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많은 분들이 본인 관향(본관)에 대해 물어보셔서 답변을 달아드리는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한 번 답변해드린 관향(본관)은 질문하신 분이 답변을 삭제하시는 경우에는 다른 분이 물어보셔도 다시 답해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또한 개별 '파'에 대한 질문에도 ‘안동권씨’ 등 따로 파로 구별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답변해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파 정보는 한도 끝도 없고, 너무 지엽적이라 글을 읽는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전혀 되지 않고, 또한 해당 파 문중에 문의하시는 것이 훨씬 빠른 답변을 들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구수 대비 문과급제자나 정승 숫자로 성씨가 전통 양반이네 아니네 하는데, 아주 큰 오류입니다. 무과 급제자 까지 포함하여 보면, 지금 성씨 인구 순위랑 비슷합니다. 통계로 보면 김 이 박 순으로 관직을 역임한 성씨가 나열됩니다. 정승이나 대제학같은 고위관직은 성씨 인구수랑 관련없이 조선조에 세도가가 되었냐 아니였나 정도로만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조선조에 득세하다 단종복위사건으로 몰락한 순흥 안씨 같은경우 세종이후 문과급제자가 한명도 없습니다.
@@NaturalHwaN 글을 이해를 못하신것 같은데 위인전이랑 조선시대의 양반은 김이박이최정이 많은건 사실인데. 현대에서는 조선말과 일제시대이후 성을 유명한 사람것으로 개명하거나 가짜족모구매로 한국의 모든사람이 성이생긴거고 왕씨가문인 김씨가2천만명 잇는겁니다. 진짜 자신의 성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성씨인것을 알아보려면 300년이상 된 낡은 족보가 있거나 친가에 무덤이 10개이상 있는 가문이 진짜입니다 대부분은 그냥. 평민입니다.
돌아가신 조모께서 하신 말씀인데 한국전쟁 이전에는 신분이 철폐되었어도 집안에 하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피난에 하인들이 모두 흩어졌고 후일 우연히 마주친 하인 중 한 명이 우리 집안 성씨를 쓰고 있어 놀랐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뿐 아니라 주민등록제도가 시작되기 전까지 성씨를 바꾸고 신분을 세탁하는 일은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21세기에 양반 성씨가 크게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외가집 김해김씨인데 상놈집안 같음ㅋ 하나같이 다들 어렵게 살아서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워, 집안에 수재는 1도없고 제사상은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 여자들만 일 하고 상다리 휘어진 음식가지고 나누면서도 누가 뭘 더 가져가네 내가 일 다했네 어쨌네 싸움ㅋ 이런 교양머리를 가진 집안 절대로 양반일 수 없다ㅋㅋㅋㅋㅋ
양반 상놈이 뭔 상관이겠어요 양반이어도 상놈 짓을 하면 상놈이고 상놈이라도 지식과 덕이 있으면 양반이고 그렇죠뭐, 내 뿌리를 알고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많이 변했는데 아직도 양반 가문이 어쩌고 하며 행동을 지적하고 아는체하며 무시하는 어른들은 정말 별로 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김씨가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으며 특히 광산김씨나 경주김씨가 김해김씨 보다도 많았다고 합니다. 과거급제 숫자를 보면 조선전체의 역사속에서 김해김씨의 급제자가 120명 정도인데 순흥안씨와 비슷한 숫자죠. 단정지을순 없지만 조선시대의 김해김씨 비율은 순흥안씨와 비슷한 성씨비율일 가능성이 큽니다.
솔직히 고려시대때 기득권이 귀족하고 왕족들이 상놈이 노비 백정 기생 무당 등등 천한 신분이 된거라서 뭐라 하기도 좀 그런거야. 신라 백제 고려구 발해 귀족 황족들도 고려때 신분이 상놈 백정 노비 기생으로 몰락한 집안도 많았고 반대로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신분상승으로 귀족이 된 경우도 있어서 조선시대 족보만 가지고 뭐라 하기에 좀 ㅋㅋ그런거야.
사실 안동권씨는 인구가 70만으로 인구 자체는 꽤 됩니다. 대개 권행을 시조로 한 안동권씨에서 여러 관향으로 분파되었다가, 조선후기 다시 안동 단본으로 합쳐진 케이스인데, 문제는 그중 본래 권행의 안동권씨에서 분파되지 않은 것으로 유추되는 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님 복야공파는 본래 안동권씨가 맞는 것으로 유추됩니다. 왜냐하면 복야공파에서 고려말 권한공이 재상격인 시중을 지냈고, 조선초 태종시기 권중화가 영의정이 된 것으로 봐서 현달한 역사가 상당히 깊고 오래됐고 다르게 말하면, 이는 복야공파가 본래 권행을 시조로 하는 안동권씨가 맞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복야공파의 유명한 인물로는 권벌이 있는데, 이 권벌은 명종시기 원상(院相)으로 현 봉화 유곡권씨의 닭실마을 종가의 시조격이죠. 덧붙여 유곡권씨는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유(柳)씨와도 통혼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죠.
성씨로 양반상놈 구분하는데 진짜 의미없는데... 조선시댄 양반비율이 몇프로밖에 안되고 장원급제하는 인물 그렇게 많이 배출하려면 그 집안이 유전적으로 머리가 일단 좋아야함.. 양반들은 결혼도 함부로 안했으니 이것저것 따지고 했으니 자손도 그리 많지도 않음...자손 있어봐야 첩소실이 더 많지.. 그리고 조선말전부터 세도정치로 얼마나 많은 양반가들이 몰락성쇠를 거듭했는데...잘살던 양반들도 노비로 전락하는데 부지기수...무엇보다 조선말에 족보 위조 판매가 성행해서 조선말에는 70프로이상이 양반이었음. 거기다가 식민지, 6.25겪으면서 그런게 제대로 남았을꺼라고 생각하나? 일단 가슴에 손얹고 생각해보자..지금 가진 유전자로 장원급제나 근처나 갈 수 있는지..생각해보길...당장 수능 상위 3프로 안에도 못들어가면서.
양반이 원래 문무양반을 가르키는 것이라 문과만 따질 것이 아니라 무인집안도 양반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현대에 비교적 인구수가 적으면서 조선시대에도 희성이 아니었던 성씨면 나름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로 보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이라면 세컨, 써드를 거느린 건 기본이었고,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것은 물론, 평민의 자식이라도 머리가 좋거나 등 여러 이유로 자기 호적에 올렸던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조선 후기는 사실상 노비제가 붕괴되던 상황이기도 했구요.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 양반상놈 따지는 건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보입니다.
아니요. 지금 여흥민씨 족보 위조에 대해 물으셨는데, 일단 국내 민(閔)씨는 사실상 여흥(경기 여주) 단본으로 고려말 권문세족으로 출발해, 조선시기 전체에 걸쳐 명문거족이었던 명벌 중 大명벌이었습니다. 가문이 현달한 것은 고려 인종시기 동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낸 민영모(閔令謨)때 부터인데, 현 여흥민씨에서 시조로 잡는 분은 민영모의 증조부인 민칭도(閔稱道)입니다. (다만, 민칭도는 그 내력이나 계보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기에 일반적으로 민영모 부터 가문 성세를 얘기함. 대체로 여흥민씨 대종회에서는 민칭도의 선계는 공자 제자 중 한 명인 민자건의 후손으로 보는 설도 있고 여러 설이 있음. 참고로 중국에서 閔씨는 魯나라 임금 중 한 명인 閔公의 후손들이 조상 시호를 氏로 채택한 경우로, 곧 魯나라 公族 후손이자 周나라 왕실과 同姓: 姬姓계열!) 아무튼 인구가 많지 않음에도 워낙 명벌로 수백년동안 유명하게 번성한 가문이라 사실상 따로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요.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16만 가량인데,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42명(인구 대비 엄청나죠!), 왕비(대한제국 황후 포함) 4명, 정승 12명 등으로 극도로 현달하였고, 인구도 그리 많지 않고, 워낙 명문으로 수백년 동안 흥했던 가문이라 현 국내 민씨는 거의 대부분 명벌 후손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곧 평민이나 천민 투탁률이 굉장히 낮은 관향 중 하나입니다.
행동으로 양반과 상놈을 구분할 수 있음. 현재에도 양반과 상놈이 있음. 밥먹을때 후루룩거리고 옳고 그름에대해 부끄러움도 모르고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큰소리내고 따지면 장땡인줄알고 법적으로 양반이 사라진 지금 천민들이 날뛰기때문에 나라가 어수선한거임. 대표적으로 딸바보부모가 딸이 옳고 그런것도 모르게 공주처럼 키우는걸보면 알수있음. 아! 저 집안은 천민집안이구나.
노블리스 오블리제 귀족 ( 양반) 들이 있어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선다. 현대는 상놈들의 시대다, 기생 (연예인 ) 무당 (종교인) 광대 ( 연기자 영화배우)들이 기득권을 얻고 신 귀족 행세를 하고 있다. 충효 , 도덕 , 의리, 지식, 지혜 가 사라진 파렴치한 인면수심의 쌍놈들의 세상이다.
괜찮은 양반가 입니다. 님 나주나씨는 아마 나부를 시조를, 나득규를 중시조로 삼을 것입니다. 아마 중시조 나득규 부터 세계가 정확할 텐데요. (시조 세계, 행적이 전해지는 게 많이 없고 계대가 불명확하고 중시조부터 정확한 경우, 이런 대표적인 예로 창녕조씨가 그 일례, 이런 가문 많음.) 아무튼 현 인구 11만 정도인데, 조선조때 대과 27명을 배출한, 아무튼 배출할 만큼 배출하였고, 생원이나 진사 합격자는 많은 수를 배출했기에 조선조 내내 양반가가 맞습니다.(참고로 인구 30만으로 님 나주나씨보다 인구가 훨씬 많은 거창/강릉 유씨(묘금도 류자 쓰는)가 대과 23명 정도 배출, 한번 비교해 보시길.) 다만, 확실히 유명한 사람이 없었으나 구한말 대종교 창시자이자 항일운동가인 홍암 나철 선생을 배출함으로써 확실한 유명 인물을 배출하였고, 현재 유명 인물로는 나경원 같은 이가 있죠. 홍암 나철 선생은 대종교 창시자로 유명한데, 대종교는 사실 종교라기 보다는 '항일무장운동단체'적인 성격이 강하지요. (역사적으로 재평가가 필요한 부분) 그리고 한가지 아셔야 할 것은 님 족보에 보면 시조 나부가 송나라 귀화인으로 돼 있는데, 그건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아마도 흔히 조선후기 각 족보마다 행해진 모화사상의 일환이고, 아마 그냥 한반도 토착출신 같습니다. 이유는 나부의 중국행적이 잘 보이지 않고, 나주나씨가 오랫동안 나주의 망족(명망 있는 집안)이었기에 그냥 토착계로 보입니다. 아무튼 훌륭한 가문입니다. 자부심을 가지시길.
조선초는 양반보다 상놈 인구가 훨씬 많았고. 조선말은 돈주고 살 수 있어서 상놈보다 양반 인구가 더 많음. 조선 초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찐 양반은 지금은 다 섞여 있어서 의미 없음. 그리고 조선말 성씨를 살때 사람들이 금을 가장 좋아하므로 김씨가 제일 많은 것. 섞여 있지만 확울적으로 상놈피 비율은 김씨가 전반적으로 가장 높다는 말. 그 다음은 왕의 성이라 이씨를 많이 샀기 때문에 이씨.
21세기에 사는 사람은 본인의 조상이 양반이었다는 것보다는 혈통이 잘 보존되어 왔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을 알아 보고자 하면, 대략적으로 약 500년 전부터 내려온 선조의 묘와 좌의 위치를 알고 묘제를 지내고 있다면 혈통이 있는 성씨 ㆍ또는 가문이다 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각자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이 남원양(梁)씨인지, 남원양(楊)씨인지 한자를 기재하지 않아 정확히 모르겠다만, 확률상 '남원양(梁)씨'로 보아 그에 맞춰 서술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국내 양(양+량)씨는 한자로 4개 정도나 됩니다. 가장 흔한 것이 양(梁: 대들보 량)씨이고, 그 다음이 양(楊: 버들 양)씨입니다. 전자는 본래 옥편 기준으로 그 음이 '량(梁)'이지만 국내 두음법칙으로 '양'으로 발음됩니다. 그에 비해 후자는 본래 음이 '양(楊)'입니다. 아무튼 양(梁)씨는 국내 2015년 기준으로 46만명이나 되고, 그중 남원양씨가 30만이 넘고, 제주양씨가 14만명이 넘습니다. (이밖에 충주양씨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관향 모두 제주 탐라국 고(高)을나(탐라 임오군왕), 양(良)을나, 부을나 신화의, 이 중 양을나의 후손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고대 탐라국 제주 지배자 중 맏형이 양을나 라고 양(梁)씨 대종회에서는 현재 주장하고 있습니다만(고씨 대종회에서는 다른 주장도 함.), 아무튼 확실한 건 양(梁)씨가 고(高)씨에 비해 제주 군주(임금) 자리를 오랜기간 동안 차지하지 못했고, 탐라국 전기는 주로 고씨가, 탐라국 후기에는 탐라국의 동서를 고(高)씨, 문(文: 본래 고씨 사위가문)씨가 함께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탐라국 군주를 加, 孤, 具씨 등도 잠깐 했었다고 전해지기도 하죠.) 아무튼 다시 돌아가, 그 중 남원양씨는 신라 경덕왕때 사람이라는 양우량을 시조로 합니다. 그는 경덕왕때 공을 세워 제주에서 남원으로 분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낙 오래전 인물이고 문헌이 많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기 힘들고, 양(梁)씨 대종회에 의하면, 훗날 양능양(梁能襄), 양주운(梁朱雲), 양수정(梁水精)을 각각 1세조 하여, 병부공파, 용성군파, 대방군파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양우량을 시조로 하는 남원양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46명을 배출하였습니다.(남원양씨로 국한시켜 말함!) 사실 인구 30만에 대과급제자 40여명 정도면 그 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남원양씨는 고려말 양백익(공민왕시기), 양천룡(공민왕시기)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명신을 배출하였습니다. 가령 조선 세종때 대제학을 역임한 양성지는 꽤 유명했고, 양성지의 손자인 중종시기 우참성, 촤찬성 등을 역임한 양연도 남원양씨를 현달시켰습니다. 양성지의 13대손 양헌수는 병조판서, 한성부좌윤 등을 지내 명문으로서의 긍지를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남원양(梁)씨는 문과급제자(대과) 합격자 숫자는 적지만, 주로 고위직 벼슬을 대대로 한 가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자부심을 가질 만한 관향이라고 사료됩니다. 덧붙여 양(梁)씨는 중국에서는 꽤 흔한 성씨로(20위 정도?) 수말당초 시기 대량황제(大梁皇帝), 해사천자를 칭한 양사도(梁師都)가 그 주요 인물입니다.
