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sed Queen Yu of Gwanghae during the Joseon Dynasty [History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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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1 жов 2024
  • Deposed Queen Yu (1576~1623) was the wife of Prince Gwanghae, the 15th king of Joseon Dynasty. She helped her husband from the time of Crown Princess. She becomes the queen, but she passes away at the place where she was exiled when her husband Gwanghae gets deposed during the rebellion. #history #joseondynasty #queen

КОМЕНТАРІ • 38

  • @maljjakim
    @maljjakim 3 роки тому +30

    전란을 함께하며 궁궐을 지키고 열등감을 가진 선조의 견제와 영창대군의 등장으로 남편의 왕위가 긴장 상태가 되기도 했으며, 결국 남편이 왕위에 오르지만 불안하고 점차 부폐하는 정치 권력 속에 얼마나 맘고생 심하셨을지요..ㅠㅠㅠ 유배가서도 고난을 많이 격으시고.. 참으로 고되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관통하셨네요…ㅠㅠㅠ

  • @꽃말-y6l
    @꽃말-y6l 3 роки тому +16

    광해군과 선조는 부자지간이되 정말 극과 극의 인생을 산 라이벌이죠. 선조는 정말 타고난 행운이 어떻게 저렇게 좋을까 싶을 정도로 행운아였고, 광해군은 어떻게 저렇게 지지리도 운이 없었을까 싶을 정도였고요. 딱 하나 선조에게는 불행이고 광해군에게는 행운이었던 것이 있습니다. 선조의 정부인 의인왕후가 불임이었다는 거요. 이로 인해 선조는 뒤늦게서야 적자를 볼 수 있었고 광해군은 의인왕후 소생 아들이 있었다면 언감생심 세자 자리는 꿈도 꿀 수 없었죠.
    1. 인종과 명종이 후사 없이 죽음: 인종과 명종에게 적자가 아니더라도 아들만 있었다면 전전전왕(중종)의 후궁 소생 아들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었죠.
    2. 전왕의 조카들 중 유일한 미혼: 남의 집에 양자로 가려면 미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종의 손자 중 적자이면서 미혼인 사람이 본인뿐이었어요.
    3. 타고난 머리: 임진왜란 때 보인 행보 때문에 다들 선조를 암군으로 인식하는데 저도 암군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임진왜란 이전 보인 인재 등용과 당파를 이용한 왕권 강화를 보면 선조의 정치력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유성룡, 이항복, 이순신을 기용한 사람이 선조에요. 그리고 선조의 왕권이 얼마나 탄탄했는지 임진왜란 때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기고 자신은 피란길에 올랐는데도 아무도 선조를 폐위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다들 선조를 보필했죠. 왕권이 미약한 왕이었다면 너무 무능하고 무책임하다고 암살당했거나 일본이나 중국에서 정권이 둘로 나뉘었던 것처럼 선조를 왕으로 하는 정권과 광해군을 왕으로 하려는 정권으로 정권이 둘로 나뉘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그의 아들 광해군이 무리한 궁궐 증축과 과도한 친국으로 인망을 잃었던 것과는 달리 백성들을 생각해서 공사를 자제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어요.

    • @정재웅-b8u
      @정재웅-b8u 3 роки тому

      선조는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애는 평범한 군주였죠 선조는 당쟁을 왕권강화애 이용했어요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3 роки тому

      의인왕후가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는 선조의 국혼이 지연되자 공빈에게 마음을 빼앗긴게 원인입니다. 공빈이 죽을때 임해, 광해를 부탁합니다. 광해가 인빈과도 사이는 나쁘지 않았는데 사극에선 악독하게 나오네요. 선조가 즉위한 것은 인순왕후의 총애 덕인데 인빈이 인순왕후의 궁녀였습니다.

    • @꽃말-y6l
      @꽃말-y6l 2 роки тому

      @@inyeobseo9369 전 그보다도 불임이었던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의인왕후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아들을 낳게 불사를 자주 벌였고 등의 기록을 놓고볼 때 부부 관계는 분명히 있었어요...
      이 시대엔 왕가뿐 아니라 일반 여염집에서도 아이를 낳지 못하면 이를 이유로 소박 맞는 시대였습니다. 대통을 이어야 하는 중전은 말할 것도 없죠.
      참고로 의인왕후와의 혼인이 공빈 김씨 간택 후궁 입궁보다 전입니다.
      제 아무리 본인 취향에 맞지 않는 여인이라고 해도 아들만 낳아줬더라면, 중전이자 자신의 아들의 어머니, 훗날 대비가 될 그녀를 선조가 저렇게 매몰차게 대했을까요?

