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자막에서 1866년 5월 16일이라고 되어있는데 1871년 아닙니까?? 오류 같습니다. 1866년은 병인년이고 1871년이 신미년 입니다. 미국의 침공은 신미양요구요. 3:37초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정바랍니다. 뒤에 나오는 날짜달도 양력 음력을 표시해야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Jeong-eun 지적해주신 부분에 대한 답변 드립니다. 유튜브를 운영하고 계셔서 아시겠습니다만, 유튜브에서 영상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기존 영상을 지우고 새로 올려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많은 분들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댓글 또한 사라지게 됩니다. 이에 재단은 위와같은 답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소 마음에 안드시겠지만, 재단의 이러한 고민을 혜량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오류없는 영상 제작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알고 가면 좋습니다 신미양요 Interior of Fort McKee., 06-1871 - NARA - 559259.tif 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날짜 1871년 6월 1일 ~ 1871년 6월 11일 장소 강화도 일대 결과 미국의 군사적 승리 미국의 외교적 패배 미군의 철수 조선의 쇄국 정책 강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최종 체결 교전국 지휘관 Joseon Sujagi-01.svg 어재연† 정기원 이현학† 김현경† 박치성† 유예준† 미국 존 로저스 윈필드 스콧 슐레이 병력 약 500명 군함 5척, 대포 90문, 병력 800명 피해 규모 243명 사망 24명 부상 3명 사망 10명 부상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 6월 1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투이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의 주요 수로였던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고 조선 측의 거부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탐침을 시도하여 교전이 일어났다. 3일간의 교전 결과 조선은 광성보가 함락되고 순무중군 어재연을 비롯한 수비 병력 대다수가 사망하였다. 미해군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하였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조선 시대는 한국의 역사에서 외국과의 접촉 범위가 가장 좁았던 시대였다. 조선은 사대(事大)와 선린(善隣)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과 일본 등 매우 제한적인 국가들과 외교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외교는 중국을 중심에 두는 상하 관계로서 인식되어,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는 한편 이웃한 일본, 유구(琉球, 류큐), 섬라(暹羅, 태국) 등지의 외교 사절에 대해서는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으로 대하였다. 이때문에 17세기 이후 서양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나 이들을 대등한 외교의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 정조 시기 신해박해 이후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여러 차례 박해가 있었다.1801년 황사영이 베이징 주재 프랑스 주교에게 천주교의 포교를 위해 서양 군함 백 척과 수만 명의 병사를 보내달라고 쓴 편지가 발각되는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 이후 조선은 외국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의 열강들은 아시아 각지를 탐험하고 통상을 앞세워 제국주의적인 침탈을 하고 있었다. 19세기 무렵 서양인들은 조선을 북극보다 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여겼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던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조선을 “자신이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너무나 깊은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외국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섬나라”라고 표현하였으며, “중국해안에서 증기선을 타고 하루 안에 닿는 이곳에서 …… 반야만적인 정부가 자국 백성의 소원에 반해 ‘출입금지’문구를 써 붙이고 전체 문명세계에 도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은 여러 차례 조선의 통상 개방을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양이(洋夷)들이 초지진에 갑자기 침입한 데 대해서는 어제 경기 감영에서 치계(馳啓)가 있었습니다. 심부(沁府)의 해상과 육지에 대한 비상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조선왕조실록 고종 8년 4월 24일 세번째 기사에도나왔다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는 1871년 5월 16일 프리깃함인 기함 USS 콜로라도를 비롯한 알래스카호, 팔로스호, 모노캐시호, 베니치아호 등 전함 5척을 이끌고 일본의 나가사키를 출발하였다. 병력은 500여 명의 수병과 150여명의 해병이 투입되었다.미군 함대는 아산만 풍도 앞에 정박하고 작은 배에 병력을 나누어 강화도 인근을 정탐하였다. 5월 26일 영종도 방어사는 이양선이 나타나 물 깊이를 재었다고 보고하였고[20], 남양부사 신철구가 종선 세척에 탄 미군에 다가가 글로 목적을 물었으나 미군이 영어로 글을 적어 서로 의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미군은 큰 배를 가리키며 같이 가자 하였으나 함께 가지는 않았고 서로간에 약간의 물자만 교환하였다. 이튿날 미군 함대는 남양부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의 흠치대신이 귀국의 높은 대신과 협상할 일이 있어 온 것인 즉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다”고 목적을 밝혔다.월 10일 미군은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군함 2척의 지원을 받으며 24척의 종선에 나누어 탄 651명의 병력이 상륙하였고 초지진을 수비하던 조선군이 백병전을 벌이며 저항하였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6월 11일 미군은 대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으며 조선군은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화력 열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남기고 덕포진으로 패퇴하였다. 미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미군 기함 콜로라도호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으며, 미군이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지자 살해되었다고 대답하였다. 미국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광성보 전투에서 보복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 8 시간 가량 치러진 이 전투에서 조선측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 미군은 광성진의 관아를 불태우고 초지진을 거점으로 삼아 주둔하였다.한편, 고종 실록은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6:18 포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제대로 고증했네요 ㄷㄷ 실제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프랑스 기병이 기껏 고지의 포병을 제압했는데 망치와 못을 든 병력이 전부 죽어서 포를 무력화시키지 못하고 고지도 뺏긴 뒤에 포병들이 다시 포를 쏘는 사례도 있을정도죠. 포가를 무너뜨려봐야 흙으로 쌓아서 임시방편으로 해결볼수 있고, 포신을 부서뜨리기엔 단단하니 쓰는 방법이죠. 총으로치면 방아쇠를 못쓰게 만드는 식이라고 보심 됩니다.
