 제대로알고 말을하던지해요.

  • @aligoyim3983
    @aligoyim3983 4 роки тому +49

    인천 문학산에서 온조의 형인 비류왕자가 세웠던 문학산성도 역사스페셜로 다루어주었으면 합니다 백제시조였던 온조대왕의 형인 비류왕자가 비운의 자결하는바람에 동생인 온조가 지금의 백제시조가 된사실과 실제로 백제의 도읍지로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이란곳의 문학산성이 백제건국의 시초였단 사실을 알고싶습니다

    • @독튜브-o3k
      @독튜브-o3k 2 роки тому +1

      인천은 미추홀이 아니네요. 백제는 중원 대륙 산동반도 인근 래이의 터전에 자리잡고 성장한 국가임. 지명 지형도 인천은 하나도 안 맞음

    • @정근도-x6e
      @정근도-x6e 2 роки тому +1

      고마 = 고구려 보장왕 아들 무사시노 668년 도시건설
      약광왕 고구려🤴 마지막 왕자 😍 1799명 도래인
      백제국 = 구다라 백제의 아버지 👨오월 십육일 기념일 👨
      748년 약광왕 사망 24개 사찰 있었던 고마산山
      미후네 축제 🎶 = 곤게마루 배위에서 노래 🎵

  • @토란-t1g
    @토란-t1g Рік тому +3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는 증거는 1도 없다,,,,,애초에 토성이 왕성이라는 어이없는 조작질,,,,ㄹㄹㄹ

  • @tv_patience8927
    @tv_patience8927 3 роки тому +21

    지금도 풍납토성 주변은 주택 매입해서 발굴조사 하고 있음...... 전 풍납토성 근처에 일하고 있는 사람임.ㅋ

    • @tsf0077
      @tsf0077 2 роки тому +1

      잘났어 정말. 고두심.

  • @Kimtiger0
    @Kimtiger0 4 роки тому +36

    절대 복원불가한 토성;;;;;;ㅜㅡ

    • @saljook
      @saljook 4 роки тому

      김호랑이님이 힘을 써 주신다면...

    • @하이러너-s3r
      @하이러너-s3r 3 роки тому

      미화되지 않은 백제의 진짜 역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
      백제는 항상 왜의 군사지원을 받음
      광개토대왕비에는 유독 백제를 “ 백잔”이라 비하함
      고구려가 거란의 공격을 받을때 백제는 고구려의 뒷통수를 쳐서 공격함 393, 4, 5년
      백제 아신왕은 왜의 도움을 받아 숙부인 진사왕 뒤통수를 쳐서 죽이고 왕위에 오름 392년
      왕권 교체 구테타도 왜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
      백제 아신왕은 직접 광개토한테 무릎을 꿇고 "앞으로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 맹세함 396년
      또다시 뒤통수를 계획한 아신왕은 왜의 군사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태자 전지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냄 397년
      왜와 통교를 끊겠다고 무릎꿇고 서약했으나 또 뒤통수를 치고 왜를 끌여들임 399년
      왜를 끌여들여서 한 짓이 신라를 공격한것임 ㅋㅋ
      이때 또다시 고구려 뒤통수 칠 준비하자 백성들이 신라,왜로 도망가고 백제왕족 유즈키노키미 가 대인구를 이끌고 야마토로 망명 399년
      이때 왜국의 군사지원을 얻으려고 태자도 보내고 아직기,왕인도 보내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왜국을 키워줌 (6.25때 일본이 폭풍성장 한것처럼)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무릎 꿇고 맹세했던 백제는 또다시 고구려의 뒤통수를 침
      그것도 왜놈을 끌여들어 고구려를 또 침 404년
      심지어 고구려는 후연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백제 종특 뒤통수가 제대로 나온거임 404년
      백제 아신왕이 죽자 동생 훈해가 섭정을 했는데 막내동생이 뒤통수를 쳐서 형을 죽이고 왕이 됨 405년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왜에 볼모로 갔던 전지가 왜의 도움을 받아 삼촌을 뒤통수 쳐 죽이고 왕이 됨 405년
      또다시 왕권 교체 구테타를 왜의 도음을 받았다는 말임 ㅋㅋㅋ
      이게 수백년에 걸친 사건이 아니라 단 10년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것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뒤로로 백제의 통수는 이루말할 수 없이 굉장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배신과 뒤통수의 심볼이 바로 "백제"임
      2탄
      왜놈을 끌여들여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비유왕) 고구려에 밀려 수세에 몰리자 염치없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함 ㅋㅋㅋㅋ
      그것도 비굴하게 3번이나 조공 갖다바치며 요청함 433년 7월, 434년 2,9월
      그 후 신라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여러번 도와줬지만 백제는 또 신라의 뒤통수를 침 (관산성전투 후술하겠음)
      백제 개로왕은 중국에 비참하게 구걸하면서 고구려 좀 쳐달라고 애걸복걸 함 472년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匹夫)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
      위 사실을 알게된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정벌에 나섬 475년
      성이 함락당하자 개로왕은 뒷구멍으로 도망쳤는데 백제인 배신자 재증걸루, 고이만년의 뒤통수에 참수당함 475년
      이때 먼저 도망간 백제 개로왕 동생 문주는 신라에 구원 요청을 하고 신라는 구원군 1만명을 보냄
      이때 백제 귀족 군사는 신라 지원군 보다 더 늦게 도착하는 뒤통수를 때림 ㅋㅋ
      백제 문주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비참하게 살아남음
      한국사 역사상 강제로 쫒겨서 수도를 옮긴건 백제가 유일함 ㅋㅋㅋ
      이때 또 골때리는건 한성 함락 이후 백제가 위기 상황을 겪을 때 일부 지방 세력은 사실상 독립하여 자체 국호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는 통수까지 침
      한성이 무너진 이후로 백제 왕권은 그야말로 좁밥이 되어 대성팔족의 뒤통수가 시작 됨
      결국 백제 문주왕도 백제 배신자의(좌평 해씨가문) 뒤통수로 죽임당함 477년
      문주왕이 죽자 아들인 심근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심근왕 세력인 진씨 가문과 해씨 가문이 서로 배신하며 뒤통수 쳐서 수천명의 군사가 죽음 ㅋㅋㅋ
      결국 심근왕도 3년만에 의문사로 죽음 (진씨 가문의 뒤통수로 추정함) 479년
      진씨 세력은 다음으로 동성왕을 지들 손으로 뽑음 479년
      왜를 끌여들여 계속 신라의 뒤통수를 쳤던 백제는 염치없이 동성왕때에 또 비굴하게 신라에 사신을 보내 청혼을 요청함 493년
      신라왕은 자신의 여식을 보내지 않고 신하인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냄 ㅋㅋㅋ 493년
      동성왕은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결혼 함
      동성왕 또한 어김없이 백제 배신자 백가의 뒤통수에 의해 죽임당함 501년
      백제왕은 대부분이 배신자의 통수 통수 통수에 의해 죽었음 ㅋㅋㅋ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이 모두 뒤통수로 죽임을 당함
      21대 개로왕은 고구려 뒤통수 치다 백제인 배신자 고이만년에게 참수당하고
      26대 성왕은 신라 뒤통수 치다 참수당함
      이후 27대 위덕왕, 태자 아좌, 28대 혜왕, 29대 법왕도 뒤통수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함
      백제는 정권 교체 자체가 곧 왕의 시해 즉, 뒤통수를 뜻하는거였음
      3탄도 기대하세요^^

