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chistoria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한 게 또 있는데요 일본이 2차 갑오개혁에서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교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강요했나요? 학교에서 받은 부교재에는 그렇게 필기돼 있는데 교과서를 봐도 수업 들었던 걸 생각해도 교정청을 설치했다는 내용은 잘 모르겠어서요
필기가 조금 잘못되어 있는 것 같아요. ○ 전주화약 이후 정부는 [교정청] 설치, 농민군은 집강소 설치 ○ 일본이 경복궁 점령 후 개혁 강요 : 교정청 폐지, [군국기무처] 설치 ○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며 군국기무처를 통한 간접 개입이 아닌 직접 개입으로 변경 : 군국기무처 폐지 교정청은 다시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홍범14조가 군국기무처의 개혁을 계승하려했다는 것은 제1차 갑오개혁의 '자주성'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했다는 것으로도 이해해볼 수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요구가 홍범14조에 다수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개혁 내용이 좋다 나쁘다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스럽네요. 개혁에 대해서도 찬반이 있었을 것이구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 당시의 개혁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의 개혁 요구 자체가 추후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기본 단계라고 생각했을때 실제로 '좋은 것'인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08:45 선생님 '왕실과 정부의 분리'는 갑신정변 개혁 정강과 연과돼 있는 건가요? 그리고 사회면에서 일어난 개혁인 신분제 폐지, 노비제 철폐, 과부의 재가 허용은 동학농민운동의 영향을 받은 게 맞죠?
왕실과 정부 사무의 분리는 갑신정변 개혁 정강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다만 갑신정변 주도 세력들이 입헌군주제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죠.
두 번째 질문은 동학농민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teachistoria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한 게 또 있는데요 일본이 2차 갑오개혁에서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교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강요했나요? 학교에서 받은 부교재에는 그렇게 필기돼 있는데 교과서를 봐도 수업 들었던 걸 생각해도 교정청을 설치했다는 내용은 잘 모르겠어서요
필기가 조금 잘못되어 있는 것 같아요.
○ 전주화약 이후 정부는 [교정청] 설치, 농민군은 집강소 설치
○ 일본이 경복궁 점령 후 개혁 강요 : 교정청 폐지, [군국기무처] 설치
○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며 군국기무처를 통한 간접 개입이 아닌 직접 개입으로 변경 : 군국기무처 폐지
교정청은 다시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teachistoria 그쵸 저도 교정청이 언제 다시 설치됐나 의아해서 여쭤봤어요 큰일날 뻔했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간 이유가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떄문이기도 하지만 단발령 떄문인 이유가 더 큰게 맞죠?
아관파천의 '배경, 이유'로 단발령(을 포함한 을미개혁)을 꼽지는 않습니다.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이후의 신변상의 위협으로 주로 설명하구요.
다만 아관파천 이후 단발령과 같은 을미개혁에서 추진했던 내용이 취소되기는 합니다 :)
휴 여기까지 왔네요 시험범위 끝😊😊 다음에 또 올게요
새벽까지 ㅜㅜ 좋은 결과있길 바랄게요!
20분에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ㅔ 홍범 14조가 군국기무처의 개혁을 계승해나갔는데 그게 일본 마음대로긴하지만 그래도 저희나라 입장에서도 좋은거죠...? 근대적 교육제도도 마련이 되었으니
홍범14조가 군국기무처의 개혁을 계승하려했다는 것은 제1차 갑오개혁의 '자주성'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했다는 것으로도 이해해볼 수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요구가 홍범14조에 다수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개혁 내용이 좋다 나쁘다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스럽네요. 개혁에 대해서도 찬반이 있었을 것이구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 당시의 개혁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의 개혁 요구 자체가 추후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기본 단계라고 생각했을때 실제로 '좋은 것'인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