일명 수자기(帥字旗)로도 알려진 어재연장군기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수비하던 어재연 장군이 사용한 군기로, 미군에 의해 전리품으로 강탈된 후 그동안 미국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었다. 가로와 세로 각각 4.5m 정도에 삼베 또는 광목으로 추정되는 재질로 만들어진 어재연장군기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수자기로, 매우 희귀한 군사 자료일 뿐만 아니라 근세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문화재이다. 당초 어재연장군기의 영구 반환을 추진했으나 미국 해군사관학교 측이 관련 법령이나 절차상의 사유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우선 장기 대여하기로 하여 2007년 10월 15일부터 이틀간 한미 양측이 어재연장군기의 상태를 점검한 후 대여협정서에 서명함에 따라 10월 18일 워싱턴에서 항공편으로 운송돼 10월 19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재연장군기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임시 보관한 후 10월 22일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설명회에 함께 공개되었다. 2008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실에서 특별 전시된 후 2008년 5월 이후 인천광역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전시됐으며, 2010년 이후에는 강화전쟁박물관에서 옮겨졌다. 현재 전시중인 것은 복제본이다. 2020년 반환 예정으로 알려졌으나 계약기간 연장 및 계약 갱신으로 2021년 현재에도 계속 국내에 남아 있다.깃발에 새겨진 한자 '帥(수)' 는 '장수, '장군', '우두머리' 등을 상징하는 뜻으로 '장수 수', '장군 수', '우두머리 수' 라고 한다. 여기에 '師(스승 사)' 와 글씨가 비슷하여서 한자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혼동 및 오기 등이 생길 수 있는데 오른쪽 '巾(수건 건)' 변의 위를 더하지 않으면 구분을 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두 문자 모두 병사를 감독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도자라는 뜻이 통한다 수자기의 뜻은 지휘소나 장군이 군사들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추측한다.수자기는 1871년(고종 8년) 벌어진 신미양요 때 어재연(1823~1871)의 장군기였지만 미군이 빼앗아 갔다.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것을 2007년 10년 장기임대로 빌려왔다. 2017년 임대기간이 끝났지만 2년 단위로 재계약을 거듭하고 있다. 장기임대를 성사시킬 때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수자기 반환’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미해사박물관장은 “반환은 미국내법상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측이 ‘수자기’를 문화유물로 취급하지 않고, 승전 기념으로 노획한 전리품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1814년 ‘미 해군 전리품 깃발 수집(The United Stated Navy Trophy Flag Collection)’과 관련한 의회법을 제정했다. 또한 1849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재임 1845~1849)이 미 해군장관에게 “전쟁 중 적의 군기, 색상기 등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고 보관·보존·전시를 위해 미해군사관학교를 관리기관으로 정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에따라 미 해사 박물관은 미국이 200년간 전리품으로 획득한 다른 나라의 깃발 25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해사박물관장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수자기를 반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대여는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겨놓았기 때문에 상호접촉을 통해 장기대여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돌출변수가 생기기도 했다.어재연 장군의 모자 깃털까지 노획 우여곡절 국내 전시 중이지만 수자기의 신분이 여전히 미군의 전리품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가로 413㎝, 세로 430㎝가 넘는 대형 깃발인 수자기의 오른쪽을 보면 잘려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군 본영(광성보)을 빼앗은 미군들이 개인적 전리품으로 앞다퉈 깃발 일부분을 잘라간 것이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만 노획한 것이 아니었다. 참전 장교인 매클레인 틸톤 대위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틸톤의 ‘1871년 조선에서의 해병대수륙양면작전’ 보고서). “나는 당신(부인)에게 줄 깃털 장식과 적·황색 말털을 입수했소. 내가 조선장수(어재연)의 전립(戰笠·군복의 갓)에서 떼어낸 장식품이오.” 틸톤은 “노획한 장식품을 쳐다보며 즐기고 있다”면서 “이것은 당신(부인)과 나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해두자”고 했다. 미군은 이렇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유품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이 뿐이 아니다. 미군은 47기의 조선군 깃발과 182문의 포, 481문의 화승총을 노획했다고 자랑스레 기록했다. 인명피해는 또 어떤가. 미군은 3명 사망과 10여명 부상에 그쳤지만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포함, 350여명이 전사(조선 추산 57명)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시간 동안 조선군 200명을 죽인 것 같소…시체 더미를 보았는데 떼죽음을 당한 돼지 떼 같았소. 동료가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조선군의 머리를 총으로 쏘아서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소. 나는 ‘그건 살인 행위이니 그냥 두라’고 말했소.”(틸톤의 보고서)이정도로 대충 설명해봄
사극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고 돈 투자해서 만드는 자본의 공정물이기 때문에 감독이나 연출진이 고증에 중요성을 두고 목매는 사람들이 아니면 제작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이것저것 희생되기 마련ㅋㅋ 촬영장 화재안전때문에 호롱불을 그 시대엔 있지도 않던 양초로 대신한다던지… 시장판매되는 촬영의상이 고증에 맞지않아 전문가를 섭외해서 의상제작을 전부 해야하는데 예산이 받쳐주질 못한다던지…
@@DogBarkingAtMoon 그래서 고증이나 퀄리티 뛰어난 작품들은 그 제작비만 천문학적으로 들어가죠..... 근본적인건 돈문제며 그렇다고 너무 고증에만 충실하면 또 드라마적 재미가 반감되기에 시청률 문제도 있구요 고증이냐 시청률이냐 에서 타협을 보면 대부분 시청률이죠 ... 시청률이 안나오면 열심히 만들어도 적자나니까요
이 신미양요 이후 조선에는 영어열풍이 불었었다고 하더군요 영어가 신분상승의 역할을 했었기에 너도 나도 영어공부에 열중을 했었고 그중에는 떡장수가 출세를 해서 미국에 공사관 지금으로 치면 대사 되기도 했었죠 그당시 만들어진 영어교재 인 아학편이 현대에 만들어진 영어 교재 못지 않은 효과적인 교재 였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미군은 예나 지금이나 잘 싸우는거 같네요 장비의 차이도 많이 나지만 거기다 전술 조차도 차이가 많이 나는거 같군요
미군이 잘싸운 이유는 남북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이기 때문에 전부 실전 경험이 있었고 죄다 베테랑 급이였음 병인양요당시 프랑스군이 조선군에게 대패 했던건 왠만한 서방국가면 대부분 알고있던 사실이고 미군병사들도 조선군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건 알고있었기에 전투전 특별 해상 기동훈련에 견인포까지 같이 끌고올 정도로 독하게 준비했기에 저리 잘싸운것.
저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지 오래되지 않은 터라, 전술도 무기 성능도 상당히 발달해 있었죠. 유럽에서는 1차 세계대전에서야 본격화된 참호전도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때 했구요. 반면 당시 조선은 무기 성능이 미국에 훨씬 미치지 못하니 일방적으로 두들겨맞을 수밖에 없었죠.