    • @두두-k7o
      @두두-k7o 3 роки тому

      @@하이러너-s3r 소설을써라

    • @하이러너-s3r
      @하이러너-s3r 3 роки тому +1

      @@두두-k7o 팩트가 좀 아프냐?
      소설이라 믿고 싶을만큼 부정하고 싶어? ㅋㅋ

    • @두두-k7o
      @두두-k7o 3 роки тому

      @@하이러너-s3r 굳이..? 3탄이나 얼른 올리삼

  • @annyoo3541
    @annyoo3541 Рік тому +4

    이게 풍납토성 규모가 도성으로서는 지나치게 작기에 벌어진 현상입니다. 면적이 18만 평으로 백제 웅진 도성 면적인 200만 평과 비교하면 턱없이 작습니다. 같은 시기 고구리 평양의 장안성은 358만 평, 신라 왕경은 484만 평~700만 평입니다.
    심지어 웅진 도성이 임시 도성이므로 정상적인 도성인 하남위례성은 웅진 도성보다 훨씬 커야 마땅합니다.
    당시 주변국과 비교해도 중국의 장안성은 2500만 평이고, 낙양성은 1589만 평, 일본의 나라 지역에 있는 후지와라 경이 240만 평, 헤이죠오 경이 880만 평, 헤이안 경이 700만 평.

    • @soosoosoo1234
      @soosoosoo1234 Рік тому

      토성주위는 왜 안침? 영상봄? 목조유물

    • @이타키온
      @이타키온 Рік тому +2

      도대체 토성으로
      왕성을 짓는다는 발상은
      누가 하는거요?
      고구리 국내성을 보시오
      서울이든 하남이든
      백제왕릉이 하나라도 발견됐나요?

  • @joncert4844
    @joncert4844 2 роки тому +2

    저게 백제것이 맞을까?
    유독 우리나라에 백제 유물이 적은건 백제가 다른곳에 잇엇기
    때문임

  • @HR-wk8ij
    @HR-wk8ij 2 роки тому +2

    아무것도 안하고 방치하는 느낌인데..뭘 발굴하고 있다는건지..

  • @냐냐냐냐-u6n
    @냐냐냐냐-u6n 4 роки тому +85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부여, 익산(정식 천도는 안했지만)엔 국립박물관이 있는데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던 한성엔 국립박물관이 없는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한성백제기 유물들... 한성백제박물관에 소장한 유물들이 더 많아질 날을 기대합니다.

    • @둔내터널
      @둔내터널 3 роки тому +9

      서울에는 용산 이촌동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지 않습니까.. 국립 아닌 시립이지만 올림픽공원 내에 몽촌역사관도 있고.. 게다가 워낙 출토된 한성백제기 유물이 적은데다 한성백제 위치가 풍납토성인지 하남 춘궁리 이성산성인지 여전히 확실치 않은 상황인지라..(물론 풍납토성임이 90% 밝혀진 상황입니다만)

    • @조관제-c8l
      @조관제-c8l 2 роки тому +2

      풍납토성주변엔 건축허가지역인데 왜? 경주는 문화재보호법의 규제로 건축할수없는 지역의범위가 엄청 많습니다. 경사유재산권복원추진위원회장 조관제

    • @hongpund
      @hongpund 2 роки тому

      백제유물은 중국에 가면 수두룩하다 1980년 도시화가 되면서 비석 능 모조리 파헤치고 묻어버렸어 계백이 싸운 황산벌이

    • @hongpund
      @hongpund 2 роки тому +1

      중국고대지도에 표기되고 있는건 모르겠지?

    • @joncert4844
      @joncert4844 2 роки тому +2

      백제수도가 아니엇으니까
      한강 한성 대륙에 다 있음

  • @이명숙-x4f5m
    @이명숙-x4f5m 2 роки тому +4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에 풍납토성이 만들어졌으면 ...배웠던것보다 최소 1~2세기는 빠른데?

  • @김석우-c4e
    @김석우-c4e 3 роки тому +4

    풍납토성 이름을 위례성으로 바꾸는게 맞는것이 아닌가요?타당한것 같은데 여러가지로....

  • @mvp0891
    @mvp0891 2 роки тому +2

    너무 오바하는거 아닐까..? 우물정자 저 토기 그냥 우물에서 물떠오던 그릇아님...?;;; 뭐가 그리 심오해

  • @손원식-d4n
    @손원식-d4n 3 роки тому +7

    소식 감사합니다~ 역사를 모르면 나라가망한다 ~^^

  • @dinhomomo
    @dinhomomo 4 роки тому +24

    저 토성 안쪽에 있던 우일 아파트에 살았었어요. 그땐 저 토성 위에 길을 뛰어다녔는데.

    • @saljook
      @saljook 4 роки тому +2

      금관 주세요...

  • @안치문-x9x
    @안치문-x9x 2 роки тому +13

    참나무 우물벽 아래 우물바닥도 조사해봐야 합니다
    그시대 우물이나 연못엔 보존이 잘된 유물이 분명 나올겄입니다.

