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 9-13절 설교/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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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9 чер 2024
  •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10.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11.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12.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서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NIV]
    9. As Jesus went on from there,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tax collector's booth. "Follow me," he told him, and Matthew got up and followed him.
    10. While Jesus was having dinner at Matthew's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came and ate with him and his disciples.
    11. When the Pharisees saw this, they asked his disciples, "Why does your teacher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12. On hearing this, Jesus said, "It is not the healthy who need a doctor, but the sick.
    13. But go and learn what this means: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For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9:9
    예수께서...지나가시다가 - 본문의 평행구인 막 2:13, 14에는 예수께서 바닷가를 지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아마 이곳은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 지방의 변두리였을 것이다(D.A. Carson).
    마태라 하는 사람이 - 마태라는 이름은 '신실한 자'란 뜻의 히브리어 '에메트' (* )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식 이름 '맛다냐'(대상 9:15)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는 세리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다시피 동시에 두 서너개의 이름을 가졌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12제자의 명단에는 그를 '마태'란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아마도 레위 소명받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후에 부여된 호칭인 듯하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두개의 이름('사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도의 권위로서 자칭할 경우에는 소명 이후의 호칭인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교할만하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란 이름을 둘 다 사용한 반면 마태 자신은 '마태'란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이 마태는 12제자들중 한 사람이요 본서의 기록자이기도 하다(Gundry, 본서 서론 참조)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 세관에 앉았다는 말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이곳 세관은 그 당시 유대를 속국(屬國)으로 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곳이었고 거기에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다. 한편 이곳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이다. 더욱이 이곳은 수리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품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에 적절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세관은 대로로 통행하는 상인들에게 관세를 부과키 위해 길가나 마을 입구에 간이 건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 관리들은 밤낮없이 세관 업무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리하고 긴 막대로 곡식 자루 등을 찔러보아 그 속에 불법 상품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도 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Van Lennep). 실로 그들은 세금의 강제, 부당 징수등으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했다(5:46; Edersheim).
    나를 좇으라 - 여기서 '좇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이' 는 현재 명령형으로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없이 당장 좇으라는 뜻이다. 이는 신앙 결단의 시급(時急)성을 강조한 말로서 내 제자가 되라는 의미와 상통한다(4:19; 19:21).
    일어나 좇으니라 - 이는 미련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나타낸다. 이 제 2의 세관 자리는 새 사람으로 대치될 것이었지만, 그는 그보다 더 영광스런 천국 일꾼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의 평행 구절에는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고 있다(눅 5:28). 이는 마태의 겸손한 면모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즉 그는 본서의 저자로서, 타인으로부터 훌륭하다고 칭찬받을 만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9:10
    이 구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에게네토' (and it came to pass, 그리고 다음과 같이되었다)란 말로 시작되고 있다(7:28, 29). 이는 마태가 독창적으로 사용한 어투로서 어떤 사건이나 내용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device)한 문장이다.
    마태의 집에서(엔 테 오이키아) - 원문에는 단순히 '그 집에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이 집을 분명하게 '마태의 집'으로 규정하고 있다.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 누가는 이 부분을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눅 5:29)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자신의 집을 그냥 '그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의 기록에 나타나는 '큰 잔치'란 말을 표현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가 자화 자찬(自畵自讚)에는 매우 인색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 성도는 한없이 겸손하신 주님과 더불어 이와 같이 겸손한 주의 제자의 모범을 또한 본받아,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을 칭찬하는 일에는 극도로 인색한 반면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내세우는 데는 적극적이어야 하겠다. 한 알의 밀알 같이 '나'란 자아는 완전히 썩어질 때 비로소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 '앉아 잡수신다'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 식사법에서 보는대로 식탁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먹는 상태를 가리킨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 - 마태가 예수를 위해 베푼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 성격을 띤 것 같다. 즉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를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태는 바로 이 자리에 옛 동료들과 세속적 친구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듣도록 의도했던 것 같다. 여기서 세리는 앞에서 설명되었다시피 비애국적이고 또 욕심많고 부정직한 세관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다. 특별히 본문에서 '죄인들'이란 비록 실정법에 따라 사법적 제재를 받는 죄수(prisoner)는 아니었지만 유대 사회의 도덕 규범과 구전(口傳) 율법인 할라카(Halacha)및 랍비들이 주의깊게 규정해온 전통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무시하던 의식법상의 죄인(sinner)으로서 여기에는 창기와 포주, 그리고 세리가 대표적인 부류였다.
    함께 앉았더니 -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 인정과 우의, 평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즉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이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단코 이들 죄인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고 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려고 이세상에 오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공동 식사에서 얻는 교훈은 (1) 예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주요 친구다. (2) 보통 사람들은 죄인들과 함께함으로써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는 오히려 그들의 악을 선으로 정화시키셨다. (3) 주님께서는 의인인 척 착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자신의 죄로 갈등하고 연민하는 영혼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는 점에서 깊은 교훈을 준다.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자칭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예수의 기이한 행동에 따른 율법의 파괴 여부를 관찰,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다. 따라서 분명 자기 의(義)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 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잔치를 끝까지 지켜보며 예수의 결점을 확보해 두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와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따라서 죄인과 동류(同類)인 그를 어찌하여 선생으로 두고 따르느냐는 듯이 비난하면서 선생과 제자 사이를 이간(離間)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한편 그들은 권능을 행하신 예수께(2-6절) 직언(直言)할 수 없을 만큼 용기가 부족했던 자들이었다.
    2024년 6월 28일 금요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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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cyreform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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