    • @유나예-r6c
      @유나예-r6c 2 роки тому

      그런데 선조의 자식농사는 완전 엉망이었죠.
      일단 임해군부터 순화군 총애하는 인빈김씨의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도 망나니였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는게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 @꽃말-y6l
      @꽃말-y6l 2 роки тому +2

      @@유나예-r6c 다른 자식들 막장이었던 것도 문제지만 전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이 막장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면 우리나라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해요. 선조의 자식들 중 그나마 정상인 인간이 공빈 김씨 소생 광해군이랑 인빈 김씨 소생 신성군이었는데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절 임해군이 차라리 일찍 죽고 없어서 광해군이 실질적으로 장남이었다면?
      한마디로 선조의 "장남"이 멀쩡한 인간이었다면?
      그렇다면 최소한 의인왕후 사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기 전까지는 후계자를 둘러싼 파란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유교 사회에서 후계자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1. 적자 2. 장남입니다. 중종 시절, 경빈 박씨가 자신의 아들 복성군이 중종의 장남이라며 정비 소생 인종을 제치고 어떻게든 세자로 삼고 싶어했던 걸 봐도 알 수 있듯, 이건 제가 볼 때 정비 소생 아들이 있는 가운데 주제도 모르고 날뛴 측면도 있지만 장남이라는 타이틀이 그렇게 막강한 겁니다.
      하물며 정비 소생 아들이 없는 가운데 장남이라면, 종법 따지는 조선 왕실에서는 쉽게 세자가 될 수 있었어요. 선조보다 후대 일이긴 하지만 경종은 모친이 죄인으로 사사당한 희빈 장씨임에도 중전 소생 아들이 없자 아무도 폐세자 시켜야 한다고 감히 나서지 못했죠. 영조의 장남 사도세자도 모친의 신분이 미천했음에도 아무도 모친의 신분이 미천하다며 무시하지 못했어요.
      심지어 임해군의 모친은 왕실과 친인척 관계인 명문가이되 아버지는 대단한 벼슬을 지내지 못해 다소 몰락한 간택 후궁 출신이었어요. 공빈 김씨가 소주방 나인으로 의인왕후와 혼인 전 궁에 들어온 선조가 적적한 마음에 총애하여 의인왕후가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건 극 재미를 위한 드라마 설정이고요. 실제 공빈 김씨와 선조가 만난 시점은 선조가 의인왕후와 혼인한 후입니다.
      연표로 정리하자면요. 공빈 김씨의 인생이 이렇습니다.
      1569년: 만 17세인 선조와 1555년생이라 만 14세인 의인왕후 혼인, 명종의 3년상이 끝난 후 혼인하기를 바란 명종비 인순왕후로 인해 당시로선 다소 늦은 혼인을 한 데다 인종, 명종 모두 후사 없이 죽어 왕손이 부족한 상황이라 인순왕후가 빨리 원자 보기를 바랬을 테고 선조도 방계 출신이라는 컴플렉스, 그게 아니더라도 보위를 탄탄히 하기 위해 적자가 간절했을 텐데 아이 안 생김
      제 생각엔 초창기엔 막말로 애 낳기 위해서라도 중궁전을 자주 찾아 관계를 갖지 않았을까 싶네요.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불사를 자주 벌였다는 기록을 보나,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기록을 보나 부부 관계는 분명히 많았어요.
      1571년: 아이가 안 생기자 할 수 없이 인순왕후가 간택 후궁을 들이게 함, 이 때 입궁한 사람이 임해군과 광해군의 모친 공빈 김씨와 귀인 정씨
      (이 시점에 1553년생인 공빈 김씨 만 18세, 1557년생인 귀인 정씨 만 14세, 둘 다 바로 합궁 가능한 나이인 사람들을 고른 것 같네요, 그리고 간택 후궁이니 이 시점에 둘 다 숙의를 달고 들어왔죠)
      1572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공빈 김씨는 바로 임해군 출산, 아들을 낳은 공으로 귀인으로 승급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는 아이가 쉽게 생기는 걸 안 선조가 의인왕후를 본격적으로 박대하기 시작ㅠㅠ)
      *1573년 라이벌 인빈 김씨가 왕손 많이 보았으면 하는 인순왕후의 추천으로 선조의 승은을 입음.
      1575년: 광해군 출산 후 빈까지 오름
      *하지만 이후 그녀가 산후병으로 아파서 부부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서인지 점점 총애가 인빈 김씨에게 쏠리기 시작함.
      1577년: 공빈 김씨 산후병으로 사망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삼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가 장남이 아니라는 거였습니다. 인빈 김씨도 광해군이 장남이었다면 언감생심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자고 선조에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고, 선조가 받아주지도 않죠. 명나라의 세자 책봉 조서를 받아야 하는 조선이었는데 당시 명나라 만력제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인정해 주지 않은 이유가 광해군이 차남이라는 거였고요. (사실은 만력제도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 소생 장남이 아닌 황자를 태자로 삼고 싶어서지만)
      공빈 김씨의 신분이 드라마 설정처럼 소주방 나인이었다면 모친의 신분이 미천하다며 모친이 이미 사망하고 없으니 무시하고 업신 여기는 세력도 일부 있었을 수도 있어요. (ex: 자신이 아니면 완전 방계가 아니면 대안이 없음에도 모친이 미천한 신분 출신 후궁이었던 데 대해 히스테릭한 수준의 노이로제를 보인 영조) 하지만 공빈 김씨는 명문가 출신이 간택 후궁이었습니다.

