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모택동 [마오쩌둥,毛泽东,Máo Zédō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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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іковано 7 лют 2025
- 2200년전 진시황이래로 마오쩌둥만큼 중국을 철저히 지배하고 변혁시켰으며 억압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묘소는 아직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그대로 있다.
모택동[마오쩌둥 毛泽东,Máo Zédōng]은 중국공산당의 요직에서 활동하다가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으며, 장제스와의 내전에 승리하고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국가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1893년 사오산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마오쩌둥은 20세기의 작은 거인이었다. 그는 중국을 통합했고 아시아식 사화주의를 창안했으며, 1960년대에 세계 공산주의를 분열시켰다. 동시대인들에게 비친 그의 모습은 변화무쌍 했다. 청소년 시절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개인주의자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프롤레타리아 편에 서서 싸웠으며, 스파르타식 공산주의를 선포했다.
중국 북부에 있는 황토 고원인 옌안까지 이어진 대장정에서는 저항의 중심이었고, 일본군에 대항한 게릴라전에서는 야전 사령관이었으며,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의 내전에서는 탁월한 전략가였고, 권력을 동원해 사회를 변혁하고 인간을 개조하려 했던 무자비한 사회운동가였으며 말년에는 관능적인 쾌락에 빠져들었다.
정치가 마오쩌둥은 두 가지 영혼의 소유자였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나라의 엄격한 질서를 강요하며 마치 최면을 걸 듯 국민을 체계적으로 세뇌시켜 자신을 열광적으로 숭배하도록 만든 폭군이었다.
마오쩌둥은 1893년 12월 26일 아침 8시에 태어났다. 중국에서는 이때를 ‘검은 뱀의 해이자 녹색 쥐의 달이며 붉은 수탉의 날에다 용의 시간’으로 부른다. 아버지는 후난성 사오산의 농부로서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해 나름대로 기반을 닦았다. 이런 아버지의 대해 마오쩌둥은 “그는 우리에게 돈을 준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변변찮은 먹을 거리뿐이었다. 계란이나 고기를 먹은 적이 없었다.” 라고 술회했다. 아버지는 농사의 규모를 늘리고 쌀장사도 해서 수입을 많이 올렸다. 어린 마오쩌둥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엄격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반감이 컸다. “아버지는 내게 고통을 준 최초의 자본가” 라고 말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여섯 살 때부터 논에서 일해야 했다. 여덟 살이 되면서부터 서당에 다녔지만, 이른 아침과 저녁에는 농사일을 도와야 했고, 글자를 배운 뒤로는 아버지의 장부 정리도 도와야 했다. 마오쩌둥은 열 살 때 다니던 서당에서 도망쳐 처음으로 외지로 나갔다. 사흘간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와 서당 선생님이 이전보다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경험에 관해 그는 1936년 미국인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 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과가 인상적이었어요. 성공적인 반항이었던 셈이지요.”
마오쩌둥은 서당에서 공자의 경전을 비롯한 많은 유교 경전을 배웠다. 그러나 고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옛 소설과 영웅이야기에 훨씬 더 흥미를 느꼈다. 그럼에도 그가 고전을 배운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뿐 이었다. 바로 아버지에 대항하는 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와 자주 다퉜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손님들 앞에서 마오쩌둥을 게으르고 쓸모없는 놈이라고 책망한 일도 있었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아버지에게 욕을 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아버지가 뒤따라가면서 불렀다. 그는 연못가에 멈춰 서서 더 가까이 오면 연못에 뛰어들겠다고 위협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잘못을 빌라고 시켰고, 앞으로 말을 잘 듣겠다는 표시로 큰 절을 하라고 말했어요. 나를 때리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큰절을 하겠다고 말했죠. 이렇게 해서 다툼이 끝났습니다.”
마오쩌둥은 이 일에서 두 번째의 교훈을 얻었다. 즉 겉으로는 복종하듯이 보이더라도 완강한 자세를 취하고, 여건이 허락되는 한 자신의 생각과 목표를 고집하며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열세 살 때 서당 공부를 마치고 그 후로 2년 동안 아버지가 하는 일을 도왔다. 하지만 곧 농사일에 싫증을 느꼈고 열다섯 살 때 집을 떠났다. 그는 반년 동안 법학도에게, 그 후에는 유학자에게 학문을 배웠다.
당시 중국에서 발생한 기근과 잔인하게 진압된 농민봉기는 그로 하여금 몰락해가는 청 제국의 사회 갈등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보게 했다. 동시에 인근 도시의 신식 학교와 후난성의 성도인 창사에서 신문물에 눈을 떴다. 중국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와의 대화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나는 다른 나라의 역사와 지리에 대하 약간 배웠습니다. 처음으로 미국 혁명에 관한 글을 읽었죠, 여러 책을 읽으면서 나폴레옹, 표트르대제, 웰링턴, 루소, 몽테스키외, 링컨 등에 관해 배웠습니다."