나주(금성, 금산)김씨는 조선조때 기준으로 전형적인 무과 명문 집안 입니다. 나주김씨의 시조 김운발(김굉 아들)은 경순왕의 손자로 전하며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나주김씨 측에서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가문이 현달하는 시기는 고려말기 김극순이 대제학에 오르고 동문선에도 이름을 올리면서 가문이 비로소 현달하게 됩니다. 조선조때는 태종시기 김정준(나주김씨 중시조)이 중군총제 등을 지내면서 무과 명문의 기틀을 마련 하였습니다. 나주김씨는 조선시대 기준으로 문과급제자가 8명에 불과하지만, 무과는 무려 79명이나 됩니다.(현 인구는 5만이 조금 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임진왜란 시기 김충수(金忠秀)로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호조참판에도 제수됩니다. 정유재란 시기에 그는 순절하여 '우산사'란 곳에 제향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런 측면에서 봤을때 조선조때 기준으로 나주김씨는 전형적인 무과 명벌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능성구씨가 있습니다. 참고로 이 나주김씨에서 분파된 관향으로는 안로(나주 소속 속현)김씨(나주관향 후손 아니라는 설도 있음.), 교하(파주)김씨, 상음김씨, 해주김씨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인구를 모두 합한다면 인구가 그렇게까지 적지는 않습니다. 현재는 전남과 충청도 지역에 그 인구가 다수 분포돼 있는데요. 참고로 전북 출신인 소녀시대 태연(전북 전주 출신, 본명 김태연)이 이 나주김씨 입니다.
경주김씨 계림군파는 김알지 후손 김균(조선개국 3등 공신)을 파조로 하는 경주김씨 파 중에 하나입니다. 파조가 조선 개국공신이라 조선조 전반에 걸쳐 상당히 현달한 명문거족입니다. 경주김씨 중에서도 명벌 파로서 특히 조선후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조선전기에도 명벌이었는데 후기에 더욱 현달했습니다.) 가령 김균의 증손으로 대사헌을 지낸 김승경, 김균의 손자로 청백리로 뽑힌 김종순, 직제학을 지내고 임금이 내리는 영예인 호당을 거친 김천령, 이 천령의 손자로 좌의정을 지낸 김명원(경림부원군), 숙종 장인 김주신(경은부원군), 좌의정 지낸 김사목, 조선말기-대한제국기 총리대신을 지낸 그 유명한 김홍집, 또한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으며 등의 저술을 남긴 독립운동가 김교헌(이 분은 사실 좀 안 알려졌지만, 사실 현 한국인들이 의무적으로 알야아 하는 분이죠.) 등등. 무수히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사실 인물들이 너무 많아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죠. 판서가 흔할 정도이니까요. 사실 경주김씨 자체는 인구가 190만에 가까워 인구가 제법 되는 편입니다만, 그 중에서 옥석을 가리자면 계림군파는 확실히 옥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봤을 때, 대부분의 경주김씨 계림군파는 조선후기 명벌의 후손으로 봐도 좋을 것 같네요.
조상대대로 조상 묘조성지가 있는 집안과 체계적으로 돼있는 족보가 있고 집안대대로 돌림자로 그 성씨 집장촌있는 성씨만 양반가문입니다 참고로 제사를 4회이상 안한 집안만이 가장 진실된 양반가입니다. 이유는 조선왕조 제사가 년 5회이상 못 해서 왕족버금가는 제사집안 졸보집안입니다. 현재까지도 경복궁 제사는 1년 5회입니다.
@@sjkim3378 호장공파는 고려시대부터 안동의 호장이였던 지방토착세력이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중인으로 격하되었습니다. 파벌마다 지방에 남았던 지방토착세력은 고려때는 지방 호족이였으나 조선시대에는 호장이나 이방을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고 호장공파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호장공파가 역사에서 대두된건 19세기부터 인데, 19세기에 유력 기존 중인세력였던 안동권씨 중인계열과 같이 경상도 영방직을 독점한 유력 중인가문 중 하나입니다.
백씨는 지금은 수원 단본으로 통합되었는데, 과거부터 말이 많았죠. 여러 이본들은 수원 단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죠. 아무튼 국내 백씨는 고려말의 명신이자 공민왕-우왕시기 정당문학 직산군 백문보(대흥백씨)가 가장 유명하죠. 현재 전체 인구 40여만에 가깝고, 조선조 때에도 문과급제자가 70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압니다. 이 정도면 상당히 양호하죠. 양반 신분은 유지했을 뿐더러, 꽤 괜찮은 세를 과시했다고 봐야겠죠. 근데 문제는 조선조때 기준으로 확실히 우리 국민 모두가 알 정도로 이름난 분이 없다는 것인데, 사실 알고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게 율곡 이이의 스승인 '백인걸(수원백씨)' 같은 분이 계시기에 이 분을 좀 연구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백문보 같은 이는 공민왕과의 대화에서 우리민족의 '단군기원설' 이거 하나로 항상 회자되시는 분이죠. 백문보 님 이분의 살아생전 행적보다 이 공민왕과의 이 대화 하나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죠. 백문보.... 여러모로 우리 민족 전체에게 굉장히 소중한 분이죠.
나주김씨 38대손 입니다 종손 장손은 아님니다 애들 족보에 올려야 할까요? 돈달라고 하던데 종친회에서 파는 경순왕파 로 알고 있습니다 신라 폭망시절 경순왕 손자분 김운발 시조임 갑자기 관심이 생기네요 고려 왕건 시절에는 개성에서 살았다고 합나다 그리고 조선시대 부터 지금까지 김포시에 살고 있습니다 나주김씨 관련 자료를 아이들에게 남겨줘야 할까요 딸3명임 다국적 글로벌 시대라
국내 궉(鴌: 鳳의 이체자)씨는 본관이 순창, 선산, 청주 등 입니다. 국내 궉씨 인구는 채 수백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작 2백명이 조금 넘는 정도로 파악됩니다. 이중 청주 관향은 명나라에서 파병된 장수 궉시영(鴌時永)을 시조로 삼고 있습니다. 궉시영은 사료에서는 사실 파악이 잘 안됩니다.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조선조때 이수광의 에는 "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유래를 알 수 없고 胡姓이라고도 한다." 라는 기록이 있고, 실학자 이덕무는 에서 "선산에 궉씨촌이 있는데 선비가 다수이다." 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수광이 인조 시기 사람이고, 이덕무가 정조 시기 사람인 것으로 봤을때, 궉씨가 최소 수백년 전부터, 늦어도 임진왜란 이후 부터는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추가 하나 가능한데, 곧 임진왜란 전후 중국 등 어디에서 궉씨가 귀화했을 가능성, 또한 선비가 많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들 자체가 신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방증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 궉씨 종친회에서 내세우는 궉씨 시조가 임진왜란 전후 중국 등지에서 귀화했다는 설은 꽤 근거 있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문제는 중국에서 사실 궉씨가 없는 성씨라는 점에서, 혹여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하더라도 본래 鳳씨였는데, 봉을 이체자로 표기해서 '궉씨'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궉채이(세계롤러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 2관왕)는 청주궉씨 19대손으로 궉씨를 알리는데 일조를 한 사람이죠. 질문자 님을 포함해 현재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이 이 궉씨를 아는데는 이 궉채이 선수가 한 몫 했죠. 이와 비슷한 예로는 방송인 판유걸이 해주판씨를 전국적으로 알린 것 정도가 그 비등한 예로 볼 수 있겠네요. * 참고로 중국 鳳씨는 전설상의 인물인 여와씨 후손, 마찬가지로 전설상의 제왕인 제곡 고신씨 후손, 그리고 역사상의 인물인 周나라 文王 후손 등으로 그 후손들이 있다고 중국 봉씨 측에서 소개돼 있네요.
성씨보다 성씨와 본관을 같이 봐야하는게 정확하지. 우리나라에 김씨가 많은 이유는 북방유목 민족이었던 흉노의 소수지배층과 가신들 일반병사들이 신라로 들어와 지배층과 왕이 되고 신라와 통일신라 약 1000년의 왕과 귀족이 김씨였으며 통일신라가 왕건에 전쟁없이 나라를 고려로 넘겨주는 조건으로 신라의 왕과 귀족이었던 김씨가 고려 500년동안 다시 귀족신분으로 대우를 받고 삼. 성씨가 없던 하층민들이 김씨로 많이 유입된것도 한반도에서 가장 잘나가던 성씨가 김씨였기 때문임
100% 맞는 것은 아니지만 며느리가 시댁에 오면 양반 집안 전통이라고 하면서 한복만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부엌일을 심하게 시키는 것 등 유난히 며느리에게 엄하게 구는 등 티를네는 집들은 양반집 머슴살이하던 놈이 한일합방 덕에 주인의 성을 받아 양반이 된 "설익은 양반" 집안인 경우가 많다.
황희(영의정) 정승과 그의 아들 황치신(호조판서. 우의정 증직), 황수신(영의정: 남원부원군)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 전체 황씨 인구가 70만에 가까운데, 그중 17만이 장수황씨입니다. 조선조때 대과급제자가 44명 정도로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인구대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일단 그런 걸 떠나서 황희 정승과 그 아들들이 정승을 했기에 당연히 명벌이죠,(황희 정승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다만, 조선 선조시기 사이코패스로 유명한 서자 왕자 순화군의 부인 장수황씨는 시집을 잘못 갔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근데 애초 순화군에게 시집간 거 자체가 장수황씨가 명벌이라서 간 것인데... 아무튼 성씨 자체는 황희의 후손이자 명벌입니다.