  • @굿인싸이트
    @굿인싸이트 Рік тому +4

    석성도 아니고 토성을 쌓다는게 말이도나? 백제 200개성은 어딨냐? 역사 쓰레기들

    • @PrettyT-rex
      @PrettyT-rex Рік тому +1

      말이 왜안됨?? 200개 성은 한반도 내에 있겠죠^^

    • @굿인싸이트
      @굿인싸이트 Рік тому +1

      @@PrettyT-rex 토성은 청동기 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는 석성.
      중국에 수 많은 고구려성들 전부 석성인데 백제만 토성이라고?

  • @미로-s9l
    @미로-s9l 3 роки тому +2

    헌집은뜯고새로지으면서.별.중요하지도않는.옛것이나오면.온갖명분갖다붙여서.재한한다.참.지나친것도많다.실물을.컴퓨터에.담아두고.개발해야된다.

  • @김환희-j9y
    @김환희-j9y 3 роки тому +3

    근데 토성은 성가퀴같은게 있나? 그냥 언덕같아보임.. 윗부분은 어떻게 다듬었는지 궁금하다

  • @임태우-q7v
    @임태우-q7v 3 роки тому +18

    백제의 역사시기중 제일 길었던 시기가 한성백제이다.

    • @大신라혼
      @大신라혼 3 роки тому

      황해도시대가 제일 길었음

  • @악동미키군
    @악동미키군 2 роки тому +2

    여기 70년대부터 도기 기와 많이 나와서 그걸로 소꿉놀이하고 그랫어요 근처에 널렷엇음 알고도 건물 지은거임

  • @봉휘전
    @봉휘전 2 роки тому +1

    고려위례ㅔ성이다.우리여기남한하여서.살아다요.물이한길대지요.한청이한성이다.왕이남한하다여기롱아서.직위하에다.논산도고려땅리다.잘알고하여다.토기몇접을가지고너백제넌공주아부여애기서우리조사님게서남한여서.백제을건립하다.53명.사라다고합니다.다사.우례성으로올라안다.요.

  • @geonwhicho669
    @geonwhicho669 4 роки тому +28

    풍납토성 이름을
    위례성으로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 @inkoansong5909
    @inkoansong5909 3 роки тому +11

    역사학계도 미련 곰팅한 것이 송파구 흙둑 모양을 보고 한번 쯤 의심을 했어야지요. 토성이 아닐까하구요. 상상력의 중요성을 간과하셨어요.

  • @종철김-d3f
    @종철김-d3f 2 роки тому +1

    풍납동 토성은 정부차원에서
    문화재 재조사 해야 된다
    강건너 아차산 무엇이 있었는지?
    예전에 이지역은 강물이 범람했던 곳이다 그러데 이지역에 성이 있었다고
    문화재 청은 거짓으로 이지역을
    문화재 로 만들고 있다

  • @자담-v2b
    @자담-v2b 3 роки тому +4

    옛날에 서울을 한성이라고했는줄알았는데 강북이 서울이고 강남이 한성이였네요

  • @다큐쟁이
    @다큐쟁이 4 роки тому +22

    일반 대중들 중에는 ‘삼국사기’에 대해 사대주의적 사서라고 말하거나 또는 고조선의 역사를 기재하지 않아 고대사를 말살했다는 등의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조차 100%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4세기 정도는 되어야 고대국가의 체계를 갖추었다는 가정하에 그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불신하는 풍조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1997년 풍납토성에서 초기 백제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분위기는 바뀌게 됩니다. 특히 풍납토성 성벽에서 발굴된 목재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가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로 나오면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기원전후에 풍납토성과 같은 대규모 토성을 건설한 고대국가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지요.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 같아서는 풍납토성 내부를 지금이라도 당장 전면 발굴하면 어머어마한 결과가 나올 것 같지만,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서울의 현실을 볼 때 보상비 측면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결국 향후 조금씩 재건축을 할 때마다 흥미로운 발굴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다큐 재미있게 보시고, 제가 정리해 놓은 글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풍납토성, 백제사 최대의 미스터리를 푼다 :
    blog.naver.com/jungyoupkim/221159743911
    풍납토성, 지하 4미터의 비밀 : blog.naver.com/jungyoupkim/221154318088

    • @다큐쟁이
      @다큐쟁이 4 роки тому +1

      @@ariellerusty8251 네 맞습니다. 김부식은 사대주의자가 아닌 현실주의자였지요. 그러다보니 이쪽 끝에서 보면 사대주의자로 보였고, 저쪽 끝에서 보면 소설 같은 이야기를 썼다고 욕을 먹었습니다. 어찌 보면 합리적 중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숙명같아 안타깝습니다.

    • @Werner4voss
      @Werner4voss 4 роки тому +2

      정확하십니다.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웅천까지 이르렀다는 초기 백제의 강역을 축소해석하는 경우가 풍납토성의 본격적인 발굴전까지 정설이었는데 풍납토성의 연대와 소요 노동력을 계산하고서는 초기 백제의 역량을 더이상 과소평가하지 않게되었죠

    • @war.and.peace99
      @war.and.peace99 4 роки тому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삼국멸망 후 450여년 후 쓴 사기인데, 죽은 후 역사를 왜곡했다하여 아들과 함께 부관참시를 당하였음.
      부관참시 형벌은 관을 파내어 도끼로 아홉번을 내려 찍는 것인데, 살아있는 동조자를 협박하는 것임.

    • @도요다다이쥬-x9h
      @도요다다이쥬-x9h 4 роки тому

      박정희탓하는 멍텅구리가 있지를 않나 ㅋㅋ 별...
      풍납토성은 그냥 일본서기보고 특히 임나일본부때문에 일본학자들이 열등감으로 깍아내릴려고 정한겁니다. 초석도 몇개 안나오고 그냥 시골동네수준이었다 폄훼하는거죠. 그걸 멍청한 좌빨들이 친일사학자라 죽으나꺠나 욕해대는 이병도가 삼국사기 기록을 바탕으로 하남을 위례성이라했죠. 하남교산만 가도 초석같은게 수백개가 그냥 지표면에 뒹굴어다닙니다. 장독대 빨랫대하고있죠. 산다니다가 밟히는게 백제 신라기왓장이고...
      여기다가 또 3기신도시 아파트 짓는다하고있고 참....그냥 구리토평쪽에나 하면될걸

    • @doggeshiba276
      @doggeshiba276 Рік тому +1

      그거 초축시기 토성에 혼입된 토기편의 연대차이가 600년이나 차이나서 초축시기로 볼 수 없고 같이 혼입된 나무나 목탄의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결과 AD 3세기까지밖에 못 올라간다고 밝혀진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 @申衡燮
    @申衡燮 2 роки тому +1

    한성백제가 지금의 서울, 하남이라고 ? 하남의 하자가 역사에서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자가 어찌 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는가 ?