"건들건들" 최고! '치밀치밀'로 바꾸심이 어떠한지? 총에 대한 소개도 훌륭했지만,역사 다큐멘터리는 더 훌륭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350:3 무기체계의 선진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느껴집니다.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신 선열들께 묵념 올립니다. 그 분들이 있어,우리가 살고 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건들건들팀의 영상미, 고증은 역시 최고 입니다. ! 혹시 신미양요 당시 미해병 무장에 대해 별도로 다뤄주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해당영상에서는 스프링필드 1861을 재현한 거 같은데 당시 촬영한 일부 사진에서는 레밍턴 롤링블록 등도 보이고 아직 어떤 무장을 얼마나 편성했는지, 양측 보병간 화력차이가 얼마나 였는지에 대해 인터넷에는 여러 설이 많던데 이참에 건들건들에서 정확히 밝혀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 상륙군 10개 중대 중 1개 중대가 해병대(Marines)였는데 이들은 착검이 가능한 스프링필드 장총을 소지했구요 나머지 해군보병(Naval Infantry)들은 당시 최신형인 레밍턴 롤링블록 카빈을 소지했습니다. 레밍턴 카빈은 후장식의 단발총이었으니 조선군의 전장식 화승총은 상대가 안됐지요. 헤드샷으로 학살 당하는 수준이었으니 치열한 전투였다는 그들의 수사는 병아리 목비틀기 수준의 상대에 대한 미안함,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미해병대 중대장 틸튼 대위의 보고서/서한에도 그런 뉘앙스의 표현이 나옵니다.
손돌목 포격사건 이후로 로우 공사가 열흘 안에 사과하라 시간 줬을 때 조선은 강화도에 진무영 중군 어재연을 임명하고 휘하에 중앙군 5영에서 보병 각 1초씩 뽑고 훈련도감에서 1초를 더 뽑아 약 600명을 딸려 보냈죠 이때 인천부에도 포탄과 군량을 수송하고 강화에도 무기와 물자를 보냅니다 그러니 미국군의 침입이 예상된 광성보에는 최소 중앙군 정예병력 5개 중대와 진무영 부사령관인 어재연과 불랑기 등 화포 140여문이 배치돼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작정하고 파병하고 대비한 거죠
그만큼 아주 교활하고 치밀하게 계획한것이죠. 신미양요 이후 도베르트 도굴사건 까지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새웠으며 자체적으로 힘을 기르고자 하였음 그때 일본이 윤요호 사건을 일으켰고. 외교적으로 간섭을 시작하였고 그나마 서방세력보다는 바로 옆동내 일본은 그래도 믿을수 있을거다라는 의견때문에 개화를 하였고 점차적으로 조선내에 일본군을 들이고 화폐계혁등을 시도하면서 점점 조선의 자주권 경제권을 잡아먹으려 했음... 친일파 중에서도 매국노들... 을사오적 이것들이 내부분열을 일으켰고 실질적으로 일본군이 주둔한 시점에 조선조정은 현실을 뒤엎을만한 힘이 없었고... 결국 고종은 독살당하고... 나라는 송두리째 넘어간것이고... 이런식으로 교활하게 내부에서부터 무너트렸기때문에 빼앗기게 된거죠
미국이 전투만 집중한 이유가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항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더군요 일본의 경우에는 차이가 나는 전투력을 보여주니까 항복을 하고 개항을 하더니만 조선의 경우에는 항복은 커녕 정말 죽을때 까지 악착 같이 싸울줄은 생각도 못했던거 같습디다. 미군의 사상자는 얼마 되지않았지만 악착같이 싸우는 모습에 질려 버려서 더이상 전진 하는걸 포기 하고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국제정세에 둔감했던 조선. 이들이 조금만 더 힘의 차이를 깨닫고 국익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일찌감치 개화하여 당시 패권국인 영국과 협력할 수 있었고,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는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음. 오히려 Greatgame중 영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을 것. 당시 영국은 인도를 포함한 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을 컨트롤 하기도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조선은 러시아와 손을 잡음.
@@user-nasanato 사쓰에이 전쟁이랑 시모노세키 전쟁 둘이 대표적인 저항이지만 사쓰에이 전쟁이 다이묘(지방 지도자)급이 중심이 되서 싸운것에 비해 중앙이었던 막부는 사쓰마가 싼 똥을 치우느냐 이리저리 움직였어야했죠. 사쓰마가 사쓰에이 전쟁에서 선전하는데 일조한 것이 오키나와에서 나온 설탕이란 존제때문인 것도 참 아이러니고요.
@@user-nasanato 조슈는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서양 연합함대의 힘을 깨닿고 선회하고요. 아이러니한게 이후 일어날 보신전쟁에서 센다이같은 지방에선 통나무에 철사를 휘감아 임시로 대포를 만드는 행보를 보이는데 각 번마다 무기 재원 능력이 재각에 막부군을 프랑스가 지원하고 사쓰마와 조슈를 영국이 지원하는 대리전의 모습을 띄우고 있었죠.
당시 조정에서도 기술차이 때문에 개항을 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은 같았지만 방법과 시기 면에서 주장이 엇갈렸죠 개항을 해서 우리가 주권침탈 없이 안전하게 발전하리라 보장도 없고 저들의 의도는 분명 식민지화 시키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 그럼 차라리 지금바로 개항을 하지 말고 우리스스로 강해진후에 개항을 하자 이런 주장과 그러기에는 시간이 늦는다며 지금 개항을 하지 않으면 격차가 더더욱 심하게 벌어질것이다 라는 의견이 오고갔죠 그이후 독일의 도베르트 도굴사건 이후 서양인에 대한 멸시와 경계심이 극에 달해 서양과의 접촉을 거부하였지만 일본의 윤요호 사건이후 그래도 그동안 같이 교류가 있었고 같은 동양인이라는 믿음으로 일본에 개항을 허락했는데....이 씨벌놈들이 도와주는척하면서 뒤로는 야금야금 주권 빼았네?
However, 신미양요 did not arouse the sense of crisis among Koreans and the possibility of reform and modernization. This is in stark contrast to the Black Ship Incident1853 in Japan.