웃자고 하는 소리니깐 웃자는 소리에 덤비는 분들 없길 바랍니다... 80년대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가있는데 "천방지축마갈파" 라는 말이 있었죠... 양반이 아닌 계급이 낮은 계층을 이야기할때 이렇게 이야기했던것을 기억합니다..물론 80년대 이야기이고....농담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일뿐... 아무런 의미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청송심씨는 심홍부를 시조로 합니다. 심홍부는 고려 충렬왕때 위위시승을 역임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가문이 고려초나 고려 중기로 그 시조를 잡는 것에 비해서는 사실 청송 심은 다소 늦은 감이 있습니다. 가령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은 왕건을 도운 고려 개국공신, 문화유(柳)씨 시조 유차달(柳車達)도 고려 개국 공신이었죠. (그러나 아시다시피 청송심씨 그 가문의 현달과 성세聲勢는 가히 타 가문에서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역사에서 번성했지요.) 2015년 기준으로 국내 심(沈)씨는 전체 인구가 27만으로, 그 중 청송심씨만 24만 가량됩니다. (대부분 청송심씨!) 조선조때 정승을 2명 배출한 풍산심씨도 있고 다른 관향의 심씨들도 있지만, 대체로 청송심을 대종으로 하여 모든 沈씨를 청송심과 동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이설도 있습니다.) 사실 저희도 규칙이 있는데, 이미 한 번 이상 물어본 관향 / 이미 유튜브 방송 등에서 소개한 관향 / 또한 덧붙여 '파'는 언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파 같은 경우는 너무 지엽적이라 한도 끝도 없고, 읽는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안동권씨 같은 경우는 실상 파로 가문을 구분할 수밖에 없기에 이전에 파에 대해 답변해 드린 것.) 아무튼 앞서의 이러한 이유로 청송심씨는 간단하게만 답변해 드리자면, 시조인 심홍부의 증손 심덕부(沈德符)가 고려 우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이 심덕부는 이성계에도 협조하여 곧 위화도 회군 계열에 동참하여, 공양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봉해져서 가문이 크게 현달하게 됩니다. 조선조때 심씨는 현달한 것을 넘어 완전한 최고 수준의 '명문거족'이었는데, 그것은 사실 이 심덕부의 공로가 큽니다. 심덕부가 이성계에게 협조하여 조선초에도 沈씨는 지속적으로 명문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곧, 그 시작이 심덕부인 셈이죠. 사실 심덕부는 잘 안알려져 있어 그렇지, 상당히 입지전적인 인물로 고려 충숙왕때 음직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으로 출사를 시작하여, 우왕시기 우상시(右常寺), 예의판서(禮儀判書), 우왕 4년에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서해도원수라는 직책도 겸직하여 장수로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웁니다. 무인적인 기질도 가진 그의 이러한 이력은 훗날 이성계와 친분을 쌓게 되고 실제로 조선성립 7년전 북청 침입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토벌하는 성과도 올립니다. 곧 심덕부의 무인적인 기질과 경험이 궁극적으로 이성계와의 교분을 쌓는데 도움이 된 셈이고, 이는 훗날 심씨가 조선성립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현달하게 되는 연유가 되게 됩니다. 아무튼 심덕부는 조선이 개국되자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어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좌정승(左政丞)에 이르게 됩니다. (참고로 조선초에는 조선도 고려초나 중국 皇帝, 天子들처럼 공후백자남의 봉작을 합니다. 그러나 태종시기 이는 폐지돼 조선은 군호(君號) 봉작만 합니다.)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 심온(沈溫)은 세종의 장인(국구國舅라고 하죠.)으로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으며(태종에 의해 가문이 풍비박산 나지만 세종 말년 가문이 회복됩니다. 완전히 복권되는 것은 심온의 외손자인 문종시기, 곧 문종이 복권 시킵니다.), 심온(沈溫)의 둘째 아들 심회(沈澮)도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진봉 됐습니다. 뒤이어 심회(沈澮)의 증손인 심연원(沈連源)도 명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졌고, 심연원(沈連源)의 아들 심강(沈鋼)도 명종의 장인(國舅)으로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더불어 심강(沈鋼)의 손자 심열(沈悅)도 인조 때 영의정이 됩니다. 심열(沈悅)의 고손 심호(沈浩)도 경종의 장인(國舅)으로서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참고로 부원군은 왕의 장인이나 공신 등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왕자가 봉해지는 대군, 군과는 다르게 '관향+부원군'이라는 명호가 붙습니다. 부원군 명호를 지을때는 관향을 그대로 쓰거나 아니면, 관향 두번째 글자를 原, 城, 川, 陵 등으로 바꿔 짓습니다. 가령 풍산(하회)유(柳)씨인 유성룡(柳成龍)은 풍원부원군 등등* 이를 보면 알 듯이 청송심씨는 왕비를 대거 배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국구나 재상의 반열에 오른 자가 무수히도 많은 가문입니다. 그 가문의 성세가 조선전기, 조선후기에 국한되지 않고 조선초부터 조선말까지 이어졌으며, 선조시기 심의겸(서인 붕당 시초: 참고로 당시 김효원은 동인), 정조, 순조시기의 심환지(노론벽파 영수) 등으로 알 수 있듯이 심씨는 조선 후기 유력 노론 가문 중 하나이자, 정계의 중심에 항상 있었던 가문으로 딱히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현달을 넘어 명문거족으로 입지를 탄탄히 한 가문입니다. 참고로 청송 심의 연혁은 조선조때 기준으로 왕비 3명, 상신 13(풍산심 합하면15명)명, 대제학(문형) 2명, 종묘배향1명, 청백리 2명, 호당 2명, 공신 8명, 장신 1명, 문과 급제자 194(다른 관향 심 합하면224)명을 배출했는데, 이는 가히 인구비율로 보자면, 조선전체 중 최고 수준입니다. (사실상 인구비율 최고 수준인 목씨, 상씨는 제외! 睦씨, 尙씨는 인구가 너무 적으니.)
사실 인구 30여만에 가깝지만, 그에 비해 대과 급제자 수는 34명 정도로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시 급제자는 많아 양반 신분은 조선왕조 내내 충분히 유지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함안조씨는 오히려 구한말에서 근현대 인물 중 걸물들이 많았습니다. 조명하라든가, 명문양반가 출생 독립운동가 조소앙(조용은) 선생이라든가, 현대의 조정래 작가라든가 등등. 여기서 조소앙 선생과 그의 형제들은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형제들이 모두 중국 왕조인 하상주 등등의 국명을 형제 이름에 쓴 것은 유명한 일화죠. 또한 세종, 문종, 단종때 생육신 조려 같은 분도 훌륭한 분이셨죠. 사실 조려 같은 분은 누가 좀 발굴해 좀 더 유명해져야 하는 분 같기도 합니다. 좋은 가문입니다!
자신의 가문이 양반인지 유추가 가능한것중에 몇가지가 있습니다 1. 족보가있다 ( 최소 1950년대이후 종중에서 만든것 + 번역본 ) 2. 각 가문마다 몇대손이면 이름의 끝자나 가운데 돌림자가 일정하게 맞는다 ( 예를 들면 경기도 광주이씨는 21대손 돌림자가 끝자가 재로 끝납니다 20대손은 가운데자가 용으로 19대손은 끝자가 래로 18대손은 가운대자가 병으로 17대손은 끝자가 회로 끝납니다 ) 4. 종중이 있고 선산이 있다 5. 조선시대의 유명인중에 묘가 본향지 주변에 산재해있다 ( 예를들면 광주이씨는 광주.성남 .강동구둔촌동.고덕동.경북칠곡등) 6. 유전자는 못속인다 ( 예.경기도 광주이씨중 연예인.운동선수중에 비슷하게 생긴사람이 많죠 예를 들면 이승엽.이효리.이광수. 이순재.이기광.정치인 이준석 .이윤석 .등 잘보면 비슷합니다 )
족보의 많은 단점이 있겠지만 가장 센 장점은 그것의 진위와 관계없이 쉽게 뭉칠 수 있게 해준다. 모두 잘난 조상을 갖게 됨으로써 모두 주인의식이 생길 수 있고 같은 조상을 가짐으로써 공동체의 끈이 단단해 진다. 난 성이 한씨인데 청주한씨 이전에 이미 한씨가 있었고 청주란 본을 한란이 받은 걸로 안다.하지만 모두 한란을 시조로 한다. 나머지 한씨들이 성을 갈지 안았다면 결국 잘난 남의 조상으로 바꾼 꼴이다.
족보 얘기만 나오면 씹어대기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심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과거의 계급현상을 진지하고 해석적 차원이나 역사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저 씹어대기 바쁘죠. 현재 족보가 권력적.계층적 기능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 있는가 하면, 우리 가문의 문화유산도 있습니다. 어떤 가문은 민족의 문화유산이기도 하고, 세계의 유산이기도 하죠. 그것을 애써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그 가문의 후손들 입니다. 즉, 함부로 조롱거리고 삼을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현대적 시선에서 과거의 족보를 사고 팔던 계급적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은 정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보다 전근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입니다. 이는 우리역사에서 계급이 대격변하는 하나의 현상이기고 하고, 전근대적인 사유가 무너지는 한 과정이자, 근대화로의 과정에서 당연히 파생하는 사건들이기도 하죠.
왕상의 씨가 따로 있나? 양반이란 권력자(문반과 무반)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전 티비에 자신의 가문에서 전해오는 문서를 감정받으러 왔는데 그것이 노비문서 . . . 현대에는 이러한 신분제도가 아닌 타인에게 아량을 베풀고 봉사하는 분들이 양반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 이 新안동김(金)씨는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해 따로 소개가 필요할지 잘 모르겠습니다.('금관자가 서 말') 어찌보면 명종시기 원상이었던 충재 권벌의 후손인 봉화 유곡마을의 안동권(權)씨나 그 유명한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후손인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하회)유(柳:류)씨 보다도 더 유명한데 말이죠. 우리 전국민중에 신안동김씨 모르는 사람은 없죠. 아무튼 신안동의 시조 김선평(고창성주 였음)은 고창전투에서 장길, 권행(안동권씨 시조, 본래는 김행)과 함께 왕건을 도와 후백제군을 대파하여 왕건에게 견훤에 줄곧 열세였던 戰勢를 역전시키는데 일조한 분이시죠. 그래서 고려 공신이 되신 분이죠. 아무튼 이 (신)안동김씨가 명문이 된 데에는 김극효(명종-선조시기 동지동녕부사 역임, 신안동김씨 중시조, 사후 영의정 추증)의 아들 김상용(우의정), 김상헌(좌의정)때인데, 이때 이미 정승을 배출하여 명문거족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이 중 김상헌의 후손들이 중전(왕비)을 대거 배출하여 세도가문이 됨으로써 조선후기 집권세력이 되죠. 김상헌 후손의 신안동김씨들을 특별히 서울 장동에 살았다 하여 '장동김씨'라고도 하였죠.(이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김병기 저, , 김영사, 2007. 참고) 여하튼 유명한 사람이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을 정도인데, 김수흥(영의정), 김창집(영의정) 등등도 있고, 여기서 김창집(김상헌 증손)의 후손에서 중전(왕비) 3명이 나왔는데, 여기서 김창집 계열이 중요한데 신안동김씨를 우리도 다 아는 세도가로 올린 비조격 인물이죠. 그리고 교과서에도 나오는 김조순(김창집 4대손, 곧 김상헌---김창집----김조순 계열)의 따님이 순조비가 되면서, 김달순, 김교근, 김유근 일족이 정승, 판서를 독차지, 이후에도 김좌근, 김흥근, 김병학, 김병국 등을 배출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를 이끈 관향이죠. 조선조때 정승 15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 판서 30명 이상을 배출함으로써 조선후기, 특히 세도정치를 화려하게 장식한 관향이죠. 사실 이 신안동김씨 같은 경우는 세도정치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데, 그러나 근대 개화파 인물인 김옥균도 신안동김씨, 그리고 독립운동의 영웅 청산리대첩의 김좌진도 알고보면 모두 신안동김씨 입니다. 그러므로 마냥 신안동김씨가 우리 역사에서 어두운 부분만 있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며, 훌륭한 정승, 판서, 인물들도 많이 배출한 관향입니다. 또한 이 신안동김씨가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멸절 되지 않은 이유로는 한가지 일화가 있는데요.(그 중 주로 세도가문인 장동김씨!) 굳이 말하자면 노론계열인 이 신안동김씨는 남인계열 풍산(하회)유(柳:류)씨 낙파 유후조(柳厚祚, 고종시기 우의정, 좌의정 역임, 일명 낙동대감, 유성룡 8대손)과의 일화가 아주 유명한데, 집권 이전의 약조대로 흥선대원군이 남인계열 유후조를 정승으로 삼고 안동김씨를 멸문하자고 하나, 유후조 정승 임명 전날 안동김문의 김병기가 유후조를 직접 찾아가, 절실히 부탁하여 멸문을 피했다는 일화도 있죠.(참고로 낙파 유후조는 유성룡 후손답게 정쟁보다는 조화, 통합을 선호하는 점잖은 인물이라 김병기의 부탁이 먹혔다는 설이 있음.) 그러므로 지금도 이 신안동김씨의 인구가 47,000명 가량으로 아주 적지는 않은 가문이 되었다는 말도 있죠. 물론 세도가문에 관여된 신안동김씨는 사실 장동에 사는 '장동김씨'로 국한되지만. 아무튼 뭐, 지금 현재도 신안동김씨는 인구도 그리 많지도 않고, 조선후기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세도가문이라 그 후손들은 거의 모두가 명벌 중 명벌 후손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따로 말이 필요없죠. 금관자가 서 말!
님 아마 유(兪: 그러할 유)씨일 것입니다. 국내 한글 '유 or 류'로 표기되는 인구는 전체 인구가 무려 100 만명이 넘습니다. 이 중 가장 흔한 것인 유(柳: 현재 인구 65만)씨이고, 그 다음이 유(劉: 묘금도 류, 현 인구 30만)씨입니다. 그 다음이 님의 유(兪: 현 인구17만)씨, 그 다음이 유(庾: 현 인구1~2만)씨입니다. 전자 둘(柳+劉)은 모두 옥편기준으로 원음이 '류'이지만 두음법칙 적용으로 '유'가 됩니다. (흔히 국내 일부 무식한 사람 중 劉(묘금도 류)씨가 본래 음이 '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던데, 아닙니다! 劉씨도 본래 옥편기준으로 원음이 '류' 입니다.) 그러나 님 유(兪)씨는 유(庾)씨와 함께 본래 음이 '유'입니다. 아무튼 유(兪)씨는 우리역사에서 상당한 명벌이었습니다. 흔히 '버들 柳'자 쓰는 '유(柳)씨'만 국내에서 명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兪씨도 충분한 명벌입니다. 유(兪)씨는 조선조때 기준으로 문과급제자가 100명 전후가 됩니다. 현 인구가 17만 가량임을 상기했을때 엄청난 벌력(閥力)이죠. 그 중 유(兪)씨 인구의 다수인 기계유씨가 문과급제자 90명 정도를 배출하였고, 조선조때, 특히 조선후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님을 유(兪)씨 중 가장 흔한 기계유씨로 보고 서술해 드리자면, 기계유씨의 시조는 신라시기 아찬 관직을 지낸 유삼재란 사람이고 고려중기 부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서술 편의상 조선조를 기준으로 보자면, 먼저 세조시기 사육신 유응부를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연산군때 유여림은 예조판서를, 유여림의 손자 유홍은 선조시기 좌의정을 지냈습니다. 이 유홍은 명나라로 가서 종계변무 사건을 해결하고 온 명신 중 명신이죠. 이 밖에도 유척기는 영조시기 노론의 영수로 영의정까지 지냈습니다. 유언호(유척기 조카)도 정조의 총애를 받아 종묘에 배향되었습니다. 주로 유(兪)씨, 그 중 기계유씨는 숙종, 경종, 영조, 정조시기 번성한 성씨로, 이후 순조 때도 문장가 유한준, 유신환 등을 배출하였고, 구한말에는 그 유명한 '유길준'을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입니다. 참고로 유길준은 우리나라 최초 미국 유학파 중 한 사람으로 동부 명문 사립인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를 다니기도(중퇴) 했죠. 아무튼 국내 한글 '유'로 표기되는 성씨중 유(兪)씨는 유(柳)씨와 더불어 우리역사를 대표하는 명벌이었습니다.