  • @Ijv_6
    @Ijv_6 Рік тому +2

    조선은 세조부터 어그러진것 같아요. 아들들이 일찍 죽고 연산군에 이어 중종도 그닥. 그러면서 계속 후사없이 일찍 죽고 선조, 인조, 영조로 인한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이 이어지는.....제 생각입니다.

  • @reolee-gk2gx
    @reolee-gk2gx 3 роки тому +25

    왕실에 시집간다고 담들은 좋겠다고 부러워했겠지만 정작 당사자인 폐비유씨는 시집오면서 죽을때까지 단한순간도 맘편히 못있었겠네요.. 애휴..

    • @티롤리
      @티롤리 3 роки тому

      그건 인목왕후도 마찬가지죠

    • @꽃말-y6l
      @꽃말-y6l 3 роки тому +2

      @@티롤리 그녀도 그냥 비슷한 수준의 양반가에 시집 갔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니면 딸만 낳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녀 인생이 더 나았겠죠...

    • @티롤리
      @티롤리 3 роки тому +1

      @@꽃말-y6l 임진왜란 시절에 어느 양반댁 규수인들 편하게 살 수 있었을까요

  • @CWG-op9td
    @CWG-op9td Рік тому +2

    Only if Seonjo died in 1593…it would have been better for Joseon! Why does God keep evil ones alive longer than necessary 😟.

  • @-hope777
    @-hope777 3 роки тому +5

    넘 기다렷어요🤗

  • @앙드레황-p2m
    @앙드레황-p2m 3 роки тому +9

    역사패치 중독성멜로디와 자막이 너무좋았는데 지금읽어주는 버전은 아무것도 남는게없다 옛날버전으로 다시돌아가주세요

  • @꽃말-y6l
    @꽃말-y6l 3 роки тому +10

    1-1. 태어난 순서: 광해군이 임해군과 태어난 순서만 바뀌어 있었다면... 종법이 지배하는 유교 사회에서 장남이라는 타이틀을 정말 막강합니다. 마침 간택 후궁이었던 모친 공빈 김씨도 사망하고 없어서 "진짜" 의인왕후의 아들이 되어 세자가 되기에도 딱이었어요.
    1-2. 하필이면 만력제가 황제였던 명나라: 조선은 명나라의 세자 책봉을 받았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만력제가 황제여서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죠. 사실은 만력제도 자신의 다른 후궁 소생 장남이 아니라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 소생 아들을 태자로 삼고 싶어서 핑계 대던 거. 이걸 선조가 얼씨구나 좋다하고 그대로 핑계꺼리로 써 먹었죠.
    2. 어머니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린 아버지: 선조만 공빈 김씨의 사망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녀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었다면 좀 더 광해군을 우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공빈 김씨가 더 오래 살았어도 선조의 총애는 이미 인빈 김씨와 다른 후궁들에게로 옮겨가 총애를 이어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미 그녀 생전에 다른 여인들에 대한 총애가 시작되었었어요.
    3. 의인왕후의 이른 죽음: 의인왕후만 선조보다 오래 살았더라면 영창대군이 태어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광해군이 그렇게 의심병에 빠져 과도하게 친국을 벌이고 폐모살제가 일어나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무리한 궁궐 증축도 현명한 광해군이 옆에서 다잡아 주었을 거에요.
    광해군의 실리 외교로 인해 광해군이 미화되는 측면이 있는데 광해군은 암군이 맞습니다. 세자 시절의 영민함이 왕이 되어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었어요. 인조반정의 주요 원인이 폐모살제고 그 외에도 과도한 친국수와 무리한 궁궐 증축으로 인한 인망 잃음이 주요 원인인데 인조는 전왕의 후궁 소생 아들의 아들일 정도로 그다지 내세울 것도 없는 혈통이었습니다. 물론 인조의 능력이 뛰어나서도 있지만 이런 인간이 역모를 반정으로 만들었어요. 일단 이런 사람을 중심으로 세력이 모였다는 거, 그것이 성공했고 이후 인조의 정통성에 시비를 걸며 폐위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는 거만 보아도 광해군이 얼마나 폭정으로 인해 인망을 잃었었는지를 알 수 있네요.
    병자호란은 명나라 잔존 세력을 완전히 척결하기 위해서라도 결국은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을 치기 위해 청나라가 일으켰을 거라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인조가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겪기는 했으나 인조 이후 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150년간은 상당히 유능했던 것으로 평가되는 왕들이 즉위해서 통치를 했어요. 그러니 전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나지 않았더라도 조선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도 광해군은 살아있었는데 만약 광해군이 계속 대외정책으로는 실리외교를 펼쳤더라면 병자호란이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을지 살짝 궁금해지기는 합니다.