울나라 역사 교육이 참 ...개선되어야 할게 너무 많다.. 유럽애들 미국애들 같은 경우 기사도 정신 같은게 있어서 무릎꿇고 패했다 인정할경우 더는 공격하지않는다던가 그런 룰이 있는데... 실제 전쟁에서도 그걸 적용했음. 포로를 죽이지 않고 항복하면 공격하지않고 등등 ...이런게 있었는데.. 동양에서 특히 조선이란 나라는 그런게 없었음..포로고 뭐고 사람 잡으면 목베고 껍질 벗기기 자기 맘대로 였음. 우리 역사에선 가르쳐주지않는데... 조선이 여진족 부락 급습한거라던가 그 부족 사람들 잔인하게 살해한것보면 끔찍함.. 그런 입장에서 조선이란 나라도 전투에서 패하고있을즈음에는 ... 포로나 결국 전부 참수하고 죽일거라 생각했기때문에 그저 어떻게든 죽을려고 했던거임. 전쟁에서 이긴 미군이 조선 포로들을 잡아둔 다음.. 다시 조선왕실에 조선군 포로 문제에대해 얘기를 했는데... 조선왕실은 이해를 못했음.. 조선군 포로를 죽이든 살리든 그건 미군 마음이지 미군이 그 포로 처리 문제를 조선에 왜 묻지?? 몰라 뭐가 됐든 우리는 너희랑 무역 개항 안하고 .. 그 조선군 포로는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이런 답변이 나왔음.. 미군은 목적 달성도 못했으며 어차피 포로는 죽일수 없으니 나중에 다시 그 포로들을 풀어줌. 그리고 조선을 떠남.
울나라에 국뽕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안타까운데.. 미군이 성을 점령하고 조선군 무기를 봤는데.. 조총이나 홍이포 ..이런거 1600년대 초에 나온 무기임.. 그걸 200년동안 발전도 없이 사용했다는게 너무 문제지.. 1600년대 무기와 유럽의 1800년대 무기가 비교나 할수 있나?? 일본은 에도시대 말기때 이미 유럽식. 소총이 수만정을 확보하고있었고 미국이나 영국처럼 큰 배는 아니지만 나름 똑같이 증기선도 만들었었는데.. 그런 기술력과 무기가 있었으니 영국이 일본과의 전투후에 바로 동맹도 맺고 협력도 함께 했는데. 조선은 뭐 부시맨 같은 그런 기술력이었으니 나라가 망할수 밖에 없었지..
광성보에서 죽은 미국군 3명이 오발사에 실족사했다고 개소리 써대는 인간들 때문에 팩트 체크 들어간다 'Enemy bullets whined overhead but most were most poorly aimed. None-the-less, one enemy round reached out to take the life of Marine Private Dennis Hanrahan. He was the first casualty. Standing on the wall, sword in one hand and pistol in the other, Lieutenant McKee fired two shots and then dropped into the midst of the Koreans. Almost immediately the enemy was on him, one of them shooting McKee in the groin as McKenzie, Rogers and Troy leaped from the wall to assist their commander. Nearby Private Michael Owens likewise fought on despite serious wounds. Korean Fire cut down Seaman Seth Allen of the USS Colorado as he stormed the fort.' ㅡ C. Douglas Sterner의 Shinmiyangyo란 고전적 자료에 잘 나와있음 추가로 마지막 백병전에서 부상자가 더 나오고 수자기를 탈취한 파비스나 어재연을 죽인 류크스 등도 얘기 나오니 구글링들 해보시길
@jj h 애초에 전쟁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과정이나 명분으로 풀리지 않을 때 군사적으로 해결하려고 발생하는 거임 그래서 득실을 따질 때도 스포츠나 워게임처럼 단순 산술 수치로만 봐선 안 됨 미국군 조선군 교전비를 떠나 전투 전후맥락을 살폈을 때 포함외교의 본질과 국제정세의 변하지 않는 냉정함 등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이런 역사물 보기도 하는 거임 게다가 시공간적으로도 가까운 일이기도 하고 근데 뭔 헛소리하냐 왕조국가 시절이면 그냥 아무 상관 없으니까 역사 안 배워? 개소리하는 줄 알면 좀 가서 급식이나 더 쳐먹어라 유튜브에 잼민이가 많다더니 ㅉ 더이상은 니가 글 싸도 신경 안 쓴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우리 아버지 께서 중학생이 셨던 시절 70년 후반에 아버지 학교 에서 교련을 하셨던 선생님 께서 6.25전쟁 중에 지금의 백마부대 에 장교로 복무 하였는데 그 선생님 께서 지휘 하던 부대깃발을 중공군 에게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터넷 에서 백마부대 의 6.25전쟁 기록 을 위키에서 적군 에게 깃발을 탈취 당한 이야기 가 없었지만 아버지 에게 말씀을 하진 못했습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강대국에게 얼마나 유린 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네요. 지금은 우방국이지만 프랑스, 미국, 일본 모두 경계해야 할 나라들입니다.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고 오직 국익만 있는 국제질서이니까요. 대한민국의 부국강병을 응원합니다. 신미양요 때 침략국 미군을 3명 밖에 죽이지 못했을 때 우리나라 군인은 350명 넘게 희생된 것에 분한 마음 금할 길이 없네요. 입으로만 강군 말고 실제 국제정세에 맞는 부국강국을 바랍니다. 그 이전에 전쟁없는 평화로운 국가! 남북이 함께 손잡고 외세를 이겨내는 평화통일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
3:31 자막에서 1866년 5월 16일이라고 되어있는데 1871년 아닙니까?? 오류 같습니다. 1866년은 병인년이고 1871년이 신미년 입니다. 미국의 침공은 신미양요구요. 3:37초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정바랍니다. 뒤에 나오는 날짜달도 양력 음력을 표시해야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3:31초와 3:37초 자막에 들어갈 연도는 1866년이 아니라 1871년이 맞습니다.