증조할아버님은 알고 있었다고 봐야죠. 고향에 몇 개 대성씨 외엔 머슴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씨는 머슴이라고. 선산 없고 마을 뒤에 그냥 묻었으면 희귀 성씨도 양반이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8대만 올라가도 지방에는 족보 있는 양반 한 명만 있는 반촌도 없는 곳도 있었다네요. 별거 아닌게 아니라 같이 없이 살아도 동네 사람들 나무 해 오라고 시켜도 됐구요.
워낙 많은 분들이 본인 관향(본관)에 대해 물어보셔서 답변을 달아드리는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한 번 답변해드린 관향(본관)은 질문하신 분이 답변을 삭제하시는 경우에는 다른 분이 물어보셔도 다시 답해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또한 개별 '파'에 대한 질문에도 ‘안동권씨’ 등 따로 파로 구별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답변해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파 정보는 한도 끝도 없고, 너무 지엽적이라 글을 읽는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전혀 되지 않고, 또한 해당 파 문중에 문의하시는 것이 훨씬 빠른 답변을 들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동권씨 복야공파요
인구수 대비 문과급제자나 정승 숫자로 성씨가 전통 양반이네 아니네 하는데, 아주 큰 오류입니다. 무과 급제자 까지 포함하여 보면, 지금 성씨 인구 순위랑 비슷합니다.
통계로 보면 김 이 박 순으로 관직을 역임한 성씨가 나열됩니다.
정승이나 대제학같은 고위관직은 성씨 인구수랑 관련없이 조선조에 세도가가 되었냐 아니였나 정도로만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조선조에 득세하다 단종복위사건으로 몰락한 순흥 안씨 같은경우 세종이후 문과급제자가 한명도 없습니다.
@@권가민-c3d 할아버지시넹
왕건의 왕씨도 이성계의 조선에서는 노비였다. 이것을 뒤집으면 상놈. 즉 노비도 먼 옛날에는 왕가였거나 왕의 가문이었을 것이다. 이런것을 밝히는것이 쓸데없는것이다.
어릴적 시골에서는 어른들끼리 누구집이 양반이고 누구집이 양반이 아닌지 모두 서로가 알고있었어요. 양반집중에서도 누구집이 진짜 큰 양반집이고 그다음은 누구집이고도 알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니까 이런걸로도 설왕설래하는 시대가 왔네요~~
김이박최정씨는 조선말때 평민들이 성을 돈주고 사서 마음대로 개명을 한게99.9프로 이기때문에 그외에 순위낮은 안 송 전 홍 유고 문 양 손 인구수 적은 성씨분들이 진짜 양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일성-q4d 개소립니다 위인전만봐도 김이박최정씨가 대다수죠 적은성씨라고 양반집이라고 부심부릴필요도 없습니다 애초에 나이키 짝퉁은 있어도 프로월드컵 짝퉁은 없는것과 같습니다
@@NaturalHwaN 글을 이해를 못하신것 같은데 위인전이랑 조선시대의 양반은 김이박이최정이 많은건 사실인데. 현대에서는 조선말과 일제시대이후 성을 유명한 사람것으로 개명하거나 가짜족모구매로 한국의 모든사람이 성이생긴거고 왕씨가문인 김씨가2천만명 잇는겁니다. 진짜 자신의 성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성씨인것을 알아보려면 300년이상 된 낡은 족보가 있거나 친가에 무덤이 10개이상 있는 가문이 진짜입니다 대부분은 그냥. 평민입니다.
나는 한씨인데 상것이라 술에 찌들어 산다
@@NaturalHwaN 위인전에 김씨야 신라시대때문에 몇있는거고 그외 김씨 위인전 있나? 이박최정씨도 마찬가지고
일제강점기때 성씨가 없는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성을 갖게 하였기에 당시 가장 쉽게 취득할 수 있던 성중에 하나가 김해 김씨 였다고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조모께서 하신 말씀인데 한국전쟁 이전에는 신분이 철폐되었어도 집안에 하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피난에 하인들이 모두 흩어졌고 후일 우연히 마주친 하인 중 한 명이 우리 집안 성씨를 쓰고 있어 놀랐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뿐 아니라 주민등록제도가 시작되기 전까지 성씨를 바꾸고 신분을 세탁하는 일은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21세기에 양반 성씨가 크게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MBTI, 혈액형 같은 작은 대화 주제인듯요 ㅋㅋ
희귀 성씨면 양반 아닌가
희귀성씨라해도. 삼국시대에 들어온 성씨라면 양반일 가능성이 크지요.. 그러나. 우리나라에 흔한 김, 이,박 씨는.. 진본여부 따질 필요가 큽니다.
그거 12가 있구먼
조상들로부터 얼마만큼의 가풍과 예절 심성을 물려 받았느냐가 양반의 척도가 된다고 보아야 정확할듯~~
매우 정답.
상놈집안 특징
김 이 박 최 씨가 많다.
식사예절이 상스럽다.
가족끼리 반말을 쓴다.
조상묘의 위치를 잘 모른다.
벌초문화가 희박하다.
제례를 쉽게 포기한다.
할머니할아버지한테 집에 하인있었냐고 물어보면 됨.
엄마 젊었을때 외할머니랑 길가다가 우연히 만난 어떤 할머니가 외할머니보고 ''애기씨''라고 했다함. 신분제철폐되었어도 하인이었던 사람들은 그 시절에도 그렇게 불렀다함.
족보는 위조가 가능해도 선산이나 가문조상이 벼슬을 했다는 임명장 임명장을 토대로 벼슬 급제를 했다는 사료는 위조가 불가능하죠 공명첩도 있긴하지만 위조여부 파악은 쉽습니다
@밴디국밥_YT ㄴㄴ 그냥 노비
선산있으면 양반?ㅋㅋ 오오
선산에 8대묘까지 있어야 합니다
@구구구구 찐양반쪽에서 자기노비들을 자기성씨로 편입시킴 조선왕정 복구하면 자기들 노비 찾으려고 재산이니까 즉 양반족보안에 노비족보가 있는거임 그래서 김이박등 성씨가 많은거고
김이박최정씨는 조선말때 평민들이 성을 돈주고 사서 마음대로 개명을 한게99.9프로 이기때문에 그외에 순위낮은 안 송 전 홍 유고 문 양 손 인구수 적은 성씨분들이 진짜 양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가집 김해김씨인데 상놈집안 같음ㅋ 하나같이 다들 어렵게 살아서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워, 집안에 수재는 1도없고 제사상은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 여자들만 일 하고 상다리 휘어진 음식가지고 나누면서도 누가 뭘 더 가져가네 내가 일 다했네 어쨌네 싸움ㅋ 이런 교양머리를 가진 집안 절대로 양반일 수 없다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필력 대단하십니다
혹 내 외사촌인가?울외가도 김해김인데 그러합니다만
그런데 왜 상놈 유전자 커밍아웃 누워서 침밷기 하누
본인도 교양머리 없는거 인증
625 이후로 죄다 상놈이 됐으니 성씨 탓은 아닌듯
김해김씨는 태반이 믿을게 못됌
우리나라 성씨의 80%는 왕건이 만들어준거임
본관은 고려 호족들의 영지의 명칭임
궁금해서 그런데 왜 그런가요?
@@qjsdjjr5097 일종에 기사 작위라고 보면 됩니다
벼슬을 내리면서 같이 성씨도 선물한겁니다
전 배씨인데 신라시대때 박혁거세가 하사해줬다네요
@@BreadFeel아닙니다 물론 시조를 배지타로보기는 하지만 성씨는 왕건에게 하사받았습니다. 그래서 시조를 왕건의 측근이였던 배현경으로 보기도합니다.
저도 경주배씨 입니다.
@@BreadFeel 박혁거세도 후대에 박씨라고 만든겁니다
양반 상놈이 뭔 상관이겠어요 양반이어도 상놈 짓을 하면 상놈이고 상놈이라도 지식과 덕이 있으면 양반이고 그렇죠뭐, 내 뿌리를 알고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많이 변했는데 아직도 양반 가문이 어쩌고 하며 행동을 지적하고 아는체하며 무시하는 어른들은 정말 별로 입니다,,,
..보고배운대로 행동하더군요 범죄 범법행위 문란. 사전에 아닐수도 있지만 가늠할순있죠.
변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양반은 모르겠지만…조씨는 믿고 거르는게 사이언스는 맞는거 같아요
그것이 방계인지 또는 첩으로 난것인지에 따른 기정이 전혀 없는 것에대한 의견이겠지요
개족보 ㅋㅋㅋ
성씨로 따지는게 아니라 본관순위로 따져야 합니다 저는 김씨지만 제 본관의 전국인구는 5만명정도 밖에 안되어 0.001프로도 안됩니다 물론 문과급제자는 있었구요 그만큼 위조되거나 남발될 확률이 적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6:26 여기서부터가 핵심임. 조선시대 70%가 천민이었는데 요즘은 너도나도 다 양반이래 ㅋㅋㅋ
우리집안은 양반이 맞음 ㄹㅇ
1858년 이후 양반은 전체 인구의 1% 입니다
천민이 70%라는 헛소리는 어디서 나온 말인가요? ㅋㅋ
@@umdarkssa6001 1프로 양반에 천민 70프로 나머진
평민이겠죠
본인 신 안동김씨 인구대비 합격자 수 1위인데 세도가들 중에서도 명문이라 일컫는데 전주 이씨보다도 양반일듯 인구가 많을수록 족보 사기 유리함 친인척에게 의심을 안사게되잖슴 반면 우리 가문은 인구 수도 많지 않음
@@하나님사랑이웃사랑 저는 구 안동 김씨인데 받갑소
조선시대에는 김씨가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으며 특히 광산김씨나 경주김씨가 김해김씨 보다도 많았다고 합니다. 과거급제 숫자를 보면 조선전체의 역사속에서 김해김씨의 급제자가 120명 정도인데 순흥안씨와 비슷한 숫자죠. 단정지을순 없지만 조선시대의 김해김씨 비율은 순흥안씨와 비슷한 성씨비율일 가능성이 큽니다.
무과 1위는 김해김씨 1400명이 넘습니다
인구수가 많은 광산김씨 경주김씨 김해김씨가 다 양반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구수가 적다고 양반이다 그건 더
양반이 이닐수가 있습니다 전주이씨가 그 예 입니다
@@김승옥-z2q 우리 외가도 외할아버지 7대조가 김해 김씨 무과급제자.. 영정조시절 그분 고향이 유배지로 유명한곳.. 김해 김씨 가문들이 무과급제자들 많았다고함
양반 아닌 사람이 무과 가능?
현대에서 성씨로 양반, 또는 상인, 천민 절때 구분못합니다
역사에 양반을 돈으로 구입하고 여기서 촉보까지 구입했던 시절이 있어습니다 따라서 성씨로 알수 없습니다
즐감~
이것도 흥미로워요.
앞으로 더 번창하시길~
네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솔직히 고려시대때 기득권이 귀족하고 왕족들이 상놈이 노비 백정 기생 무당 등등 천한 신분이 된거라서 뭐라 하기도 좀 그런거야. 신라 백제 고려구 발해 귀족 황족들도 고려때 신분이 상놈 백정 노비 기생으로 몰락한 집안도 많았고 반대로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신분상승으로 귀족이 된 경우도 있어서 조선시대 족보만 가지고 뭐라 하기에 좀 ㅋㅋ그런거야.
그 많던 개똥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ㅋㅋㅋㅋ돌쇠도
10명중 8 9 은 상노무 자식 후손이지 ㅎㅎ
마당쇠 ㅋㅋㅋㅋ
멸종했소. 아님 어렵게 뇌물을 써 공명첩에 이름을 올리거나.
김 이 박 으로 다 흩어졌지. 저걸 보고도 모름? 통계가 이야기해준다
족보판별하는 법도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상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다 옛말입니다. 조상 중 누군가 능력이 좋아 나라에 공을 세우고 신분이 상승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자기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맞아요
꼭 족보없는 애들이 이러더라 ㅋㅋ
@@신씨네-b2x 어디 신씨인지^^ 니네 족보요^^
@@YSCh01-xj8vz 거창이요 ㅋㅋ
@@신씨네-b2x 상놈입니까?
청송심씨인데 어릴때 연세좀있으신분들이 심씨라고 하면 양반집안이네 이런소리를 많이 하셨음
심의겸 심충겸 붕당 출연의 원흉
봉사로 유명한 집안입니다. 인당수를 헤엄친 심학규.