  • @goaorn
    @goaorn 4 роки тому +16

    석촌고분 몽촌토성 풍납토성 그일대가 다 백제유적터죠

  • @장진호-g9z
    @장진호-g9z 2 роки тому +2

    하남 위례성 편에서 제기한 내용이 더 사실에 부합하는 것 같아요

  • @DokdoHanbokKimchiDaemadoKOREA
    @DokdoHanbokKimchiDaemadoKOREA Рік тому +1

    중국에서 발해, 고구려에 이어 백제도 중국 역사에 편입시켰습니다

  • @뽀리깡-c1x
    @뽀리깡-c1x 3 роки тому +40

    근데 진짜 천호동 아산병원쪽 가보면 풍납토성이 보기보다 결코 작지않다는걸 알수있음... 지금도 성벽이 남아있는데 은근히 높음...

    • @엄준식엄-k1c
      @엄준식엄-k1c 3 роки тому +5

      아파트 5층 높이이니 옛날엔 더 높았을 듯요

    • @ykpark5289
      @ykpark5289 3 роки тому +2

      당시에는 지금보다 두배 높았다더라구요

    • @Noname-ey6qe
      @Noname-ey6qe 3 роки тому

      @@ykpark5289 ㄷㄷ..

  • @victor45815
    @victor45815 4 роки тому +6

    오늘 밤 수면제로 딱이군 있다 먹어야지~~~ ㅋㅋ

    • @MichaelMoon2001
      @MichaelMoon2001 4 роки тому +1

      약 드실시간입니다 ^^
      (당일 오후10시)

  • @전투불패
    @전투불패 2 роки тому +1

    삼국사기의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나왔는데...주XX 교수는 뭐라할건가?
    아직도 삼국지 위지동이전이 맞다고 할건가?

  • @고양e-v3x
    @고양e-v3x 4 роки тому +17

    그동안 추가적으로 발견된 유물,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도 있을건데~ 15년 지난것좀 올리지말고 새 프로 만들어서 업데이트좀 해라.

  • @봉림리
    @봉림리 4 роки тому +11

    그 중요한 위례성을 드디어 장수왕이 침공하게 되는 것이었군요....
    좋은영상.👍

  • @김석우-c4e
    @김석우-c4e 3 роки тому +2

    우리의 피같은 문화재아닌가?누구탓할것없이 제발 신경좀쓰자,,,
    '

  • @架け橋-p9h
    @架け橋-p9h 4 роки тому +13

    상일동발굴 요망 어릴적얓 은산들이
    많았는데요 밟히는데 기와장이요
    토기조각들이었읍니다
    풍납토성은 아이들놀이터!!!!
    쥐불놀이를 전쟁놀이를
    그때도 어른들은 옛날 성벽이라전해들었고 왜이제서야 알수밝에 없었는지 그게더 궁금함!!!???

    • @v이너프미네랄스
      @v이너프미네랄스 4 роки тому +5

      일제때 이미 석촌동이 백제왕릉 유적지라는건 다 알고있었음
      조사까지 마쳤고
      제2의 경주가 될 수 있었는데 산업화ㆍ도시화한다고 싹 다 밀어버림
      역사를 잊은 민족

    • @Noname-ey6qe
      @Noname-ey6qe 3 роки тому

      세상에..

  • @진실은항상살어있잘챙
    @진실은항상살어있잘챙 2 роки тому +1

    풍납토성한삼십년전에걸어다녓는데지금은

  • @고근초
    @고근초 3 роки тому +2

    저런곳에 아파트 짓고 지하철 공사하면서 마니 파괴됐겠구나

  • @neoper8074
    @neoper8074 2 роки тому +1

    우물은 지진시에 물높이를 보기위해 있었을듯, 그래서 항아리에 "#" 넣은듯,,,지진이 무척 많았을듯, 항아리에 동전모양은 지금 UN마크처럼 국제원조가 있었을듯,,,축성은 수백년간 했을듯, 나이테를 이용한 탄소연대측정하면 정확한 연도가 나온다.

  • @1982카론
    @1982카론 Рік тому +1

    과연 백제라는 나라가 왕성을 토성으로 지었을까!? 처음엔 토성이었으나 고구려, 신라와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석성으로 개축을 했을꺼 같은데...

  • @letme409
    @letme409 Рік тому +7

    삼국사기가 12세기 초에 기록됐어도 저리 정화한 기록이다니...

  • @우림-m4g
    @우림-m4g 2 роки тому +1

    이정도면 그냥 기존 아파트 주민들 빨리 내보내야 하는거 아닌가:; 도굴될까 무섭네

  • @심쿵두루
    @심쿵두루 2 роки тому +1

    이런거 보면 계속 드는 생각이....
    전국적으로 아파트 단지 밑에 깔린 유물들이 얼마나 많을까 ㅠ ㅠ

  • @갓래
    @갓래 2 роки тому +1

    49분 10초 4겹의 점토를 덧댔다고 했는데.. 영상은 3겹인데?

  • @End_Do_
    @End_Do_ Рік тому +1

    백제가 700년.. 고대 최고로 번성했고 일본에 문화도 전파하고.. 동북아 문화의 뿌리 역할을 할만큼 번성했는데.. 왜 때문인지 누군가들이 사실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네.. 한성백제야말로 후손들에게 남긴 조상님들의 숙제 아닐까? 쓰레기 졷선을 극복했으면 좋겠네..