업로드 이후 발견한 오기로 수정이 어려운 점을 살펴 시청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나만 그 오류가 눈에 띄었던게 아니었네....,,,
@@okchf 오류를 지적 당했으면 다시 찍던지 아님 찍어 논거에 오류부분만 다시 편집해서 붙여 넣기 하면 될 거 같은데 수정못한다고 강짜를 부리네
@@Jeong-eun 지적해주신 부분에 대한 답변 드립니다. 유튜브를 운영하고 계셔서 아시겠습니다만, 유튜브에서 영상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기존 영상을 지우고 새로 올려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많은 분들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댓글 또한 사라지게 됩니다. 이에 재단은 위와같은 답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소 마음에 안드시겠지만, 재단의 이러한 고민을 혜량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오류없는 영상 제작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okchf 제목에 수정내용 공지해주심되겠네유
건들건들 퀄리티가 역사 다큐멘터리보다 더 이해쉽고 잘 만듬... 편집자님...
편집자 그는... 국어책
진짜 요즘 유튜버 중에 가장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게 건들건들 아닐까 싶다 ㅎㅎㅎ 이런 콜라보나 기획 많이 해주세요!!
세금은 진짜 이른데 써야지. 뿜뿜!
좋은 이야기 잊혀지지 않게 풀어주어 고맙습니다. 건들건들 화이팅 우리나라 화이팅
하 씨 눈물나ㅜㅜ
건들건들팀이 건들이면 진짜 작품이된다…
이쯤되면 건들건들 니들 정체가 궁금하다 진심
무기에서부터 군복까지...고증 진짜 사랑합니다
그래픽팀의 노고가 느껴지는 명장면들이 많네요
자주국방의 핵심은 국방기술 발전!!!
총과 대포의 사거리와 효율성차이가 ~ㅠㅠ 350 대 3
조상님들의 호국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알고 가면 좋습니다
신미양요
Interior of Fort McKee., 06-1871 - NARA - 559259.tif
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날짜 1871년 6월 1일 ~ 1871년 6월 11일
장소
강화도 일대
결과
미국의 군사적 승리
미국의 외교적 패배
미군의 철수
조선의 쇄국 정책 강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최종 체결
교전국
지휘관
Joseon Sujagi-01.svg 어재연†
정기원
이현학†
김현경†
박치성†
유예준† 미국 존 로저스
윈필드 스콧 슐레이
병력
약 500명 군함 5척, 대포 90문, 병력 800명
피해 규모
243명 사망
24명 부상 3명 사망
10명 부상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 6월 1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투이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의 주요 수로였던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고 조선 측의 거부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탐침을 시도하여 교전이 일어났다. 3일간의 교전 결과 조선은 광성보가 함락되고 순무중군 어재연을 비롯한 수비 병력 대다수가 사망하였다. 미해군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하였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조선 시대는 한국의 역사에서 외국과의 접촉 범위가 가장 좁았던 시대였다. 조선은 사대(事大)와 선린(善隣)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과 일본 등 매우 제한적인 국가들과 외교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외교는 중국을 중심에 두는 상하 관계로서 인식되어,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는 한편 이웃한 일본, 유구(琉球, 류큐), 섬라(暹羅, 태국) 등지의 외교 사절에 대해서는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으로 대하였다. 이때문에 17세기 이후 서양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나 이들을 대등한 외교의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 정조 시기 신해박해 이후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여러 차례 박해가 있었다.1801년 황사영이 베이징 주재 프랑스 주교에게 천주교의 포교를 위해 서양 군함 백 척과 수만 명의 병사를 보내달라고 쓴 편지가 발각되는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 이후 조선은 외국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의 열강들은 아시아 각지를 탐험하고 통상을 앞세워 제국주의적인 침탈을 하고 있었다. 19세기 무렵 서양인들은 조선을 북극보다 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여겼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던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조선을 “자신이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너무나 깊은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외국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섬나라”라고 표현하였으며, “중국해안에서 증기선을 타고 하루 안에 닿는 이곳에서 …… 반야만적인 정부가 자국 백성의 소원에 반해 ‘출입금지’문구를 써 붙이고 전체 문명세계에 도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은 여러 차례 조선의 통상 개방을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양이(洋夷)들이 초지진에 갑자기 침입한 데 대해서는 어제 경기 감영에서 치계(馳啓)가 있었습니다. 심부(沁府)의 해상과 육지에 대한 비상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조선왕조실록 고종 8년 4월 24일 세번째 기사에도나왔다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는 1871년 5월 16일 프리깃함인 기함 USS 콜로라도를 비롯한 알래스카호, 팔로스호, 모노캐시호, 베니치아호 등 전함 5척을 이끌고 일본의 나가사키를 출발하였다. 병력은 500여 명의 수병과 150여명의 해병이 투입되었다.미군 함대는 아산만 풍도 앞에 정박하고 작은 배에 병력을 나누어 강화도 인근을 정탐하였다. 5월 26일 영종도 방어사는 이양선이 나타나 물 깊이를 재었다고 보고하였고[20], 남양부사 신철구가 종선 세척에 탄 미군에 다가가 글로 목적을 물었으나 미군이 영어로 글을 적어 서로 의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미군은 큰 배를 가리키며 같이 가자 하였으나 함께 가지는 않았고 서로간에 약간의 물자만 교환하였다. 이튿날 미군 함대는 남양부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의 흠치대신이 귀국의 높은 대신과 협상할 일이 있어 온 것인 즉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다”고 목적을 밝혔다.월 10일 미군은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군함 2척의 지원을 받으며 24척의 종선에 나누어 탄 651명의 병력이 상륙하였고 초지진을 수비하던 조선군이 백병전을 벌이며 저항하였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6월 11일 미군은 대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으며 조선군은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화력 열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남기고 덕포진으로 패퇴하였다.
미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미군 기함 콜로라도호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으며, 미군이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지자 살해되었다고 대답하였다. 미국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광성보 전투에서 보복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
8 시간 가량 치러진 이 전투에서 조선측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 미군은 광성진의 관아를 불태우고 초지진을 거점으로 삼아 주둔하였다.한편, 고종 실록은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진주박물관에서 훌륭한 다큐멘터리 만들었는데 이어서 여기에서도 좋은 영상이 또 만들어지는군요 ㅎㅎ
나중에 학생들한테 신미양요 가르쳐줄 때 이 영상 사용하면 ㄹㅇ 좋을 거 같아요 ♥♥
?? 근데 미군이 수자기 랑 찍은 원본사진이 미국 어느서 보관하고 있나요??
대답 할수 있습니까? ㅋㅋㅋ
순진한 한국인들 많아요
야 이 영상을 몇 번 돌려보는지... ㅜ 진짜 울컥하네요
근데 수자기를 뺏겼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죠?