@@kownwoo4521 그래서요? 😂 ㅋㅋㅋㅋㅋ
@@bss5543 열등감폭발 ^^ ㅋㅋㅋㅋㅋㅋ 불가촉천민 나부랭이 ㅋㅋㅋㅋㅋㅋㅋㅋ
@@bss5543 잡종의 절규 ㅋㅋㅋㅋ
불.가촉.천민 주제에 ㅋㅋㅋㅋㅋㅋㅋ
옛 어른들보면, 망국 조선의 부패한 양반이 뭐가 자랑스럽다고 그러는지들 양반족보에 못끼어서 유난들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외국에서는 공장과 자동차, 기차, 비행기를 날리고 있을때 조선은 곰방대나 물고 사대주의나 주절대며 자국민을 착취하고 있었죠. 양반은 부끄러운 과거일 뿐입니다.
노비 정책을 체계적 정착시킨 장본인 세종대왕.
"그래도 반쪽은 밀양 박씨야" - 박영규
ua-cam.com/video/tFFhdaxJ5SI/v-deo.html
ㄹㅇ 이 댓글 띄워야 하는뎅
으르신들 순풍산부인과 박영규 조상편
꼭 보십쇼. 유튜브 검색 하면 나옵니다.
자지러지게 웃으시고 정신들 차리시길
알고리즘에 이끌려 보게되었습니다. 혹시 상산 김씨도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지금껏 김해김씨라고 알고 있었는데 얼마전에 상산 김씨라는 걸 알게되어 무척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몇칠전에 아빠가 우리가문은 양반가문이었고 저는 안동권씨 복야공파 37대손 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궁금해져서 댓글을 씁니다
안동권씨가 그렇게 좋은건가요?
안동권씨가 70만명이나 되던데 제가 양반가문일 확률?
안동권씨중에서 복야공파는 인구수가 얼마나 되나요?
위에 ‘우리 한국인은 어떻게 모두 양반 후손이 되었을까’ 에도 권씨 나오네요.
사실 안동권씨는 인구가 70만으로 인구 자체는 꽤 됩니다. 대개 권행을 시조로 한 안동권씨에서 여러 관향으로 분파되었다가, 조선후기 다시 안동 단본으로 합쳐진 케이스인데, 문제는 그중 본래 권행의 안동권씨에서 분파되지 않은 것으로 유추되는
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님 복야공파는 본래 안동권씨가 맞는 것으로 유추됩니다. 왜냐하면 복야공파에서 고려말 권한공이 재상격인 시중을 지냈고, 조선초 태종시기 권중화가 영의정이 된 것으로 봐서 현달한 역사가 상당히 깊고 오래됐고
다르게 말하면, 이는 복야공파가 본래 권행을 시조로 하는 안동권씨가 맞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복야공파의 유명한 인물로는 권벌이 있는데, 이 권벌은 명종시기 원상(院相)으로 현 봉화 유곡권씨의 닭실마을 종가의 시조격이죠.
덧붙여 유곡권씨는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유(柳)씨와도 통혼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죠.
며칠전
권은비가 좋죠 ㅎㅎ 아웃풋 최고라 생각함
다 뻥입니다.저도 안동 권씨인데 선산도 없고 어릴적부터 문중 모임도 없어요. 굳이 얘기 않해도 주변 상황 보면 내가 양반 후손인지 가늠 할 수 있슴. 소,돼지 때려잡고 산 가짜 양반입니다. 지방도 쓸 줄 모르면 상놈입니다.
함경도 촌구석에 살던 친가는 평민일 거예요.
태조 이성계가 함경도 사람은 등용하지 말랬는데요.
무관이었을 확률이 높을 겁니다. 국조문과방목에는 비교적 자세히 인명이 올라있으나 무인들은 빠진게 너무 많아서 추적이 불가능하고 북방지역은 무인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니, 평민이라 할지라도 조상이시니 뿌리를 소중히 여기심이 맞는 듯합니다.
상놈, 상놈하는데...조선시대 신분제는 기본적으로 양천제라 해서 양인과 천민으로 나뉨. 상놈이라 불리는 상민도 양인에 속함. 성씨도 있었고, 문과는 어려워도 무과 잡과에 응시할 수 있었음.
성씨로 양반상놈 구분하는데 진짜 의미없는데... 조선시댄 양반비율이 몇프로밖에 안되고 장원급제하는 인물 그렇게 많이 배출하려면 그 집안이 유전적으로 머리가 일단 좋아야함.. 양반들은 결혼도 함부로 안했으니 이것저것 따지고 했으니 자손도 그리 많지도 않음...자손 있어봐야 첩소실이 더 많지.. 그리고 조선말전부터 세도정치로 얼마나 많은 양반가들이 몰락성쇠를 거듭했는데...잘살던 양반들도 노비로 전락하는데 부지기수...무엇보다 조선말에 족보 위조 판매가 성행해서 조선말에는 70프로이상이 양반이었음. 거기다가 식민지, 6.25겪으면서 그런게 제대로 남았을꺼라고 생각하나? 일단 가슴에 손얹고 생각해보자..지금 가진 유전자로 장원급제나 근처나 갈 수 있는지..생각해보길...당장 수능 상위 3프로 안에도 못들어가면서.
양반이 원래 문무양반을 가르키는 것이라 문과만 따질 것이 아니라 무인집안도 양반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현대에 비교적 인구수가 적으면서 조선시대에도 희성이 아니었던 성씨면 나름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로 보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이라면 세컨, 써드를 거느린 건 기본이었고,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것은 물론, 평민의 자식이라도 머리가 좋거나 등 여러 이유로 자기 호적에 올렸던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조선 후기는 사실상 노비제가 붕괴되던 상황이기도 했구요.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 양반상놈 따지는 건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보입니다.
여흥민씨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용..? 족보가 위조됐을가능성이 높나요?
아니요.
지금 여흥민씨 족보 위조에 대해 물으셨는데, 일단 국내 민(閔)씨는 사실상 여흥(경기 여주) 단본으로 고려말 권문세족으로 출발해, 조선시기 전체에 걸쳐 명문거족이었던 명벌 중 大명벌이었습니다. 가문이 현달한 것은 고려 인종시기 동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낸 민영모(閔令謨)때 부터인데, 현 여흥민씨에서 시조로 잡는 분은 민영모의 증조부인 민칭도(閔稱道)입니다. (다만, 민칭도는 그 내력이나 계보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기에 일반적으로 민영모 부터 가문 성세를 얘기함. 대체로 여흥민씨 대종회에서는 민칭도의 선계는 공자 제자 중 한 명인 민자건의 후손으로 보는 설도 있고 여러 설이 있음. 참고로 중국에서 閔씨는 魯나라 임금 중 한 명인 閔公의 후손들이 조상 시호를 氏로 채택한 경우로, 곧 魯나라 公族 후손이자 周나라 왕실과 同姓: 姬姓계열!) 아무튼 인구가 많지 않음에도 워낙 명벌로 수백년동안 유명하게 번성한 가문이라 사실상 따로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요.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16만 가량인데,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42명(인구 대비 엄청나죠!), 왕비(대한제국 황후 포함) 4명, 정승 12명 등으로 극도로 현달하였고, 인구도 그리 많지 않고, 워낙 명문으로 수백년 동안 흥했던 가문이라 현 국내 민씨는 거의 대부분 명벌 후손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곧 평민이나 천민 투탁률이 굉장히 낮은 관향 중 하나입니다.
@@인문학프로파일 우왕 감사합니다!!
마한 원왕의 67대손인데 왕족 취급을 받을 수 없겠저?!!학교 에서는 왕족이라며 친구는 칭찬해 줘요.🎉😢😂❤😮😅😊그리고 좋은 영상 감사 합니다.
김이박최정이 가장 흔한 성씨가 상놈들
젤 많음
인구가 많을 수록 평균이 떨어지는건 당연한 논리인데ㅋㅋㄲ 기초교육도 못 받았오..?.. 이게 현대판 노비 아니냐..
한국전쟁의 몇 안되는 이점이 바로 족보가 2천년간 이어진 신분제 잔제가 제대로 파괴됐다는 점이죠
진짜 유서깊은 종가집 아니면 그 족보가 진짜인지 모르는 상황이 생기더라구요
그냥 흔한 본관이다 싶으면 양반이 아닐확률이 높음
개족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에요
행동으로 양반과 상놈을 구분할 수 있음. 현재에도 양반과 상놈이 있음. 밥먹을때 후루룩거리고 옳고 그름에대해 부끄러움도 모르고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큰소리내고 따지면 장땡인줄알고 법적으로 양반이 사라진 지금 천민들이 날뛰기때문에 나라가 어수선한거임. 대표적으로 딸바보부모가 딸이 옳고 그런것도 모르게 공주처럼 키우는걸보면
알수있음. 아! 저 집안은 천민집안이구나.
공감이 갑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귀족 ( 양반) 들이 있어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선다. 현대는 상놈들의 시대다, 기생 (연예인 ) 무당 (종교인) 광대 ( 연기자 영화배우)들이 기득권을 얻고 신 귀족 행세를 하고 있다. 충효 , 도덕 , 의리, 지식, 지혜 가 사라진 파렴치한 인면수심의 쌍놈들의 세상이다.
맞아요 대중교통 이용할때 진짜 천한 짓하는 인간들 신분이 다 보입니다 ㅋㅋㅋㅋ..
안녕하세요! 청주한씨는 어떤가요? 족보가 위조되었을 확률이 높은가요?
저희 청주 한씨 시조의 뿌리가 고조선 준왕 입니다.
왕족입니다 . 양반따위와 비교를 하면안되죠
마당쓸고, 소,돼지 때려잡고 번 세경,돈으로 산 족보가 함정.
우와 저도 청주한씨예요!
나주 나씨는 어떤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괜찮은 양반가 입니다. 님 나주나씨는 아마 나부를 시조를, 나득규를 중시조로 삼을 것입니다. 아마 중시조 나득규 부터 세계가 정확할 텐데요. (시조 세계, 행적이 전해지는 게 많이 없고 계대가 불명확하고 중시조부터 정확한 경우, 이런 대표적인 예로 창녕조씨가 그 일례, 이런 가문 많음.)
아무튼 현 인구 11만 정도인데, 조선조때 대과 27명을 배출한, 아무튼 배출할 만큼 배출하였고, 생원이나 진사 합격자는 많은 수를 배출했기에 조선조 내내 양반가가 맞습니다.(참고로 인구 30만으로 님 나주나씨보다 인구가 훨씬 많은 거창/강릉 유씨(묘금도 류자 쓰는)가 대과 23명 정도 배출, 한번 비교해 보시길.)
다만, 확실히 유명한 사람이 없었으나 구한말 대종교 창시자이자 항일운동가인 홍암 나철 선생을 배출함으로써 확실한 유명 인물을 배출하였고, 현재 유명 인물로는 나경원 같은 이가 있죠. 홍암 나철 선생은 대종교 창시자로 유명한데, 대종교는 사실 종교라기 보다는 '항일무장운동단체'적인 성격이 강하지요. (역사적으로 재평가가 필요한 부분)
그리고 한가지 아셔야 할 것은 님 족보에 보면 시조 나부가 송나라 귀화인으로 돼 있는데, 그건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아마도 흔히 조선후기 각 족보마다 행해진 모화사상의 일환이고, 아마 그냥 한반도 토착출신 같습니다. 이유는 나부의 중국행적이 잘 보이지 않고, 나주나씨가 오랫동안 나주의 망족(명망 있는 집안)이었기에 그냥 토착계로 보입니다. 아무튼 훌륭한 가문입니다. 자부심을 가지시길.
ㄷ
나주 배가 유명 하잖아요
진짜 구한말 뿌리깊고 잘나간 집안을 알 수 있는 방법
1. 본인의 증조부 혹은 고조부가 영어를 배웠거나 영어 학원을 차렸다.
2. 일본으로 유학을 갔었다.
3. 정미소를 크게 운영하였다.
아니고 그냥 농사 지으신 거면 그냥 양반가여도 무늬만 양반일 확률이 높습니다 .
맞아요ㆍ근데 반만맞음ㆍ유학은 돈많아도 재벌들도 영어공부못하면못감ㆍ그당시는 영어공부나 외국어대한두려움이커서 영어한다거나 유학간다는건 진짜진차 진취적이란거임ㆍ
농사꾼이어도 잘나간다고볼수있음ㆍ
@@user-sunny_simpathyize 정미소 크게 운영하였다 썻잖어
그냥 소작농은 해당 안된다는 얘기고
헐 저희 증조부는 영어,일본어,한자에 능통하시고 공무원이셨음.. 설마
시골에선 신분세탁이 불가능했습니다. 그건 도시에서나 가능했지요
특정 지역이라면 양반 사는 동네가 있고 평민이 사는동네가 있고 평민도 못한 자들이 사는 동네가 있음 평민도 못한자들이 사는동네는 예를들자면 역촌이라고 있어요 거의 각지역에 있음.. 60년대 이전에 어느 지역 어느동네에 사셨는지에 따라 따져보면 나옴
조선초는 양반보다 상놈 인구가 훨씬 많았고. 조선말은 돈주고 살 수 있어서 상놈보다 양반 인구가 더 많음. 조선 초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찐 양반은 지금은 다 섞여 있어서 의미 없음. 그리고 조선말 성씨를 살때 사람들이 금을 가장 좋아하므로 김씨가 제일 많은 것. 섞여 있지만 확울적으로 상놈피 비율은 김씨가 전반적으로 가장 높다는 말. 그 다음은 왕의 성이라 이씨를 많이 샀기 때문에 이씨.