1911년 중국에서는 청 왕조가 몰락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마오쩌둥은 최초로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공화국에 열광해 학교 칠판에 정치적인 글을 처음으로 써 붙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변발을 잘라내고 다른 학생들을 급습해 마찬가지로 변발을 잘랐다..
그는 반년 동안 혁명군에 가담했다. 한 달 급료는 7달러였다. 마오쩌둥은 그 당시 신문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혁명 후 마오쩌둥은 불안정한 나날을 보냈다. 경찰학교에 등록했다가 곧 그만두고 비누 만드는 법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와 상업학교, 법률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학교가 없어서 학업을 중단하고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애덤 스미스, 찰스 다윈, 존 스튜어트 밀, 그리스 신화, 세계사 따위의 책을 읽었다. 그러나 결국 계속 이럴 수 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1912년에 사범학교에 들어갔다. 마오쩌둥은 이곳에서 6년 동안 공부한 뒤 25세에 교사 자격증을 땄다.
그는 고전 필체로 산문을 쓸 줄 알았고 많은 지식을 쌓았다. “그 시절에 나의 정치적인 이념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조직가로서의 첫 경험도 쌓았다.”
그는 걸어서 후난성을 돌아다니며 정치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애국사업을 할 젊은 인력을 찾습니다.’ 라는 문구로 신문광고를 냈고, 동지들을 규합해 ‘신민학회’를 창설했다. 이 회원들 중 다수가 이후에 중국 공산당에서 요직을 맡게 되었다. 회원들은 사회문제와 정치 현안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가리지 않고 걸어 다니며 선전활동을 펼쳤다. 심지어 야외에서 잠을 잤으며, 추운 11월에 강을 헤엄쳐 건너기도 했다.
1918년 마오쩌둥이 여행 자금을 빌려 베이징으로 갈 때만 해도 그는 아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 당시 나의 세계관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인 개혁정신, 그리고 유토피아적인 사회주의가 뒤섞여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아나키즘적 성향은 그의 사상에 잠재되어 있었다. 그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심어준 사람들은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공산당을 창당한 베이징의 역사학자 리다지오와 철학자 천두슈였다. 베이징 대학 문과대학 교수이자 대학 도서관장이었던 리다자오는 마오쩌둥에게 도서관 말단 사서자리를 알선해주었다. 마오쩌둥은 한 달에 겨우 8달러를 벌었다. 베이징에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의 사상은 점점 과격해졌다.
1919년 두 번 상하이에 들렀고, 고향인 후난성 창사에서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의 저서를 처음으로 읽었다. 이후 1920년 여름에야 비로소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10개월 후 그는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창당 대회에 참석했다.
중국의 레닌
마오쩌둥은 선동가이자 조직가로서 끊임없이 활동하며 공산당 내에서 처음부터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1923년부터 1927년까지는 국민당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마오쩌둥은 모스크바의 크렘린 지도자들이 보기에 극히 못마땅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독자적인 공산주의 노선이었다. 마오쩌둥은 “우리의 저항운동을 농민 계급에 맞추자”고 외쳤다.
이는 크렘린 지도자의 귀에는 이단자의 외침으로 들렸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학설에 따르면 농민 계급이 아닌 도시에 있는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전위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920년 대 초부터 끊임없이 농촌 지역을 돌며 봉기를 조직하고 농민단체를 만들어나가는 마오쩌둥을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지켜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두 편의 글을 써서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주장했고. 공산당의 지도하에 농민을 조직화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 정치국은 이글을 당 기관지에 싣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즉각 다른 잡지에 글을 발표해버렸다.
이 시기만 해도 중국 공산당은 크렘린의 지시로 국민당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다. 국민당은 쑨원 사망 이후 장제스가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1927년에 장제스는 공산당의 이러한 전략을 간파하고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었다.
마오쩌둥의 농민운동은 그 사이에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농민은 도처에서 지주들에게 저항했다. 마오쩌둥은 커다란 희망을 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중국의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에서 1억 명의 농민이 봉기를 일으킬 것이다. 농민은 태풍같이 몰아칠 것이다. 세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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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 운영자(성필원)는 무계획적인 사상가를 뜻하는 'kabbu'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스스로를 학문과 성공의 지혜를 결합시킨 최초의 세속 철학자로 칭한다. 기존의 인식과 완전히 다른 의미있는 삶의 철학을 추구하면서 그 결과물을 글과 강연을 통해 발표하고 있다. 『양처럼 살 것인가 늑대처럼 살 것인가』와『생존』, 『정보브로커』,『인간농장』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으며, 『내 안의 백만장자』와 『행동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를 직접 번역해 책으로 내기도 했다. 페이스북의 20만명 ‘힘이되는 좋은글’ 같은 다양한 사이트들도 운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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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짓던모택동이라!!그러나잔인한인간성도지녀..
모택동 대장정
🫠🫠🫠😗🫠
위대한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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