미군이 당시 찍었던 사진의 출처 압니까?
미국 도서관에 사진 원본 소장되었다는 자료가 없던데?
웃끼네요. ㅎㅎ
골통 한국인들
영상보고 슬픔과 눈물이 흐른다.
항상 좋은 영상 감사 합니다.
와 진짜 명작하나 본 느낌이네요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겪었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통탄을 금치 못하겠네요ㅠㅠ 정말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6:18 포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제대로 고증했네요 ㄷㄷ 실제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프랑스 기병이 기껏 고지의 포병을 제압했는데 망치와 못을 든 병력이 전부 죽어서 포를 무력화시키지 못하고 고지도 뺏긴 뒤에 포병들이 다시 포를 쏘는 사례도 있을정도죠. 포가를 무너뜨려봐야 흙으로 쌓아서 임시방편으로 해결볼수 있고, 포신을 부서뜨리기엔 단단하니 쓰는 방법이죠. 총으로치면 방아쇠를 못쓰게 만드는 식이라고 보심 됩니다.
정말 오늘도 좋은 영상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ㅜㅜ 순국선열들을 기립니다. ㅜㅜ 정말 잔혹한 시대네요
구한 말의 암울함과 처절함, 슬픔을 보여주는 전투.....
??? : "이놈아! 우리가 도망가면, 여기는 누가 지키냐!!"
미스터선샤인ㅠㅠ
???: 조선은 너희를 버렸다.
그 아들도 똑같은 말을 남기고 ㅜ순국ㅜㅜㅜㅜㅜ
그렇게 지켜서 2023년 김건희냐 ㅋㅋ
@@riankal진심 이런 정치병자들이 한국의 암덩어리다
서구 최신예 뮤기에다 독립전쟁 멕시코침략전쟁 남북전쟁 등 지속적으로 전투경험 많은 미군과의 싸움이었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고향에 갈 때 초지대교를 지나는데 이렇게 홍보해 주시어 정말 감사합니다.
예전에 프랑스에서 우리나라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겠다는 핑계로 우리나라가 문화재를 제대로 보관할 시설과 능력이 안되니 우리가 보관하고 있어 주겠다도 있었는데 참 기가차고 화가 났던 것이 생각나네요
가만 따지고 보면 그말도 일리는 있는말이라 할말 없었다는게 더 열받죠...
광화문 불타던걸 생각하면.....
와 세상에 이런 영상이 없다
참 잘 만들었네요.
오~ 이야기로 가미되니까 더욱 현장감 있어요
졸라 생생하게 잘 만듦
퀄리티 미쳤다...
따끈 따끈한 고퀄리티 영상...
그리고 양아치 프랑스..
근데 막상보면 영국이나 프랑스도 나쁘진 않음 조선이 개방을 안해서 그렇지 개방 안 시켜줬으면 아직도 노비 있이 살듯
@제니스트랜스오셔닉h500나레이션 근데 정작 프랑스는 조선도왔다는 함정
엘랑 ㅋㅋㅋ
너무 잘만든 영상입니다
요즘 국립진주박물관도 그렇고 이런 좋은 영상들이 많이 나와서 좋네요!
강화도는 조선의 목줄. 수자기를 실제로 보면 눈물이 납니다. 멋있는 영상 제작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건들건들 못참지
마군 총기 디테일 표현과 쏘기 직전 화약접시 여는 화승총 발사 모습까지…. 진짜 이 형님들 햐오…….
이형들은 진짜 수준이 다르다.. 전사에서 역사로..
신미양요 교육용으로 좋을거같은데
좋아 좋아
아주 퀄리티가 멋져
광성보와 수자기, 참 가슴 뜨거워지고 감사한 마음이네요.
일명 수자기(帥字旗)로도 알려진 어재연장군기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수비하던 어재연 장군이 사용한 군기로, 미군에 의해 전리품으로 강탈된 후 그동안 미국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었다. 가로와 세로 각각 4.5m 정도에 삼베 또는 광목으로 추정되는 재질로 만들어진 어재연장군기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수자기로, 매우 희귀한 군사 자료일 뿐만 아니라 근세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문화재이다.
당초 어재연장군기의 영구 반환을 추진했으나 미국 해군사관학교 측이 관련 법령이나 절차상의 사유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우선 장기 대여하기로 하여 2007년 10월 15일부터 이틀간 한미 양측이 어재연장군기의 상태를 점검한 후 대여협정서에 서명함에 따라 10월 18일 워싱턴에서 항공편으로 운송돼 10월 19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재연장군기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임시 보관한 후 10월 22일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설명회에 함께 공개되었다. 2008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실에서 특별 전시된 후 2008년 5월 이후 인천광역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전시됐으며, 2010년 이후에는 강화전쟁박물관에서 옮겨졌다. 현재 전시중인 것은 복제본이다. 2020년 반환 예정으로 알려졌으나 계약기간 연장 및 계약 갱신으로 2021년 현재에도 계속 국내에 남아 있다.깃발에 새겨진 한자 '帥(수)' 는 '장수, '장군', '우두머리' 등을 상징하는 뜻으로 '장수 수', '장군 수', '우두머리 수' 라고 한다. 여기에 '師(스승 사)' 와 글씨가 비슷하여서 한자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혼동 및 오기 등이 생길 수 있는데 오른쪽 '巾(수건 건)' 변의 위를 더하지 않으면 구분을 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두 문자 모두 병사를 감독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도자라는 뜻이 통한다 수자기의 뜻은 지휘소나 장군이 군사들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추측한다.수자기는 1871년(고종 8년) 벌어진 신미양요 때 어재연(1823~1871)의 장군기였지만 미군이 빼앗아 갔다.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것을 2007년 10년 장기임대로 빌려왔다. 2017년 임대기간이 끝났지만 2년 단위로 재계약을 거듭하고 있다. 장기임대를 성사시킬 때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수자기 반환’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미해사박물관장은 “반환은 미국내법상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측이 ‘수자기’를 문화유물로 취급하지 않고, 승전 기념으로 노획한 전리품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1814년 ‘미 해군 전리품 깃발 수집(The United Stated Navy Trophy Flag Collection)’과 관련한 의회법을 제정했다. 또한 1849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재임 1845~1849)이 미 해군장관에게 “전쟁 중 적의 군기, 색상기 등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고 보관·보존·전시를 위해 미해군사관학교를 관리기관으로 정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에따라 미 해사 박물관은 미국이 200년간 전리품으로 획득한 다른 나라의 깃발 25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해사박물관장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수자기를 반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대여는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겨놓았기 때문에 상호접촉을 통해 장기대여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돌출변수가 생기기도 했다.어재연 장군의 모자 깃털까지 노획
우여곡절 국내 전시 중이지만 수자기의 신분이 여전히 미군의 전리품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가로 413㎝, 세로 430㎝가 넘는 대형 깃발인 수자기의 오른쪽을 보면 잘려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군 본영(광성보)을 빼앗은 미군들이 개인적 전리품으로 앞다퉈 깃발 일부분을 잘라간 것이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만 노획한 것이 아니었다. 참전 장교인 매클레인 틸톤 대위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틸톤의 ‘1871년 조선에서의 해병대수륙양면작전’ 보고서).