근데 김씨 중에서도 성공하신 분들 되게 많아서 피 이런건 안 중요한것 같아요
21세기에 사는 사람은 본인의
조상이 양반이었다는 것보다는 혈통이 잘 보존되어
왔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을
알아 보고자 하면, 대략적으로
약 500년 전부터 내려온
선조의 묘와 좌의 위치를 알고
묘제를 지내고 있다면
혈통이 있는 성씨 ㆍ또는
가문이다 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각자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안동권씨에 대해 댓글로 알려주셨지만 혹시 안동권씨 복야공파에 대해서도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복야공? ‘늘 억울한 태리씨’에 답변 있던데요.
@@sunghowoo2618 감사합니다
성씨는 중요하지 않음
인간이 되는게 먼저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ㅎㅎ
우리 고조부님 조선말 마지막 풍기군수하셨씀. 보관은 덕수이씨. 이순신. 이율곡의 후손.
윗대에서 벼슬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벼슬을 못 했으면 별 볼일 없는 집안으로
보면 맞지 않을까요?
어떻게 성씨족보를 그렇게 빠삭하게 알고계신가요? 대단하십니다!
그럼 슬쩍 남원 양씨 질문 드립니다..ㅎㅎ
님이 남원양(梁)씨인지, 남원양(楊)씨인지 한자를 기재하지 않아 정확히 모르겠다만, 확률상 '남원양(梁)씨'로 보아 그에 맞춰 서술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국내 양(양+량)씨는 한자로 4개 정도나 됩니다.
가장 흔한 것이 양(梁: 대들보 량)씨이고, 그 다음이 양(楊: 버들 양)씨입니다. 전자는 본래 옥편 기준으로 그 음이 '량(梁)'이지만 국내 두음법칙으로 '양'으로 발음됩니다. 그에 비해 후자는 본래 음이 '양(楊)'입니다.
아무튼 양(梁)씨는 국내 2015년 기준으로 46만명이나 되고, 그중 남원양씨가 30만이 넘고, 제주양씨가 14만명이 넘습니다. (이밖에 충주양씨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관향 모두 제주 탐라국 고(高)을나(탐라 임오군왕), 양(良)을나, 부을나 신화의,
이 중 양을나의 후손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고대 탐라국 제주 지배자 중 맏형이 양을나 라고 양(梁)씨 대종회에서는 현재 주장하고 있습니다만(고씨 대종회에서는 다른 주장도 함.), 아무튼 확실한 건 양(梁)씨가 고(高)씨에 비해 제주 군주(임금) 자리를 오랜기간 동안 차지하지 못했고,
탐라국 전기는 주로 고씨가, 탐라국 후기에는 탐라국의 동서를 고(高)씨, 문(文: 본래 고씨 사위가문)씨가 함께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탐라국 군주를 加, 孤, 具씨 등도 잠깐 했었다고 전해지기도 하죠.)
아무튼 다시 돌아가, 그 중 남원양씨는 신라 경덕왕때 사람이라는 양우량을 시조로 합니다. 그는 경덕왕때 공을 세워 제주에서 남원으로 분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낙 오래전 인물이고 문헌이 많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기 힘들고,
양(梁)씨 대종회에 의하면, 훗날 양능양(梁能襄), 양주운(梁朱雲), 양수정(梁水精)을 각각 1세조 하여, 병부공파, 용성군파, 대방군파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양우량을 시조로 하는 남원양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46명을 배출하였습니다.(남원양씨로 국한시켜 말함!)
사실 인구 30만에 대과급제자 40여명 정도면 그 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남원양씨는 고려말 양백익(공민왕시기), 양천룡(공민왕시기)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명신을 배출하였습니다.
가령 조선 세종때 대제학을 역임한 양성지는 꽤 유명했고, 양성지의 손자인 중종시기 우참성, 촤찬성 등을 역임한 양연도 남원양씨를 현달시켰습니다. 양성지의 13대손 양헌수는 병조판서, 한성부좌윤 등을 지내 명문으로서의 긍지를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남원양(梁)씨는 문과급제자(대과) 합격자 숫자는 적지만, 주로 고위직 벼슬을 대대로 한 가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자부심을 가질 만한 관향이라고 사료됩니다.
덧붙여 양(梁)씨는 중국에서는 꽤 흔한 성씨로(20위 정도?) 수말당초 시기 대량황제(大梁皇帝), 해사천자를 칭한 양사도(梁師都)가 그 주요 인물입니다.
와 지립니다 형님
@@인문학프로파일 안동권씨는요?
@@인문학프로파일 남원 양씨는 1985년과 2000년 조사 땐 약 21만 명으로 집계됐는데, 2015년에 갑자기 9만 명이 증가한 이유를 혹시 아시나요?
@@인문학프로파일 중국 성씨입니다
늦었지만 안동권가 동정공파도 여쭤볼수있을까요? 소수파인듯 해서 궁금합니다 :)
그 보기힘든 광산 탁씨입니다..... 탁씨 젤 많이 본날이 친가 결혼식날..
탁재훈이신듯
나주김씨입니다.
37년간 살아오면서 나주김씨를 한번도 못봤는데 나주김씨는 어떤가요?너무궁금합니다.
나주(금성, 금산)김씨는 조선조때 기준으로 전형적인 무과 명문 집안 입니다. 나주김씨의 시조 김운발(김굉 아들)은 경순왕의 손자로 전하며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나주김씨 측에서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가문이 현달하는 시기는 고려말기 김극순이 대제학에 오르고 동문선에도 이름을 올리면서 가문이 비로소 현달하게 됩니다. 조선조때는 태종시기 김정준(나주김씨 중시조)이 중군총제 등을 지내면서 무과 명문의 기틀을 마련 하였습니다.
나주김씨는 조선시대 기준으로 문과급제자가 8명에 불과하지만, 무과는 무려 79명이나 됩니다.(현 인구는 5만이 조금 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임진왜란 시기 김충수(金忠秀)로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호조참판에도 제수됩니다.
정유재란 시기에 그는 순절하여 '우산사'란 곳에 제향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런 측면에서 봤을때 조선조때 기준으로 나주김씨는 전형적인 무과 명벌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능성구씨가 있습니다.
참고로 이 나주김씨에서 분파된 관향으로는 안로(나주 소속 속현)김씨(나주관향 후손 아니라는 설도 있음.), 교하(파주)김씨, 상음김씨, 해주김씨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인구를 모두 합한다면 인구가 그렇게까지 적지는 않습니다.
현재는 전남과 충청도 지역에 그 인구가 다수 분포돼 있는데요. 참고로 전북 출신인 소녀시대 태연(전북 전주 출신, 본명 김태연)이 이 나주김씨 입니다.
@@인문학프로파일 정말 감사합니다. 궁금했던 내용모두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 성씨 관련해 여기가 정말 최고인 듯! 내용도 깊고! 영상 퀄리티도 좋고.
경주 김씨 계림군파는 어떠한지요..
좀 늦었을지 몰라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경주김씨 계림군파는 김알지 후손 김균(조선개국 3등 공신)을 파조로 하는 경주김씨 파 중에 하나입니다. 파조가 조선 개국공신이라 조선조 전반에 걸쳐 상당히 현달한 명문거족입니다.
경주김씨 중에서도 명벌 파로서 특히 조선후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조선전기에도 명벌이었는데 후기에 더욱 현달했습니다.)
가령 김균의 증손으로 대사헌을 지낸 김승경, 김균의 손자로 청백리로 뽑힌 김종순, 직제학을 지내고 임금이 내리는 영예인 호당을 거친 김천령, 이 천령의 손자로 좌의정을 지낸 김명원(경림부원군),
숙종 장인 김주신(경은부원군), 좌의정 지낸 김사목, 조선말기-대한제국기 총리대신을 지낸 그 유명한 김홍집, 또한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으며 등의 저술을 남긴 독립운동가 김교헌(이 분은 사실 좀 안 알려졌지만, 사실 현 한국인들이 의무적으로 알야아 하는 분이죠.) 등등.
무수히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사실 인물들이 너무 많아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죠. 판서가 흔할 정도이니까요.
사실 경주김씨 자체는 인구가 190만에 가까워 인구가 제법 되는 편입니다만, 그 중에서 옥석을 가리자면 계림군파는 확실히 옥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봤을 때, 대부분의 경주김씨 계림군파는 조선후기 명벌의 후손으로 봐도 좋을 것 같네요.
@@인문학프로파일 답변 감사드려요~~^^
오 저도 경주 김씨 계림군파 36대손입니다!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 저는 경주김씨 계림군파로 항렬은 학자입니다~
아버지는 식자돌림 조카는 기자돌림이죠~
주변에도 식자돌림 학자돌림 친척뻘 되는분들이 있네요~
이런 경우도 추론 가능한가요?
외조모 변(어느 변씨인지 모르겠어요ㅠ) 외조부 김해김
조모 안동권 조부 파평윤
특히 조부, 외조모는 집성촌에 거주하셨었는데 이것도 단서가 될 수 있나요?
우리 성씨는400년 역사를 가진 마을이라 속일 수도 없다
3번째로 편찬된 강릉김씨 을축보(명종때)가 언급이 없어 아쉽군요.
저도 강릉김씨에요
조상대대로 조상 묘조성지가 있는 집안과 체계적으로 돼있는 족보가 있고 집안대대로 돌림자로 그 성씨 집장촌있는 성씨만 양반가문입니다
참고로 제사를 4회이상 안한 집안만이 가장 진실된 양반가입니다. 이유는 조선왕조 제사가 년 5회이상 못 해서 왕족버금가는 제사집안 졸보집안입니다. 현재까지도 경복궁 제사는 1년 5회입니다.
할머니 젊은 시절까지 본가에 종 있었다는거 안 믿었는데 진짜였나보네... 인터넷에 치면 나오는 집성촌 출신이긴 하지만
아버지때까지만 해도 집성촌출신이고, 증조부께서는 동네 글 모르시는분들 가르쳐주신다고 항교가셔서 글 알려주신 선비이셨다고 많이 들었던것 같아요. 선산도 몇개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팔은게 더많아서 좀 아쉽네요 ㅠㅠ
김이박최정씨는 조선말때 평민들이 성을 돈주고 사서 마음대로 개명을 한게99.9프로 이기때문에 그외에 순위낮은 안 송 전 홍 유고 문 양 손 인구수 적은 성씨분들이 진짜 양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일성-q4d 뭐라세요ㅎㅎ
@@newsum6627 김씨 이씨 중에 양반 왕족일 가능성은 0.0000001%프로라는 것입니다.
내이름.이토켄신 본관 교토
@@김일성-q4d 동감ㆍ서씨전씨정씨 양씨황씨 남씨 홍씨 이런 적당한수의 성씨가 찐임 강씨ㆍ송씨ㆍ안씨.윤씨.한씨 이런 많은수의 성씨들도 석연찮음ㆍ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명단이 적힌 방목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과인 사마방목 그러고 댸과인 문과 방목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확인하면 개인 급제자의 성씨 본관별 명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대로 이어오던 선산이 있는지가 중요.
조상이 양반이었든 상놈이었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금 돈 많으면 그게 양반입니다
집성촌 있더라도 대개 의미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가문이나 족보랑 성씨 사고 팔앗는데 김이박최정 이게 무슨상관이냐
진짜 본관이 레어 아니면 다 상놈이라고 봐야함
안녕하세요~ 부산에 거주 중인 대학생입니다. 혹시 일직(안동) 손씨는 어떤가요? 제가 알기로 고려 말 송나라에서 건너 온 시조가 "순"씨여서 당시 현종?과 겹친다 하여 "손"씨를 하사 받았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의 집안인지 모르겠어서 질문드립니다!
역시 단순히 씨로만은 유명한 양반가문이라도 그 가문 구성원이 양반인가는 알기 힘들죠.
신안동김씨는 유명한 양반가고 숫자도 5만명 남짓이지만 저희 파벌인 호장공파는 양반가문이 아니라 중인계급이였으니까요. 3대라는 빡빡한 규정을 조선왕조 500년간 유지하기도 힘들고...
후안동김씨가 왜 양반인지...ㅡㅡ 쓰레기 가문중 하나인것을
@@남상종-l4n초면에 싸가지 없는 현대 상놈만 하겠습니까?^^
@@Andrew-eg3ol 감사하오 ㅎㅎ
(위조된 족보인지 실제 혈연적으로 그 성씨가 맞는지랑은 별개로) 같은 성씨인게 파가 다르다고 양반, 중인, 상민이 갈릴 수가 있나요? 호장공파도 파조 자체는 댱연히 양반인데 후손이 중인일 수 있나요? 3대 규정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요?
@@sjkim3378 호장공파는 고려시대부터 안동의 호장이였던 지방토착세력이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중인으로 격하되었습니다. 파벌마다 지방에 남았던 지방토착세력은 고려때는 지방 호족이였으나 조선시대에는 호장이나 이방을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고 호장공파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호장공파가 역사에서 대두된건 19세기부터 인데, 19세기에 유력 기존 중인세력였던 안동권씨 중인계열과 같이 경상도 영방직을 독점한 유력 중인가문 중 하나입니다.
수원 백씨는 어떠한지 여쭤보고 싶어요!