  • @피그미-r5u
    @피그미-r5u 4 роки тому +15

    지금잠실역부근이 풍납토성이죠...? 광진구쪽 땅파면 보물 엄청많을듯

    • @황현용-s6h
      @황현용-s6h 4 роки тому

      천호 사거리.풍납동 주변이 풍납 토성입니다.전 그 곳에서 근 20년 살았었네요.유물 나온 경당 연립 바로 앞에서도 살았었네요.^^

    • @미소천사-v5j
      @미소천사-v5j 4 роки тому +1

      풍납동 해모르아파트지을때
      우물터 나왔는데 덮고 지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풍납동 살때 소문이 많았습니다

    • @미소천사-v5j
      @미소천사-v5j 4 роки тому +1

      풍납동 살던사람들 집지어려다
      유물나와서 못짓고 보상금도
      얼마 못받고 억울한사람 많던데
      지금은 많이주나보네

    • @johnk2149
      @johnk2149 4 роки тому

      한강유역에 백제 유물은 안나옵니다..이상하죠 500년이나 있었는데

    • @MA-it1oh
      @MA-it1oh 4 роки тому +2

      @@johnk2149 거의 파괴되고 소실되었다봐도 무방하죠.아무래도 한강유역이란 것도 크고 ..서울이다보니..경주급으로 도시전체가 문화재덩어리였으나 강남.잠실개발당시 나오는족족 폐기해버렸을겁니다. 그리고 왕릉같은 건 이미 그 옛날 고구려가 다시강성해지고 한성지역을 백제로부터 뺏었을 당시 그러니까 광개토.장수왕 당시에 거의다 파헤쳐버렸을겁니다. 고국원왕때 백제에 당한게..너무많아서 눈깔뒤집힌고구려가...그이후에도 한성지역자체가 통일신라~고려~조선을 거치며 경주처럼 지방도 아니고 주요거점지역이였기에 지층에 묻힌다한들 드러나는 왕릉들은 모두유실되었다 보심됩니다 무령왕릉처럼 지방 부여에 야산자락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죠

  • @카파-w4k
    @카파-w4k Рік тому +1

    건물 초석도 바닥재도 돌을 깎아서 했는데 성벽이 토성이라고??? 이걸 믿으라고???

  • @Riro-v8k
    @Riro-v8k Рік тому +5

    700년간 이어진 백제가 제대로된 왕궁터도 왕릉도 남아있지 않다는게 말이되나? 특히 우산국이 있었다는 울릉도는 더욱 그렇다

  • @たま-n3p3k
    @たま-n3p3k 3 роки тому +4

    감사합니다

  • @Ronaldo-x1p5w
    @Ronaldo-x1p5w 2 роки тому +1

    과연 백제의 유산일까

  • @수빈김-m7o
    @수빈김-m7o 3 роки тому +2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인데 백제의 두 무대는 서울임 충청도가 아니라

    • @백마VICTORY
      @백마VICTORY 3 роки тому

      서울이나 경기도나 충청이나 백제영토다. 서울수도일때 지방세력중 가장큰세력이 공주였드랬죠. 수도가 서울 제2도시가.공주

  • @sych7567
    @sych7567 2 роки тому +1

    풍납동 주민들은 이영상을 싫어합니다

  • @uoyk7318
    @uoyk7318 Рік тому +1

    백제 묻어버렸네. ㅋㅋㅋ

  • @큐텐-t5u
    @큐텐-t5u 6 місяців тому +1

    벌써 20년전 영상이네

  • @zin1398
    @zin1398 3 роки тому +8

    왕궁터는 못찾을듯. 우리집이 바로옆 아파트인데 근처에서 제사터 삭자재창고 등이 발견되는거보면 여기가 왕궁터일 가능성이 높지만 지하2층까지 주차장 만들어서 이미 전부 사라졌을거같음

  • @OYT0724
    @OYT0724 3 роки тому +2

    갑자기 백제 건국기에 의문점들이 생각나서 적어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봄 (음력) 2월, 경성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같은 해]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61세였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고조선과 삼한족의 문화에서는 여성 무당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래 백제에서도 소서노의 아들들이 지도자들이 아니라 소서노가 첫 왕이었다고 추측됩니다. 제사를 지낼때도 국모라고 추앙을 받았다고 해요.
    두 아들 중 첫째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하려다 실패해서 자살하고, 백성들은 온조의 위례성에 흡수되어 백제가 성장했는데, 백제는 초창기때부터 말갈족의 지속적인 침입에 계속해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거기다 지속되는 백제의 팽창에 낙랑도 우호관계를 끊고 전쟁을 선포하죠.
    특히나 온조왕 13년에는 지속적으로 낙랑과 말갈이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위기였던 시절에 수도에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오더니,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러더니 같은해 천도하자고 말이 나오고: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註 001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註 002 형세가 스스로 편안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註 003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실제 같은해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를 함:
    〔13년(B.C.6)〕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들을 옮겼다.註 001
    〔13년(B.C. 6)〕 9월에 성과 대궐을 쌓았다.
    갑자기 수도를 옮기자는 말이 나오고, 같은해에 뚝딱 옮겨버리고, 말갈과 낙랑이 계속해서 공격을 해왔었고, 다섯 호랑이가 궁에 들어왔다는 기록으로 짐작해 볼때, 다섯 장군이 이끄는 적군에게 백제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었던 소서노가 죽임을 당했다고 추측이 됩니다.
    늙은 할미왕 소서노에서 그녀의 남자 아들 온조로 왕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네요. 요망한 징조라고 표현하고 국모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은 백제쪽 기록에서 자신들이 크게 패배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묘사한 것 처럼 보입니다.
    낙랑군은 그 뒤에도 또 쳐들어와 백제의 수도를 불태웁니다:
    17년(B.C. 2) 봄에 낙랑이 쳐들어와서 위례성(慰禮城)을 불태웠다.
    〔17년(B.C. 2)〕 여름 4월에 사당을 세우고 국모(國母)에게 제사를 지냈다.註 001
    같은 해에 국모가 돌아가신지 4년 뒤에 국모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나오네요. 이걸 보더라도 백제인들 스스로는 소서노를 왕으로 여겼다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를 지필했던 김부식이 중국사대주의가 강했던 사람이라 여성왕을 인정하지 않아서 소서노를 왕으로 부르지 않았던 것 같네요.
    17년 위례성이 불탄 뒤 백제는 이후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점점 힘을 회복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한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노력을 많이 보였습니다:
    18년(B.C.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註 001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馬韓)에 보내고,註 002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그러다 또다시 백제가 빨리 팽창을 하며 주변국과 마찰을 빛기 시작합니다. 말갈, 낙랑에 이어 마한까지 적으로 돌려버리면 답이 없기에 마한의 요구에 임시적으로 나마 수긍을 했던 것 같습니다.:
    24년(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註 001을 세우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註 002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허나 백제의 속마음은 여전히 전쟁 의도가 있었던 것 같네요. 이때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하는데, 당시 마한 지역은 몇십국으로 나눠져 있었기에 백제가 그중 주축국을 점령했었을 거라는 전문가들의 추측입니다:
    25년(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고, 한성(漢城)註 001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자(日者)註 002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께서 우뚝 일어날 조짐이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한(辰韓)註 003과 마한(馬韓)을 병탄할 마음을 가졌다.
    26년(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마한이〕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脣亡齒寒]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26년(8)〕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을 간다고 말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그 국읍(國邑)註 001을 병합하였다.註 002 오직 원산성(圓山城)註 003과 금현성(錦峴城)註 004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27년(9) 여름 4월에 두 성[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이 항복하였다.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註 001
    [註 001] 『진서(晉書)』 권97 마한전에는 태희(太熙) 원년(290)에도 마한이 서진(西晉)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온조왕 27년조의 기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 백제에 의한 마한의 멸망이 온조왕대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때 백제에 멸망당한 마한의 실체에 대해서는 당시 마한의 맹주국인 목지국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목지국은 위나라 정시(正始) 6~7년(245~246)에 일어난 한(韓)과 대방군과의 전쟁에서 한이 패배하여 위상이 약화되었는데, 이 틈을 타 백제국의 고이왕이 목지국을 멸망시킨 것이므로, 그 시기는 3세기 중엽경에 해당된다고 보았다(盧重國, 85~94쪽; 李基東, 1990).

