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1절 설교 /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 Judge not, that you be not judged / 영적 분별은 필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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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30 вер 2024
  •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마라.
    Do not judge, or you too will be judged.
    우리는 이제 산상설교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이 대목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하여 의견의 차이가 적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장을 한낱 격언적 진술의 집합쯤으로 보고 그 진술들 사이에 내적 관계가 거의 없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제게는 아주 잘못된 견해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7장 전장에는 하나의 기본주제 곧 비판이라는 주제가 일관되어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께서 가르치실 때 변함없이 반복하시는 주제입니다. 주님은 이 주제를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대목과 앞의 대목의 관계를 밝혀 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앞에서 거듭 살펴본 대로, 어떤 대목이나 그 대목의 어떤 진술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기 전에 산상설교를 하나의 전체로 간주해야 할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전체를 다시 일거에 재음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기독교인의 성격묘사를 봅니다. 그런 다음 그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에게 미치는 결과와 이 세상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그런 다음 기독교인은 세상의 소금과 모든 사람에게 비취기 위한 빛의 기능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기독교인을 사실대로 서술하시고 나서 우리 주는 계속해서 이 세상의 기독교인의 삶과 관련해서 특정 교훈들을 주십니다. 주님은 율법에 대한 관계로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특히 필요한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거짓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이것이 5장의 저 긴 대목의 주제이며, 거기서 우리 주는 여섯 개의 주요 원칙의 관점에서 율법에 대한 그의 견해와 해석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훈과 대조해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그가 대체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며, 율법은 그에게 어떻게 적용되며, 그에게서 무엇이 기대되는가를 가르침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시고 나서 주는 6장에서 이렇게 서술된 기독교인이 이 생의 삶을 살며 특히 이 삶을 그의 하늘 아버지와 교우하며 사는 것을 보십니다. 기독교인은 그의 하늘 아버지가 자기를 보고 계심을 항상 기억해야 할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사생활이나 선행 곧 구제, 기도, 금식 및 그의 내밀한 영적 생활과 그 성장과 양육, 수양을 성취하도록 의도된 모든 것을 행하려고 결심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일은 아버지의 눈이 항상 자기 위에 있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행해져야 합니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이런 일에 아무런 가치나 공로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전력을 다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른 대목에 옵니다. 이 대목에서 주는 우리에 대한 이 세상 생활의 충격의 위험과 세속의 위험과, 우리가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든 적게 소유하고 있든 이 생과 이 세상일들을 위한 삶의 위험 특히, 이 위험의 교활성을 보여 주십니다.
    이렇게 처리하시고 나서 주는 이 마지막 대목에 오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눈앞에서 행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시고 있습니다. 주께서 다루시는 이 특정 주제는 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아야 할 중요한 점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기본 문제라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환언하면, 여기 우리의 삶은 여행이요 순례길이라는 것과 이 삶은 최종 심판, 곧 궁극적 평가 및 우리의 최종적이며 영원한 운명의 결정과 선언으로 계속 인도함을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변함없이 상기할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문젯거리의 절반은 이생과 이 세상만이 전부라는 가정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아는 것과, 일상생활과 인생관에서 이 지식의 지배를 받고 인도를 받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후에도 삶을 계속하며 우리가 심판 때의 하나님과 대면해야 할 것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사실을 순간순간 염두에 두십니까?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은 그들이 항상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의식하며 행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인은 그의 영원한 미래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이 모두인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유일한 세상은 이 세상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위해 살며, 이 세상이 그를 통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이 세상은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일종의 예비학교임을 의식하며 통과해야 할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자기가 하나님 존전에서 행하며 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과 이 생각이 그의 모든 삶을 결정하고 조종해야 할 것을 항상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는 앞의 대목에서처럼 우리가 이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음과, 이것을 상세히 상기할 필요가 있음을 여기서 보여주시려 애쓰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의 모든 삶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단면이 이런 관계에 있어야 할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내 심판의 고정을 겪고 있음은 우리가 최종 심판을 위해 준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우리는 결산보고를 해야 할 것을 기억하며 이런 생각을 깊이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이상으로 본장의 주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주는 이 주제를 여러 모양으로 다루시며 두 집에 대한 묘사에서 클라이맥스로 끌어올리십니다. 두 집은 이 설교에 귀를 기울인 두 사람을 표시합니다. 한 사람은 실천하였고 또 한 사람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산상설교의 크기와 그 탐사성 있는 성격과 가르침의 깊이와 놀라운 성격을 상기하게 됩니다. 이 같은 설교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이 설교는 어느 모로나 어느 장소에서나 우리를 들추어냅니다. 여기서 도피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숨 든 우리를 온통 들추어내어 하나님의 빛 앞에 노출시킵니다. 앞서 몇 번 살펴본 대로, 신약성경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산상설교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이해가 무디고 얼빠진 사람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들은 바울 신학과 기타 교리에 관한 것들을 혐오합니다. 그들은 '산상설교를 나에게 달라. 그렇게 실제적이며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달라'고 말들 합니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상설교처럼 철저하게 정죄하며 철저하게 실천 불가능하며, 그처럼 두렵고, 교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없다 하겠습니다. 제가 이신칭의 교리를 알지 못한다면 저는 산상설교를 살펴보지 않았을 것이며, 까닭인즉 이 설교 안에서 우리는 모두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며 소망이 전혀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택하여 실천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것이기는커녕, 우리 자신에게 내버려 둔다면 가장 실천 불가능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대 설교는 교리로 가득 차 있으며 또 교리로 이끌어 갑니다. 이 설교는 신약성경의 모든 교리에 대한 일종의 서론인 것입니다.
    우리 주는, 서로 심판하는 이 특정 문제에 관하여 심판 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를 고찰하기 시작하십니다. '비판하지 말라' 주는 산상설교를 일관해서 사용해 오신 방법을 여전히 사용하고 계심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주는 먼저 선언을 발하신 후에 선언의 이유를 주십니다. 주는 원칙을 설정하신 후에 그 이치를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논리적인 방법으로 상세하게 제시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의 방법이 이상과 같습니다. 이것은 세속에 관한 방법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세속 문제에 돌아오십니다. 주는 사려 깊은 선언을 말씀하셨습니다. 곧 '비판하지 말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주 큰 혼란을 야기시켜 온 진술에 마주칩니다. 이것은 매우 오해하기 쉬운 주제인 것이 확실합니다. 진리의 경우 늘 한결같은 것이지만,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리고 두 가지 극단으로부터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는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사전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다른 뜻이 있으므로 이런 식으로는 결정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이 지점에서보다 이 명령의 정확한 해석이 더 중요한 곳은 없다 하겠습니다. 교회 사상 각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해당되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특별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이 특정 진술을 고찰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그 까닭은, 오늘의 삶의 전체 분위가와 특히 기독교 사회에서 이 진술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양 정의의 가치를 업신여기는 시대에, 사상을 혐오하고, 신학과 교리와 교의를 증오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안이와 타협의 특색을 띄우는 시대입니다. '조용한 생활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불사'한다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유화의 시대입니다. 이 용어도 이제 정치적이며 국제적인 의미에서는 인기가 없고 이 용어를 즐기는 심성의 잔재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시대는 강자들을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까닭인즉, 강자들은 언제나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자기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 사람을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그런 사람을 함께 어울리기 힘든 까다로운 사람으로 여기고 물리쳐 버립니다.
    2024년 5월 29일 수요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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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cyreform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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