백씨는 지금은 수원 단본으로 통합되었는데, 과거부터 말이 많았죠. 여러 이본들은 수원 단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죠. 아무튼 국내 백씨는 고려말의 명신이자 공민왕-우왕시기 정당문학 직산군 백문보(대흥백씨)가 가장 유명하죠. 현재 전체 인구 40여만에 가깝고, 조선조 때에도 문과급제자가 70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압니다. 이 정도면 상당히 양호하죠. 양반 신분은 유지했을 뿐더러, 꽤 괜찮은 세를 과시했다고 봐야겠죠. 근데 문제는 조선조때 기준으로 확실히 우리 국민 모두가 알 정도로 이름난 분이 없다는 것인데, 사실 알고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게 율곡 이이의 스승인 '백인걸(수원백씨)' 같은 분이 계시기에 이 분을 좀 연구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백문보 같은 이는 공민왕과의 대화에서 우리민족의 '단군기원설' 이거 하나로 항상 회자되시는 분이죠. 백문보 님 이분의 살아생전 행적보다 이 공민왕과의 이 대화 하나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죠. 백문보.... 여러모로 우리 민족 전체에게 굉장히 소중한 분이죠.
직산군을 잘 아시내요
나주김씨 38대손 입니다 종손 장손은 아님니다
애들 족보에 올려야 할까요? 돈달라고 하던데
종친회에서 파는 경순왕파 로 알고 있습니다 신라 폭망시절 경순왕 손자분 김운발 시조임 갑자기 관심이 생기네요 고려 왕건 시절에는 개성에서 살았다고 합나다 그리고 조선시대 부터 지금까지 김포시에 살고 있습니다 나주김씨 관련 자료를 아이들에게 남겨줘야 할까요 딸3명임 다국적 글로벌 시대라
그런데 예전 궉채이 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궉씨더라고요…. .. 신기.
국내 궉(鴌: 鳳의 이체자)씨는 본관이 순창, 선산, 청주 등 입니다. 국내 궉씨 인구는 채 수백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작 2백명이 조금 넘는 정도로 파악됩니다.
이중 청주 관향은 명나라에서 파병된 장수 궉시영(鴌時永)을 시조로 삼고 있습니다. 궉시영은 사료에서는 사실 파악이 잘 안됩니다.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조선조때 이수광의 에는 "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유래를 알 수 없고 胡姓이라고도 한다." 라는 기록이 있고, 실학자 이덕무는 에서 "선산에 궉씨촌이 있는데 선비가 다수이다." 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수광이 인조 시기 사람이고, 이덕무가 정조 시기 사람인 것으로 봤을때, 궉씨가 최소 수백년 전부터, 늦어도 임진왜란 이후 부터는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추가 하나 가능한데, 곧 임진왜란 전후 중국 등 어디에서 궉씨가 귀화했을 가능성, 또한 선비가 많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들 자체가 신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방증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 궉씨 종친회에서 내세우는 궉씨 시조가 임진왜란 전후 중국 등지에서 귀화했다는 설은 꽤 근거 있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문제는 중국에서 사실 궉씨가 없는 성씨라는 점에서, 혹여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하더라도 본래 鳳씨였는데, 봉을 이체자로 표기해서 '궉씨'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궉채이(세계롤러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 2관왕)는 청주궉씨 19대손으로 궉씨를 알리는데 일조를 한 사람이죠.
질문자 님을 포함해 현재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이 이 궉씨를 아는데는 이 궉채이 선수가 한 몫 했죠.
이와 비슷한 예로는 방송인 판유걸이 해주판씨를 전국적으로 알린 것 정도가 그 비등한 예로 볼 수 있겠네요.
* 참고로 중국 鳳씨는 전설상의 인물인 여와씨 후손, 마찬가지로 전설상의 제왕인 제곡 고신씨 후손, 그리고 역사상의 인물인 周나라 文王 후손 등으로 그 후손들이 있다고 중국 봉씨 측에서 소개돼 있네요.
궉씨?
중국성씨 에요.
신분제 폐지는 세상 이치가 그런 거라는것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귀한 자는
신분이 높은 집에서 태어난것 아니라
그의 행동이 고귀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문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성씨보다 성씨와 본관을 같이 봐야하는게 정확하지. 우리나라에 김씨가 많은 이유는 북방유목 민족이었던 흉노의 소수지배층과 가신들 일반병사들이 신라로 들어와 지배층과 왕이 되고 신라와 통일신라 약 1000년의 왕과 귀족이 김씨였으며 통일신라가 왕건에 전쟁없이 나라를 고려로 넘겨주는 조건으로 신라의 왕과 귀족이었던 김씨가 고려 500년동안 다시 귀족신분으로 대우를 받고 삼. 성씨가 없던 하층민들이 김씨로 많이 유입된것도 한반도에서 가장 잘나가던 성씨가 김씨였기 때문임
100% 맞는 것은 아니지만 며느리가 시댁에 오면 양반 집안 전통이라고 하면서 한복만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부엌일을 심하게 시키는 것 등 유난히 며느리에게 엄하게 구는 등 티를네는 집들은 양반집 머슴살이하던 놈이 한일합방 덕에 주인의 성을 받아 양반이 된 "설익은 양반" 집안인 경우가 많다.
혹시 장수 황씨는 어떤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황희(영의정) 정승과 그의 아들 황치신(호조판서. 우의정 증직), 황수신(영의정: 남원부원군)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 전체 황씨 인구가 70만에 가까운데, 그중 17만이 장수황씨입니다. 조선조때 대과급제자가 44명 정도로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인구대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일단 그런 걸 떠나서 황희 정승과 그 아들들이 정승을 했기에 당연히 명벌이죠,(황희 정승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다만, 조선 선조시기 사이코패스로 유명한 서자 왕자 순화군의 부인 장수황씨는 시집을 잘못 갔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근데 애초 순화군에게 시집간 거 자체가 장수황씨가 명벌이라서 간 것인데... 아무튼 성씨 자체는 황희의 후손이자 명벌입니다.
족보 발행이 제일 성했던 때는 1920년대 입니다. 진짜 양반이니 아니니는 알기 힘들고 많이들 섞여서 별로 의미 없습니다. 주로 희성이 양반일 확률도 높습니다. 흔성은 글세요.
어릴적에 우리 어머니가 희궈 성씨이고 같은 동향인데 어머니 친척들이 한국에서 유명한 집안 광x 김씨, 전x 이씨 집안에서 어머니 집안이 양반 집안이라고 하시던 모습을 이제야 이해 하겠네.80년대 이야기이지만.
웃자고 하는 소리니깐 웃자는 소리에 덤비는 분들 없길 바랍니다... 80년대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가있는데
"천방지축마갈파" 라는 말이 있었죠... 양반이 아닌 계급이 낮은 계층을 이야기할때 이렇게 이야기했던것을
기억합니다..물론 80년대 이야기이고....농담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일뿐... 아무런 의미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제 성이 (창녕 성)성씨인데 어떤 가문이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흔치않아서요
초계 변씨 31대손 입니다. 집안에 선산도 (산에 조상님들 많이 계셨습니다) 있더라구요. 조선 후기에? 족보 유입이 많이 된걸로 아는데 초계변씨도 유입이 많이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명가 인지도 궁금하네요ㅎ
오 심씨 나와서 놀랬네 혹시 청송심씨 동지돈령공파 좀 알려주실수 있나요
청송심씨는 심홍부를 시조로 합니다. 심홍부는 고려 충렬왕때 위위시승을 역임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가문이 고려초나 고려 중기로 그 시조를 잡는 것에 비해서는 사실 청송 심은 다소 늦은 감이 있습니다.
가령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은 왕건을 도운 고려 개국공신, 문화유(柳)씨 시조 유차달(柳車達)도 고려 개국 공신이었죠.
(그러나 아시다시피 청송심씨 그 가문의 현달과 성세聲勢는 가히 타 가문에서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역사에서 번성했지요.)
2015년 기준으로 국내 심(沈)씨는 전체 인구가 27만으로, 그 중 청송심씨만 24만 가량됩니다. (대부분 청송심씨!)
조선조때 정승을 2명 배출한 풍산심씨도 있고 다른 관향의 심씨들도 있지만, 대체로 청송심을 대종으로 하여 모든 沈씨를 청송심과 동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이설도 있습니다.)
사실 저희도 규칙이 있는데, 이미 한 번 이상 물어본 관향 / 이미 유튜브 방송 등에서 소개한 관향 / 또한 덧붙여 '파'는 언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파 같은 경우는 너무 지엽적이라 한도 끝도 없고, 읽는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안동권씨 같은 경우는 실상 파로 가문을 구분할 수밖에 없기에 이전에 파에 대해 답변해 드린 것.)
아무튼 앞서의 이러한 이유로 청송심씨는 간단하게만 답변해 드리자면, 시조인 심홍부의 증손 심덕부(沈德符)가 고려 우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이 심덕부는 이성계에도 협조하여 곧 위화도 회군 계열에 동참하여, 공양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봉해져서 가문이 크게 현달하게 됩니다.
조선조때 심씨는 현달한 것을 넘어 완전한 최고 수준의 '명문거족'이었는데, 그것은 사실 이 심덕부의 공로가 큽니다. 심덕부가 이성계에게 협조하여 조선초에도 沈씨는 지속적으로 명문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곧, 그 시작이 심덕부인 셈이죠.
사실 심덕부는 잘 안알려져 있어 그렇지, 상당히 입지전적인 인물로 고려 충숙왕때 음직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으로 출사를 시작하여, 우왕시기 우상시(右常寺), 예의판서(禮儀判書), 우왕 4년에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서해도원수라는 직책도 겸직하여 장수로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웁니다. 무인적인 기질도 가진 그의 이러한 이력은 훗날 이성계와 친분을 쌓게 되고 실제로 조선성립 7년전 북청 침입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토벌하는 성과도 올립니다.
곧 심덕부의 무인적인 기질과 경험이 궁극적으로 이성계와의 교분을 쌓는데 도움이 된 셈이고, 이는 훗날 심씨가 조선성립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현달하게 되는 연유가 되게 됩니다.
아무튼 심덕부는 조선이 개국되자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어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좌정승(左政丞)에 이르게 됩니다.
(참고로 조선초에는 조선도 고려초나 중국 皇帝, 天子들처럼 공후백자남의 봉작을 합니다. 그러나 태종시기 이는 폐지돼 조선은 군호(君號) 봉작만 합니다.)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 심온(沈溫)은 세종의 장인(국구國舅라고 하죠.)으로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으며(태종에 의해 가문이 풍비박산 나지만 세종 말년 가문이 회복됩니다. 완전히 복권되는 것은 심온의 외손자인 문종시기, 곧 문종이 복권 시킵니다.),
심온(沈溫)의 둘째 아들 심회(沈澮)도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진봉 됐습니다. 뒤이어 심회(沈澮)의 증손인 심연원(沈連源)도 명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졌고,
심연원(沈連源)의 아들 심강(沈鋼)도 명종의 장인(國舅)으로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더불어 심강(沈鋼)의 손자 심열(沈悅)도 인조 때 영의정이 됩니다.
심열(沈悅)의 고손 심호(沈浩)도 경종의 장인(國舅)으로서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참고로 부원군은 왕의 장인이나 공신 등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왕자가 봉해지는 대군, 군과는 다르게 '관향+부원군'이라는 명호가 붙습니다. 부원군 명호를 지을때는 관향을 그대로 쓰거나 아니면, 관향 두번째 글자를 原, 城, 川, 陵 등으로 바꿔 짓습니다.
가령 풍산(하회)유(柳)씨인 유성룡(柳成龍)은 풍원부원군 등등*
이를 보면 알 듯이 청송심씨는 왕비를 대거 배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국구나 재상의 반열에 오른 자가 무수히도 많은 가문입니다.
그 가문의 성세가 조선전기, 조선후기에 국한되지 않고 조선초부터 조선말까지 이어졌으며, 선조시기 심의겸(서인 붕당 시초: 참고로 당시 김효원은 동인), 정조, 순조시기의 심환지(노론벽파 영수) 등으로 알 수 있듯이
심씨는 조선 후기 유력 노론 가문 중 하나이자, 정계의 중심에 항상 있었던 가문으로 딱히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현달을 넘어 명문거족으로 입지를 탄탄히 한 가문입니다.
참고로 청송 심의 연혁은 조선조때 기준으로 왕비 3명, 상신 13(풍산심 합하면15명)명, 대제학(문형) 2명, 종묘배향1명, 청백리 2명, 호당 2명, 공신 8명, 장신 1명, 문과 급제자 194(다른 관향 심 합하면224)명을 배출했는데,
이는 가히 인구비율로 보자면, 조선전체 중 최고 수준입니다. (사실상 인구비율 최고 수준인 목씨, 상씨는 제외! 睦씨, 尙씨는 인구가 너무 적으니.)
심덕부? 사극에서 본 듯.
5:06 그게 접니다
저도! ㅋㅋ
나도~^* ㅋㅋ
함안 조씨 견해 부탁드립니다~
사실 인구 30여만에 가깝지만, 그에 비해 대과 급제자 수는 34명 정도로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시 급제자는 많아 양반 신분은 조선왕조 내내 충분히 유지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함안조씨는 오히려 구한말에서 근현대 인물 중 걸물들이 많았습니다. 조명하라든가, 명문양반가 출생 독립운동가 조소앙(조용은) 선생이라든가, 현대의 조정래 작가라든가 등등. 여기서 조소앙 선생과 그의 형제들은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형제들이 모두 중국 왕조인 하상주 등등의 국명을 형제 이름에 쓴 것은 유명한 일화죠. 또한 세종, 문종, 단종때 생육신 조려 같은 분도 훌륭한 분이셨죠. 사실 조려 같은 분은 누가 좀 발굴해 좀 더 유명해져야 하는 분 같기도 합니다. 좋은 가문입니다!