    • @정재웅-b8u
      @정재웅-b8u 3 роки тому

      외교는 성공했지만 내정은 실패한 군주 광해군의 중립외교

    • @정재웅-b8u
      @정재웅-b8u 3 роки тому

      선조의 서자 인성군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몇번 있었습니다 이괄의 난은 인조의 정통성애 시비를 건개 아니라 2등공신으로 책봉된 것애 대한 분노와 자기 아들 잡아간 것애 대한 분노로 일으킨거니 재외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3 роки тому +2

      공빈, 인빈은 간택이 아니라 궁녀 출신입니다. 선조의 간택 후궁은 정빈 민씨와 정빈 홍씨 둘입니다. 간택과 궁녀 출신은 급이 달라 간택은 종2품 숙의 부터 궁녀는 종4품 숙원부터 시작합니다.

    • @꽃말-y6l
      @꽃말-y6l 2 роки тому

      @@inyeobseo9369 인빈은 궁녀 출신이 맞고 공빈은 최근 연구로는 의인왕후가 불임이자 들인 간택 후궁입니다. 드라마에서 극의 재미를 위해 의인왕후와 혼인 전 이미 소주방 나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선조가 의인왕후에게 마음 주지 않는 것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아 생긴 오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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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편집]
      사포(司圃)를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 해령부원군(議政府 領議政 海寧府院君)에 추증된 김희철(金希哲)의 딸로 1553년 11월 16일 (음력 10월 11일)에 태어났다. 종2품 숙의(淑儀)로 있을 때에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을 낳아 종1품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차남인 광해군을 낳자 마침내 정1품 빈(嬪)에 책봉되었다. 김희철은 후일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때문에 광해군 형제의 주변에 힘이 되어줄 만한 인물들이 없어 세자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
      물론 훗날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도 이례적으로 빠르게 미천한 신분 출신임에도 숙의를 달기는 했지만 그건 조선 후대로 가면서 아들 수가 부족하자 후궁 품계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서도 있고요. 가장 큰 이유는 영조의 총애가 매우 컸기 때문이지만요.
      선조 시절에는 조선 중기로 후궁 품계가 매우 짰습니다. 실제 선조가 가장 총애한 후궁인 인빈 김씨가 빈 달기까지 30년이 걸려요.
      그런데 공빈 김씨는 장남인 임해군을 낳았을 당시 숙의였습니다. 명문가 출신 간택 후궁은 입궁할 때 숙의를 달고 들어와요. 의인왕후와 1569년 혼인 후 아이가 안 생기자 1571년에 간택 후궁을 들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 들어온 간택 후궁 중 1명이 공빈 김씨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CWG-op9td
    @CWG-op9td Місяць тому

    Thank you so much for the English subtitles ❤

  • @박은성-e6d
    @박은성-e6d 3 роки тому +2

    3번째다!