    • @OYT0724
      @OYT0724 3 роки тому

      여기서 백제에 대한 또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백제의 처음 도읍이 한강지역이 아니라 북한 평양시, 아니면 더 위쪽 압록강 지역의 신의주시 또는 요하강의 랴오닝시가 아니었냐는 의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초기 백제 유물들을 찾기 힘들다는 것 또한 백제 도읍들이 지금 죄다 북한쪽 또는 중국에 있기에 그런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구요.
      지금도 백제 위례성이 어디에 있었냐에 대해서는 한국 학계에서는 명확히 단정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풍납토성이 위례성이었다는 가설이 신빙성이 있지만, 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냥 단순한 방어성이었는지, 수도였는지, 어느때 만들어 졌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기원전 6년 온조왕은 수도를 옮길 계획을 이야기할 때 도읍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한수의 남쪽으로 옮기겠다는 말을 합니다. 물론 이때 한수가 지금의 한강을 뜻하는지, 아니면 다른 강을 뜻하는지는 아직 제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대동강일 수도 있고, 압록강일 수도 있고, 어떤 학자들은 요하강일 수도 있다고 하지요.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註 001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註 002 형세가 스스로 편안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註 003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한수의 남쪽으로 가야하겠다는 말은 현재 도읍 위치가 그보다 더 북쪽에 있다는 뜻인데, 적을 피해서 도망가는데 한강 북쪽에서 한강 남쪽으로 찔끔 옮긴걸 보고 도읍을 옮겼다고 표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김부식을 포함한 고려,조선시대 학자들은 낙랑군을 오늘날 평양일대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백제가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온조왕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는 말을 따라본다면 평양지역 동쪽 어딘가에 낙랑이 있으려면 백제는 황해 한가운데 있거나, 북한 대동강 서쪽 남포군이나 남쪽 강남읍 지역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만주평야에서 활동하던 말갈족이 북쪽에서 침입을 해왔다는게 제대로 말은 되지만 백제가 낙랑 바로 옆에 처음부터 개국을 했었을 있었을 리가 있을까 의심이 들지요. 더군다나 백제 도읍지가 대동강 서쪽이면 위례성보다 더 서쪽 바다 지역에 있었다고 알려진 미추홀은 갈데가 없습니다.
      백제의 초대 수도가 현대 서울 지역이었다면 동쪽 강원도 산맥 어딘가에 낙랑이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그 또한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또한 백제가 서울쪽에 있다고 하면 북에 있었다고 하는 말갈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낙랑이 평양에 있다 믿었던 학자들 논리로는 말갈이 낙랑 중심부를 지나가서 백제를 쳤다는 뜻이 됩니다. 낙랑이 자신들의 도시를 말갈군에게 열어 주었다고 믿기는 힘들죠.