“나는 당신(부인)에게 줄 깃털 장식과 적·황색 말털을 입수했소. 내가 조선장수(어재연)의 전립(戰笠·군복의 갓)에서 떼어낸 장식품이오.”
틸톤은 “노획한 장식품을 쳐다보며 즐기고 있다”면서 “이것은 당신(부인)과 나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해두자”고 했다. 미군은 이렇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유품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이 뿐이 아니다. 미군은 47기의 조선군 깃발과 182문의 포, 481문의 화승총을 노획했다고 자랑스레 기록했다.
인명피해는 또 어떤가. 미군은 3명 사망과 10여명 부상에 그쳤지만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포함, 350여명이 전사(조선 추산 57명)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시간 동안 조선군 200명을 죽인 것 같소…시체 더미를 보았는데 떼죽음을 당한 돼지 떼 같았소. 동료가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조선군의 머리를 총으로 쏘아서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소. 나는 ‘그건 살인 행위이니 그냥 두라’고 말했소.”(틸톤의 보고서)이정도로 대충 설명해봄
사극 전쟁씬 할땐 건들건들 불러서 고증살려서 하자
기존 소품팀분들도 대다수가 문제를 인지하시고 있습니다.
파워가 더쎈 연출쪽이나 감독이 조져버리는 케이스가 대다수라는 게 문제지..
조선군 포졸복/당파 좀...
사극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고 돈 투자해서 만드는 자본의 공정물이기 때문에 감독이나 연출진이 고증에 중요성을 두고 목매는 사람들이 아니면 제작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이것저것 희생되기 마련ㅋㅋ 촬영장 화재안전때문에 호롱불을 그 시대엔 있지도 않던 양초로 대신한다던지… 시장판매되는 촬영의상이 고증에 맞지않아 전문가를 섭외해서 의상제작을 전부 해야하는데 예산이 받쳐주질 못한다던지…
@@DogBarkingAtMoon 그래서 고증이나 퀄리티 뛰어난 작품들은 그 제작비만 천문학적으로 들어가죠..... 근본적인건 돈문제며
그렇다고 너무 고증에만 충실하면 또 드라마적 재미가 반감되기에 시청률 문제도 있구요 고증이냐 시청률이냐 에서 타협을 보면 대부분 시청률이죠 ... 시청률이 안나오면 열심히 만들어도 적자나니까요
국제관계 속에서 영원한 적은 없다.
가쓰라-테프트 조약을 체결한 미국이 한미동맹 못잃어가 되고, 한반도를 병탄한 일본이 우호국이 되는게 국제관계라는것.
시대가 지나갈때마다 항상 변화는있기 마련이죠. 역사에 얽매여서 일본을 원망하기보단 현재는 우호국, 미국의같은 동맹국으로써 같이 힘을 합쳐 나아가야한다고봅니다.
@@GaeDor 공감. 그리고 쌍팔년도니 뭐라해도 아직 그 역사에서 안 벗어났음. 지금도 이어지는 관계.
@@GaeDor 일본이 우릴 적대하고 자빠졌는데 우호국 ㅇㅈㄹ ㅋㅋ
ㅈㄹ ㅋㅋ 일본은 지금도 과거사 인정안하고 미국은 일본 편만 드는데
2차대전당시 적국이었던 독일 프랑스도 이제 같은 유럽연합에 들어가있는 동맹국이죠~
이 신미양요 이후 조선에는 영어열풍이 불었었다고 하더군요
영어가 신분상승의 역할을 했었기에 너도 나도 영어공부에 열중을 했었고
그중에는 떡장수가 출세를 해서 미국에 공사관 지금으로 치면 대사 되기도 했었죠
그당시 만들어진 영어교재 인 아학편이 현대에 만들어진 영어 교재 못지 않은 효과적인 교재 였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미군은 예나 지금이나 잘 싸우는거 같네요
장비의 차이도 많이 나지만 거기다 전술 조차도 차이가 많이 나는거 같군요
미군이 잘싸운 이유는 남북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이기 때문에 전부 실전 경험이 있었고 죄다 베테랑 급이였음 병인양요당시 프랑스군이 조선군에게 대패 했던건 왠만한 서방국가면 대부분 알고있던 사실이고
미군병사들도 조선군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건 알고있었기에 전투전 특별 해상 기동훈련에 견인포까지 같이 끌고올 정도로 독하게 준비했기에 저리 잘싸운것.
@@user-uj1hy9xc2u개소리 미군3명죽음 그것도 넘어져서 죽음
저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지 오래되지 않은 터라, 전술도 무기 성능도 상당히 발달해 있었죠.
유럽에서는 1차 세계대전에서야 본격화된 참호전도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때 했구요.
반면 당시 조선은 무기 성능이 미국에 훨씬 미치지 못하니 일방적으로 두들겨맞을 수밖에 없었죠.
진주박물관처럼 영어 자막도 넣어주시면 해외에 소개하는데 좋을 것 같네요. 영상 감사합니다.
좋은의견 감사합니다
"건들건들" 최고!
'치밀치밀'로 바꾸심이 어떠한지?
총에 대한 소개도 훌륭했지만,역사 다큐멘터리는 더 훌륭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350:3 무기체계의 선진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느껴집니다.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신 선열들께 묵념 올립니다.