  • @닭아지
    @닭아지 3 роки тому +2

    유익했습니다

  • @CWG-op9td
    @CWG-op9td 9 місяців тому

    Such a tragic Queen. Only if her husband remained faithful to her 😢

  • @김강우강우
    @김강우강우 2 роки тому

    네 이놈

  • @성민서-z4p
    @성민서-z4p 3 роки тому +3

    와!!올라왔다

  • @비공개채널-r6g
    @비공개채널-r6g 2 роки тому +1

    폐세자 이질이 아니고 이지 입니다. 그리고 폐비유씨는 화병이 아니라 폐빈 박씨하고 똑같이 자결했습니다

  • @babyme8886
    @babyme8886 Рік тому +1

    May Lord Buddha bless you all 🙏! Have a nice day everyone 😊🙏

  • @abcde012
    @abcde012 Рік тому

    채널 비추 광해의 업적은 하나도 설명 안 하고
    광해가 폭군으로 묘사됨 또 야사는 정식 기록이 아니고 민간 기록 이기땜에 믿을 만 하지 않음..
    그러니 마지막에 류씨가 했다는 말은 가볍게 무시하면 됨 구라일 확률이90 퍼

    • @messi_kimochi
      @messi_kimochi Рік тому +1

      세자때는 왕으로써 좋은 자질을 보였지만 폭군 맞죠.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렸고, 백성들은 전란으로 힘든데 왕실복원한다고 대규모 공사로 민생을 파탄냈고, 특히 김개시를 중용하면서 조정을 어지럽혔죠. 업적이라고는 대동법과 중립외교 정도인데, 사실 대동법은 광해군이 반대한걸로 유명합니다. 단지 광해군 대에 시행되어서 광해군의 업적처럼 묘사되지만...

  • @꽃말-y6l
    @꽃말-y6l 3 роки тому +5

    참고로 광해군은 영상에서 이야기하듯 여자 좋아하는 왕이었던 것은 맞지만 폐비 유씨와의 금슬도 꽤나 좋은 편이었어요. 이 시대에 왕/왕족에게 부인이 여럿 있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고요.
    부인이 소의 윤씨, 소의 홍씨, 소의 권씨, 숙의 허씨, 숙의 원씨, 소용 정씨, 소용 임씨, 소원 신씨, 숙원 한씨, 그리고 김개시 포함 승은 상궁 5명이었는데요. 참고로 김개시는 광해군이 아니라 선조의 승은을 입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이 자신의 후궁으로 봉하지는 않은 거죠.
    자식 낳은 걸 보면 폐비 유씨와의 사이에서 폐세자 질과 요절한 왕자 2명, 총 3명 낳았고 소의 윤씨하고 사이에서 옹주 1명 낳았어요.
    1576년 판윤 류자신의 딸로 태어남
    1587년(만 11세): 광해군과 혼인 (이 시점에선 세자빈은 아니고 왕자비)
    *1592년~1598년(만 16세~만 22세): 임진왜란
    1596년(만 20세): 요절한 첫 왕자 탄생
    *전쟁 혼란 등으로 인해 초야도 늦게 치루고 하면서 당시로선 상당히 늦은 나이에 첫 출산을 했네요.
    1598년(만 22세): 폐세자 지 출산
    *전쟁이 종식되면서 부부가 안정기를 가진 것 같습니다.
    1601년(만 25세): 요절한 왕자 출산
    *1608년(만 32세): 남편 광해군 왕으로 즉위, 자신도 중전이 됨
    *1619년 광해군의 유일한 서녀 소의 윤씨 소생 옹주 탄생
    1623년(만 47세): 인조반정으로 폐출, 얼마 안 가 사망
    영상에서 이야기하듯 왕가로 시집 온 걸 스스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시아버지와 남편의 갈등, 그리고 많은 후궁을 들이는 남편으로 인한 마음 고생 등으로 이해는 가지만 딱히 그녀가 투기로 인한 파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이해가 가네요. 광해군은 여자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페비 유씨도 여인으로서 좋아했고 부인으로 우대했고 이 여자, 저 여자 찝적이기는 했지만 딱히 크게 총애한 여인이 없습니다. 한 여인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많이 갖기보다는 이 여자, 저 여자 섭렵하다 보니 제대로 임신한 여인은 드문 것 같네요. 김개시는 여인으로 총애했다기보다는 정치 파트너였고요.
    무엇보다 자신은 아들을 낳았는데 후궁 소생 아들은 없고요... 인조반정만 아니었더라면 그냥 그렇게 남편이랑 대단한 금슬은 아니어도 불화도 아닌 사이로 지내다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고 자신은 대비가 되어 무난하게 살다 갈 줄 알았을 것 같습니다. 한데 자신의 남편이 너무 인망을 잃었었다는 거... 그게 그녀 불행의 크나큰 원인이었던 거죠.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3 роки тому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이 되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이첨이 역모를 조작하였다는 설과 실제 역모를 모의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소용 임씨는 1628년 처형되었다는데 왜 5년이 지나 처형되었는지 미스테리합니다. 소의 윤씨도 1623년 처형, 소용 정씨는 자살합니다. 광해군 후궁이 많은 이유는 세자 외엔 자녀가 없어 더 자녀를 낳으라고 김상궁이 권유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