    • @OYT0724
      @OYT0724 3 роки тому

      〔13년(B.C. 6)〕 8월에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遷都]을 알리고,註 001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註 002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註 003을 경계로 삼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註 004에 이르렀다.註 005
      〔14년(B.C. 5)〕 가을 7월에 한강(漢江) 서북쪽에 성을 쌓고,註 001한성(漢城)의 백성들을 〔그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가 원래 있던 도읍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오며 마한과 백제의 경계가 예전보다 물리적으로 더 가까워진 것이고, 그래서 마한에게 우리 도읍지 이동했어요~ 하면서 허락을 묻게 된 것이며, 후에 마한과 자주 직접적인 충돌이 쉽게 생겼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만약 백제가 요동지역에서 부터 시작해서 남하를 했다라면, 결국 마한 또한 생각보다 더 한반도 윗쪽까지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마한인들이 진한의 임금이 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니 한반도에서 마한이 가장 세력이 강했다는 것도 말이 되네요.
      고구려 대무신왕 기록과 후한 광무제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AD 37년에 낙랑국을 정복했다가 44년에 광무제가 낙랑을 회복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 언제 정복하고 다시 재정복 했는지 다른 기록들과 년도가 엇갈려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대충 이때 당시 낙랑이 멸망한 이후 주인이 몇번씩 바뀌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20년(37)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註 001
      27년(AD 44년) 가을 9월에 한나라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註 001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註 002
      그런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점은 이 지역에서 광무제가 낙랑을 정복할때 낙랑이 살수 이남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죠. 살수대첩 할때 그 살수인데, 이 살수 위치를 알면 낙랑 위치를 알 수 있죠. 살수대첩때 살수는 고구려 수도 평양 바로 옆의 강. 고대시대때 평양과 살수는 현재 북한의 청천강 근처라는 설과 요녕성 혼하라는 설 두가지인데, 요녕성 지역설이 더 신빙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할때 수나라는 여러 달 동안 요동성에서 부터 막혀서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고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직 요동성도 공략을 못한 수나라가 오골성을 (중국 단동시丹东市) 경유하여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직공해서 한판승을 내겠다는 전략을 썼었는데, 이때 살수가 현재 북한의 평양 옆 청천강이라는 건 말이 안됩니다.
      출처:
      문성재 교수 "고구려 살수는 청천강 아닌 요녕성 '혼하'". 2018년 3월 20일 중앙일보.
      수도를 직공하려 했던 수나라 수군이 북한 평양에 갈려는데 뭣하러 압록강에서 일찍 내려서 평안북도 북쪽부터 시작해서 청천강을 건너 평안남도 남쪽까지 그 먼 육지길을 걸어간단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배가 있으면 대동강 유역에 내려야죠. 그렇기에 살수가 북한 위치가 아니라 중국 요동성 위치여야 압록강에서 내려서 살수 (혼하, Hun river)를 건너 고구려 요동성의 뒤쪽을 공략하는 행동이 이치에 맞죠.
      또한 살수대첩떄 수나라 해군이 패수(浿水)를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다 하는데, 패수가 역시나 북한 대동강이라는 설과 중국 요하강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패수는 고조선때 중국과의 경계라고 나오는데, 사기 조선전에 의하면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지방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요동과 고조선과의 경계로 삼았다고 나옵니다. 요동지방에 요하강이 있으니 패수가 요하강이 맞죠.
      그래서 낙랑이 살수지역이면 낙랑의 서쪽에 백제가 있어야 함으로써 요하강쪽 지금 중국의 랴오양시가 됩니다. 북쪽에 말갈, 동쪽에 낙랑이 있다는 말이 딱 맞아 떨어지죠.
      또한 낙랑은 고구려와 후한 둘에게 차례로 점령을 당했으니 두 나라 국경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고구려는 아직 신생국이라 요동지역 내에서 낙랑군과 세력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 한나라는 낙랑을 한반도까지 내려가서 점령했다? 앞뒤가 안맞죠. 낙랑이 요동지역에 있다는게 상식적으로 맞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서노와 그녀의 추종세력이 졸본 출신이라고 기록되는데, 졸본과 졸본천은 현재 훈허나(Hun river) 타이쯔허(Taizi river) 근처 위치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역시나 요동 지역이구요. 여기에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이 졸본을 도읍지로 삼았다고 기록되고, 제왕운기 백제기에서는 소서노와 두 아들은 유리왕자가 태자로 책봉된 이후 남쪽으로 떠났다고 전해지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 (卒本川)註 043에 이르렀다.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註 044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주몽은〕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註 045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생략)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註 048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생략)
      그 땅이 말갈註 052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결론은 백제의 처음과 두번째 도읍부가 요동지역 또는 북한지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에 백제 유물이 많이 없는 것이구요.

    • @OYT0724
      @OYT0724 3 роки тому

      삼국사기 백제본기 분서왕 기록에도 낙랑을 점령했다고 나오는데, 분서왕 시대는 304년이고 고구려가 낙랑을 점령했던 시기는 37년이라 고구려 동성왕때 낙랑이랑 백제 분서왕때 낙랑은 같은 지역에 다른 군사세력을 의미합니다.
      낙랑이라는 지역이 있고, 낙랑이라는 나라가 있었으며, 낙랑태수가 이끄는 낙랑군현 이렇게 세가지 이름이 역사서에 섞여 쓰입니다.
      백제 분서왕 시절의 낙랑은 진나라(서진) 시절의 낙랑군 태수를 의미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
      분서왕 7년
      7년(304)註 001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註 002
      〔7년(304)〕 겨울 10월에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낙랑이 백제의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는 것 같습니다. 땅을 점령하려면 자신의 세력과 가까운 쪽을 점령하지 먼 쪽을 점령하지는 않겠죠. 역시나 백제가 요동땅에 있어야 가능한 위치입니다.
      또한 고구려본기에 고구려가 연나라(전연)에 패한 뒤 평양 지역으로 옮겨 살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평양 지역에는 이미 백제가 사는데 고구려가 평양에 왔다고? 또한 나중에 연나라가 속국이 된 고구려에 낙랑공이라는 벼슬을 줬다고 나오니 당시 고구려 영토가 낙랑 근처였 것이 증명됩니다.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 343년
      가을 7월에 평양 동황성(東黃城)註 018으로 옮겨 살았다. 성은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註 019 중에 있다. 진(晉)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국원왕 355년
      겨울 12월에 왕이 사신을 연(燕)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연왕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註 027도감(刀龕)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고, 왕으로서 정동대장군註 028 영주자사(征東大將軍 營州刺史)註 029를 삼고 낙랑공(樂浪公)註 030을 봉하고 왕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註 031
      그리고 369년 고구려는 연나라에 패배해 국력이 약해졌을 법 한데 무리하게 백제점령을 하러 가다가 계속 패배했다고 나옵니다. 이 말인 즉슨 고구려가 연나라에게 패배해 영토가 줄어든 이후 백제와 국력이 비슷해졌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이때 등장하는 지명 패수, 평양.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지역에서 활동하던 고구려에 패수와 평양성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고구려는 진나라와 연나라 옆에 붙어 있었고, 백제가 고구려와 바로 옆에 붙어있었으니 결국 패수와 평양성, 백제 모두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근거입니다. 그리고 백제는 옛 도읍이었던 한산 지역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24년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註 001가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치양(雉壤)註 002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니, 〔태자는〕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급히 쳐부수고 5천여 명을 잡았는데,註 003 사로잡은 포로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26년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듣고 군사를 패하(浿河)註 001 가에 매복시켜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26년(371)〕 겨울에 왕이 태자와 정예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평양성(平壤城)註 001을 공격하니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註 002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26년(371)〕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註 001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 41년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내다. 백제 개로왕(蓋鹵王)註 036이 위(魏)에 표(表)를 보내어 말하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고 하였는데 지나친 말이다.註 037
      나중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왔다는 대목을 보면 이때 백제는 고구려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나 계속해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고 나옵니다.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30년
      30년(375)註 001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수곡성(水谷城)註 002을 함락시켰다.註 003 왕이 장수를 보내 막도록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다가 흉년이 들어 하지 못하였다.
      근구수왕 3년
      〔3년(376)〕 겨울 11월에 고구려가 북쪽 경계로 쳐들어왔다.註 001
      3년(377)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쳤다.註 001