지금 성씨가 뭔 의미여 돈 많으면 장땡이다...돈 없는 양반가후손보단 돈 있는 상놈후손이 낫다
저는 안동권씨 입니다.
자신의 가문이 양반인지 유추가 가능한것중에 몇가지가 있습니다
1. 족보가있다 ( 최소 1950년대이후 종중에서 만든것 + 번역본 )
2. 각 가문마다 몇대손이면 이름의 끝자나 가운데 돌림자가 일정하게 맞는다 ( 예를 들면 경기도 광주이씨는 21대손 돌림자가 끝자가 재로 끝납니다 20대손은 가운데자가 용으로 19대손은 끝자가 래로 18대손은 가운대자가 병으로 17대손은 끝자가 회로 끝납니다 )
4. 종중이 있고 선산이 있다
5. 조선시대의 유명인중에 묘가 본향지 주변에 산재해있다 ( 예를들면 광주이씨는 광주.성남 .강동구둔촌동.고덕동.경북칠곡등)
6. 유전자는 못속인다 ( 예.경기도 광주이씨중 연예인.운동선수중에 비슷하게 생긴사람이 많죠 예를 들면
이승엽.이효리.이광수. 이순재.이기광.정치인 이준석 .이윤석 .등 잘보면 비슷합니다 )
광주이씨가 양반이라는건 처음 듣네
요즘 돌림자 안 쓰는 사람이 많은데
족보의 많은 단점이 있겠지만 가장 센 장점은 그것의
진위와 관계없이 쉽게 뭉칠 수 있게 해준다. 모두 잘난 조상을 갖게 됨으로써 모두 주인의식이 생길 수 있고 같은 조상을 가짐으로써 공동체의 끈이 단단해 진다. 난 성이 한씨인데 청주한씨 이전에 이미 한씨가
있었고 청주란 본을 한란이 받은 걸로 안다.하지만 모두 한란을 시조로 한다. 나머지 한씨들이 성을 갈지 안았다면 결국 잘난 남의 조상으로 바꾼 꼴이다.
흥성(흥덕)장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무 궁금합니다 ㅜㅜ
안녕하세요 은진임씨 는 어떤가요?
고려 시기에 비해 조선 시기에는 대과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적은 숫자에 비해 소과합격자들은 다수 배출했으니 양반 신분은 유지했다고 봐야겠네요.
고령 김씨가 궁금합니다!
김씨 치고는 귀한 편인데 궁금했습니다.
헤에 저도 고령김씨!
22세손 입니다
고령 김씨는 거의다 진성입니다
총 인구수가 만명 정도로
가짜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선대를 선산에 모시고
매 명절마다 성묘하면서 느끼지만
우리 성씨는 가짜는 아니다 생각합니다
족보 얘기만 나오면 씹어대기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심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과거의 계급현상을 진지하고 해석적 차원이나 역사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저 씹어대기 바쁘죠.
현재 족보가 권력적.계층적 기능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 있는가 하면, 우리 가문의 문화유산도 있습니다.
어떤 가문은 민족의 문화유산이기도 하고, 세계의 유산이기도 하죠.
그것을 애써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그 가문의 후손들 입니다.
즉, 함부로 조롱거리고 삼을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현대적 시선에서 과거의 족보를 사고 팔던 계급적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은
정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보다 전근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입니다.
이는 우리역사에서 계급이 대격변하는 하나의 현상이기고 하고, 전근대적인 사유가 무너지는 한 과정이자,
근대화로의 과정에서 당연히 파생하는 사건들이기도 하죠.
왕상의 씨가 따로 있나?
양반이란 권력자(문반과 무반)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전 티비에 자신의 가문에서 전해오는 문서를 감정받으러 왔는데 그것이 노비문서 . . .
현대에는 이러한 신분제도가 아닌 타인에게 아량을 베풀고 봉사하는 분들이 양반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 대한민국은 매너 있으신분들이 양반이라고 봅니다 이 분들도 조선시대와 비슷하게 소수죠 ㅋㅋㅋ
양반인지 평민인지는 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한 양반 가문도 한때는 양반이 아니였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성계 가문이 항상 왕족이었던건 아닌 것 처럼요
음-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무엇을 말할 수가 없음. 가문이든 회사든 뭐든 부침없는 게 어디있음.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지.
신안동김씨 어떤지 알아주시면 않돼나요?
사실 이 新안동김(金)씨는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해 따로 소개가 필요할지 잘 모르겠습니다.('금관자가 서 말') 어찌보면 명종시기 원상이었던 충재 권벌의 후손인 봉화 유곡마을의 안동권(權)씨나 그 유명한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후손인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하회)유(柳:류)씨 보다도 더 유명한데 말이죠. 우리 전국민중에 신안동김씨 모르는 사람은 없죠.
아무튼 신안동의 시조 김선평(고창성주 였음)은 고창전투에서 장길, 권행(안동권씨 시조, 본래는 김행)과 함께 왕건을 도와 후백제군을 대파하여 왕건에게 견훤에 줄곧 열세였던 戰勢를 역전시키는데 일조한 분이시죠. 그래서 고려 공신이 되신 분이죠. 아무튼 이 (신)안동김씨가 명문이 된 데에는 김극효(명종-선조시기 동지동녕부사 역임, 신안동김씨 중시조, 사후 영의정 추증)의 아들 김상용(우의정), 김상헌(좌의정)때인데, 이때 이미 정승을 배출하여 명문거족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이 중 김상헌의 후손들이 중전(왕비)을 대거 배출하여 세도가문이 됨으로써 조선후기 집권세력이 되죠. 김상헌 후손의 신안동김씨들을 특별히 서울 장동에 살았다 하여 '장동김씨'라고도 하였죠.(이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김병기 저, , 김영사, 2007. 참고) 여하튼 유명한 사람이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을 정도인데, 김수흥(영의정), 김창집(영의정) 등등도 있고, 여기서 김창집(김상헌 증손)의 후손에서 중전(왕비) 3명이 나왔는데, 여기서 김창집 계열이 중요한데 신안동김씨를 우리도 다 아는 세도가로 올린 비조격 인물이죠. 그리고 교과서에도 나오는 김조순(김창집 4대손, 곧 김상헌---김창집----김조순 계열)의 따님이 순조비가 되면서, 김달순, 김교근, 김유근 일족이 정승, 판서를 독차지, 이후에도 김좌근, 김흥근, 김병학, 김병국 등을 배출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를 이끈 관향이죠. 조선조때 정승 15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 판서 30명 이상을 배출함으로써 조선후기, 특히 세도정치를 화려하게 장식한 관향이죠.
사실 이 신안동김씨 같은 경우는 세도정치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데, 그러나 근대 개화파 인물인 김옥균도 신안동김씨, 그리고 독립운동의 영웅 청산리대첩의 김좌진도 알고보면 모두 신안동김씨 입니다. 그러므로 마냥 신안동김씨가 우리 역사에서 어두운 부분만 있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며, 훌륭한 정승, 판서, 인물들도 많이 배출한 관향입니다. 또한 이 신안동김씨가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멸절 되지 않은 이유로는 한가지 일화가 있는데요.(그 중 주로 세도가문인 장동김씨!) 굳이 말하자면 노론계열인 이 신안동김씨는 남인계열 풍산(하회)유(柳:류)씨 낙파 유후조(柳厚祚, 고종시기 우의정, 좌의정 역임, 일명 낙동대감, 유성룡 8대손)과의 일화가 아주 유명한데, 집권 이전의 약조대로 흥선대원군이 남인계열 유후조를 정승으로 삼고 안동김씨를 멸문하자고 하나, 유후조 정승 임명 전날 안동김문의 김병기가 유후조를 직접 찾아가, 절실히 부탁하여 멸문을 피했다는 일화도 있죠.(참고로 낙파 유후조는 유성룡 후손답게 정쟁보다는 조화, 통합을 선호하는 점잖은 인물이라 김병기의 부탁이 먹혔다는 설이 있음.) 그러므로 지금도 이 신안동김씨의 인구가 47,000명 가량으로 아주 적지는 않은 가문이 되었다는 말도 있죠. 물론 세도가문에 관여된 신안동김씨는 사실 장동에 사는 '장동김씨'로 국한되지만. 아무튼 뭐, 지금 현재도 신안동김씨는 인구도 그리 많지도 않고, 조선후기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세도가문이라 그 후손들은 거의 모두가 명벌 중 명벌 후손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따로 말이 필요없죠. 금관자가 서 말!
후김은 장동이야 말할것도 없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안동에서 이어간 보백당 후손도 욕먹을짓을 많이 했어요
해남 윤씨는 어떤가요? 해남윤가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집성촌에 거주하셨습니다.
忠州朴氏 濟州公后 二十九世 이고
아버지가 살아계실때 대전에 있는 문중도 자주 다녀오셨고
충주박씨 포털사이트와 문중에서 보내준 족보에도 실려있어도
짝퉁일수 있나요?
네
대답할 유씨는 어떠한가요?
님 아마 유(兪: 그러할 유)씨일 것입니다. 국내 한글 '유 or 류'로 표기되는 인구는 전체 인구가 무려 100 만명이 넘습니다.
이 중 가장 흔한 것인 유(柳: 현재 인구 65만)씨이고, 그 다음이 유(劉: 묘금도 류, 현 인구 30만)씨입니다. 그 다음이 님의 유(兪: 현 인구17만)씨, 그 다음이 유(庾: 현 인구1~2만)씨입니다.
전자 둘(柳+劉)은 모두 옥편기준으로 원음이 '류'이지만 두음법칙 적용으로 '유'가 됩니다.
(흔히 국내 일부 무식한 사람 중 劉(묘금도 류)씨가 본래 음이 '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던데, 아닙니다! 劉씨도 본래 옥편기준으로 원음이 '류' 입니다.)
그러나 님 유(兪)씨는 유(庾)씨와 함께 본래 음이 '유'입니다. 아무튼 유(兪)씨는 우리역사에서 상당한 명벌이었습니다.
흔히 '버들 柳'자 쓰는 '유(柳)씨'만 국내에서 명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兪씨도 충분한 명벌입니다.
유(兪)씨는 조선조때 기준으로 문과급제자가 100명 전후가 됩니다. 현 인구가 17만 가량임을 상기했을때 엄청난 벌력(閥力)이죠.
그 중 유(兪)씨 인구의 다수인 기계유씨가 문과급제자 90명 정도를 배출하였고, 조선조때, 특히 조선후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님을 유(兪)씨 중 가장 흔한 기계유씨로 보고 서술해 드리자면, 기계유씨의 시조는 신라시기 아찬 관직을 지낸 유삼재란 사람이고 고려중기 부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서술 편의상 조선조를 기준으로 보자면, 먼저 세조시기 사육신 유응부를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연산군때 유여림은 예조판서를, 유여림의 손자 유홍은 선조시기 좌의정을 지냈습니다. 이 유홍은 명나라로 가서 종계변무 사건을 해결하고 온 명신 중 명신이죠.
이 밖에도 유척기는 영조시기 노론의 영수로 영의정까지 지냈습니다. 유언호(유척기 조카)도 정조의 총애를 받아 종묘에 배향되었습니다.
주로 유(兪)씨, 그 중 기계유씨는 숙종, 경종, 영조, 정조시기 번성한 성씨로, 이후 순조 때도 문장가 유한준, 유신환 등을 배출하였고, 구한말에는 그 유명한 '유길준'을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입니다.
참고로 유길준은 우리나라 최초 미국 유학파 중 한 사람으로 동부 명문 사립인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를 다니기도(중퇴) 했죠.
아무튼 국내 한글 '유'로 표기되는 성씨중 유(兪)씨는 유(柳)씨와 더불어 우리역사를 대표하는 명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당 !!
전국민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해보면 정확한 성씨를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산 문제도 있고 인종차별 논란도 있어서 안하는 걸로 압니다.
그런데 일제후손들만큼은 색출해서 솎아내야 옳다고 봅니다.
동감ㆍㅋ
일제 후손.. 전혀 의미 없죠 한국인들 대부분이 일본,중국,유목민족 짬뽕 피들입니다 어떻게 찾아내요
10대조 이상 묘를 관리하고 있으면 양반 확률이 높음!
10%만 양반이였음
적어도 6대조 이상 제적등본 띠어보면 알수있습니다 갑오경장이후 종농들이 대부분 주인성을 따랐습니다 재적등본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윗대 제적등본 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Jin_9712은행 무인 발급기 에서 떼시면 됩니다
증조할아버님은 알고 있었다고 봐야죠. 고향에 몇 개 대성씨 외엔 머슴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씨는 머슴이라고. 선산 없고 마을 뒤에 그냥 묻었으면 희귀 성씨도 양반이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8대만 올라가도 지방에는 족보 있는 양반 한 명만 있는 반촌도 없는 곳도 있었다네요. 별거 아닌게 아니라 같이 없이 살아도 동네 사람들 나무 해 오라고 시켜도 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