    • @OYT0724
      @OYT0724 3 роки тому

      백제본기 제2
      책계왕
      〔원년(286)〕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註 001의 딸 보과(寶菓)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註 002과 사성(蛇城)註 003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註 004
      대방군은 연나라가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시킨 군현의 이름. 진나라(서진)때는 낙랑군을 낙랑(서), 대방(남), 현도(동북?, 훈허hun river 상류쪽이라고 함) 세 지역으로 분할시킴.
      백제가 고구려와 한창 싸우고 있던 대방군을 도왔다는 것은 요동지역에 있으면 금방 가능하지만, 백제가 서울지역에 있었다면 한참 걸렸을 것임.
      또한 3세기에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말갈과 싸우고 있었는데, 말갈은 이때 만주벌판에서 활약을 했었고, 고구려와 백제와 많이 싸웠다는 기록이 있음. 3세기에 한반도를 신라와 가야 단 둘이서만 가지고 있었는지는 찾아봐야 할 것 같음.
      신라왕 파사 이사금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 졌다는 파사산성이 경기도 여주 남한강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면 3세기에 신라가 제외하고 한반도 중앙까지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음.
      다만 파사산성이 있는 여주시 근처에서 대거 백제와 신라 유물이 모두 출토되고 있는데, 백제 토기가 발견된다는 증거는 경남지역 신라 토기와 다르게 생겼다고 해서 주장되는 것. 지역색채가 있다고 무조건 백제것이라 보기는 좀 힘들지만 더이상의 증거가 없으니 일단 보류. 또한 여기서 발굴되는 유물이 삼국시대 신라가 아니라 통일신라때 것이라는 근거 또한 통일신라 이전에는 경기도에 신라가 없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
      출처: 여주시 통일신라시대 유물산포지 홈페이지.

  • @dongxianjin9728
    @dongxianjin9728 3 роки тому +2

    삼각산이 변나산
    풍납토성 백제토성
    개웃기네

  • @정주영-c3k
    @정주영-c3k 3 роки тому +2

    옥의티 경남산청입니다

  • @갓래
    @갓래 2 роки тому +1

    150만톤;;;;;;;;;;;;;;;;;;;;;;;;;;;

  • @함영재-f1g
    @함영재-f1g Рік тому +2

    👏👏👏

  • @이불데드
    @이불데드 4 місяці тому

    미래마을연립이 있던 지역을 발굴중이다??
    미래마을연립 건립할때
    뭔가 나왔었다는건데
    그냥 덮고 건물 올렸다는건가??

  • @이관희-y2d
    @이관희-y2d 4 роки тому +12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 @이대주-p6j
    @이대주-p6j 4 роки тому +7

    풍납초등학교 나왔는데 헛~ㅋㅋ 풍납국민학교 였네요 엄청 뛰어놀던 곳 들이네요 ㅋㅋ

  • @라나-v1y
    @라나-v1y 4 роки тому +3

    언제적건가요 굉장히 옛날꺼같네요..

  • @mrabbit5592
    @mrabbit5592 20 годин тому

    저 여기서 발굴보존알바함ㅋㅋ
    직접손으로 흙을 유물등을 만져보고 신기했음 불태운곳에 잿더미가 그대로 남아있었음 신기신기

  • @zony1210
    @zony1210 2 роки тому +1

    집값땜에 알박기해야쥬ㅋㅋ

  • @갓래
    @갓래 2 роки тому +1

    56분 7초 이게.. 극히 일부...........

  • @dentalmichang4326
    @dentalmichang4326 4 роки тому +18

    역사는 국가의 무형의 재산 국부이다 철저하게 보존하자

  • @강민-e1b5v
    @강민-e1b5v 3 роки тому +2

    고두심

  • @갓래
    @갓래 2 роки тому +1

    53분 46초 좋아하는 교수님이네

  • @hyun-changshin7811
    @hyun-changshin7811 6 місяців тому

    백제하면 다 전라도를 생각하지.. 드라마서도 영화서도 백제군 하면 다
    전라도 사투리 쓰잖아. 물론 잘못된 고증이지만 또 전라도 사투리를 써야 재미가
    더 있으니 그걸로 가는거랑깨 어딜 충청도 서울이 백제를 대표할 수 있겠나

  • @하늘비-g5c
    @하늘비-g5c 4 роки тому +2

    그러나 3국중 젤 먼저 패망 했으니

  • @jh.h0911
    @jh.h0911 3 роки тому +2

    🌹😍👍

  • @hamin1991
    @hamin1991 3 роки тому +1

    저 동네는 주택들은 아파트로 재건축이나 새로 건물을 올릴염두도 않나겠네. 건물 건축할려고 조금만 파고 들어가도 문화재 나올까봐

  • @layerrare1398
    @layerrare1398 3 роки тому +1

    토건놈들이 다 파괴시킴

  • @전자왕김재상
    @전자왕김재상 3 роки тому +1

    저 빌라들 짓느라 얼마나 훼손햇을까?

  • @jonghopark8185
    @jonghopark8185 Рік тому +1

    풍납토성 산책하기 좋음 ㅎㅎ 여름 밤에 맥주 마시기도 좋고 ㅎㅎ

  • @gimmyeongjun
    @gimmyeongjun 4 роки тому +21

    역사스페셜 정말멋지네요

  • @전중식-q7j
    @전중식-q7j 3 роки тому +5

    제가 알기로는 상수리 나무는 관목 이다 열매는 상수리다
    도토리와 비슷하지만 도토리는 길쭉하고 상수리는 둥글다
    도토리 나무가 참나무다 키가 크고 산에 많이 서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