그 분들이 있어,우리가 살고 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신미양요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한반도와 미국이 서로가 포를 쏜 사건
한국(조선)과 미국간의 누구하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초이자 최후의 전쟁이였죠...
@@user-uj1hy9xc2u 또 정신승리인가
ㅋㅋㅋㅋ개소리 조선임 500명죽고
미군 3명죽음 그것도 넘어져서@@user-uj1hy9xc2u
건들건들팀의 영상미, 고증은 역시 최고 입니다. !
혹시 신미양요 당시 미해병 무장에 대해 별도로 다뤄주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해당영상에서는 스프링필드 1861을 재현한 거 같은데 당시 촬영한 일부 사진에서는 레밍턴 롤링블록 등도 보이고 아직 어떤 무장을 얼마나 편성했는지, 양측 보병간 화력차이가 얼마나 였는지에 대해 인터넷에는 여러 설이 많던데 이참에 건들건들에서 정확히 밝혀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min5437749 미군 기록 사진을 보면 몇가지 병기가 혼합되어 나타납니다. 본 동영상에서도 6:53에 나오는 장면 역시 트랩도어로 개조되기 전 스프링필드 퍼커션캡 으로 고증되어 있네요...
미 상륙군 10개 중대 중 1개 중대가 해병대(Marines)였는데 이들은 착검이 가능한 스프링필드 장총을 소지했구요 나머지 해군보병(Naval Infantry)들은 당시 최신형인 레밍턴 롤링블록 카빈을 소지했습니다. 레밍턴 카빈은 후장식의 단발총이었으니 조선군의 전장식 화승총은 상대가 안됐지요. 헤드샷으로 학살 당하는 수준이었으니 치열한 전투였다는 그들의 수사는 병아리 목비틀기 수준의 상대에 대한 미안함,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미해병대 중대장 틸튼 대위의 보고서/서한에도 그런 뉘앙스의 표현이 나옵니다.
진짜.. 한편의 영화를 보는기분 와우... 어영청이랑 훈련도감의 군사들도 있는줄은 첨알았네요 원래 주둔하던 건가요? 아님 미군온다고 조정에서 보낸건가요?
어영청이랑 훈련도감은 중앙군이니 미군 쳐들어온다니 보낸러 같아요
손돌목 포격사건 이후로 로우 공사가 열흘 안에 사과하라 시간 줬을 때 조선은 강화도에 진무영 중군 어재연을 임명하고 휘하에 중앙군 5영에서 보병 각 1초씩 뽑고 훈련도감에서 1초를 더 뽑아 약 600명을 딸려 보냈죠 이때 인천부에도 포탄과 군량을 수송하고 강화에도 무기와 물자를 보냅니다 그러니 미국군의 침입이 예상된 광성보에는 최소 중앙군 정예병력 5개 중대와 진무영 부사령관인 어재연과 불랑기 등 화포 140여문이 배치돼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작정하고 파병하고 대비한 거죠
중앙군은 원래 한양 방어 위해 만든 부대라 웬만하면 지방에 대규모로 잘 안 보냅니다
@@벅구-s8o 그렇죠 중앙군은 한양방어하는데 강화도에 있었다길래 첨알아서요
@@현-p8n 적군 처들어니깐요... 강화도 털리면 한양도 그냥 털려요
광성보 전투가 미국 식민지 전쟁중 필리핀 이전 최악의 전투 였다더니 ㄷㄷ 그리고 직지심체요절은 엄연히 제돈내고 사간 건이어서 외규장각 문서와는 궤를 달리하죠
왠만한 역사강의보다 머리에 쏙쏙들어와요~ 정말 대단합니다
이건 일선학교에 보내 교육자료로 활용해합니다
단순히 머리에 속속들어오는것을 넘어...
당시 그곳에 있었던것 처럼 울분과 분노 투지등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거 같네요...
사족으로 저 신미양요 때 입었던 어마무시한 손실은 이후 고종의 친정 시기 흥선대원군의 악화 부작용과 맞물려 운요호에게 어이없게 털리게 된 배경이 됩니다..
살아남으면 좋겠지만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
내 “가족”과 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죽으리 ! 🙏
오,,, 역시 건들건들
영상을 실루엣을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정말 잘 만들었네요
우리나라가 무기를 제대로 발전시켰으면...
ㅅㅂ 눈물나네ᆢ이 땅에 다시는 이런일이 반복되지않기를ᆢ
끈질기게 지켜주신 모든 순국선열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끈질기게 지키기는 뭘지켜 ㅋ 개항도 안한 헬조선이었는데
@@레버리지-l7q 낮슬 처먹었음 디비져 자라
@@김-s6k 낮술 안먹었어 ㅋ 왜그리 발광하고 그래 ㅋ
@@레버리지-l7q 이게 발광으로보여? ㅎㅎ 재밌는넘일세 ㅋ
@@레버리지-l7q 틀딱
굿굿
영상 너무 잘 봤어요 ^^ 조회수 백만 이백만 충분히 나올 영상이구만요~
저때 적의 화력이 아무리 압도적이고 적이 막강해도 물러서지않고 싸울 정도로 군기가 잘 잡혀있던 조선군이 ㅜㅜㅜ저때로부터 몇십년만에 속절없이 무너짐… 몇백년간 전쟁을 겪어본적
없었을 조선군이 적을 앞에두고 용맹했네요.
그만큼 아주 교활하고 치밀하게 계획한것이죠.
신미양요 이후 도베르트 도굴사건 까지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새웠으며
자체적으로 힘을 기르고자 하였음
그때 일본이 윤요호 사건을 일으켰고.
외교적으로 간섭을 시작하였고
그나마 서방세력보다는 바로 옆동내 일본은 그래도 믿을수 있을거다라는 의견때문에
개화를 하였고 점차적으로 조선내에 일본군을 들이고 화폐계혁등을 시도하면서 점점 조선의 자주권 경제권을 잡아먹으려 했음...
친일파 중에서도 매국노들... 을사오적 이것들이 내부분열을 일으켰고 실질적으로 일본군이 주둔한 시점에 조선조정은 현실을 뒤엎을만한 힘이 없었고...
결국 고종은 독살당하고...
나라는 송두리째 넘어간것이고...
이런식으로 교활하게 내부에서부터 무너트렸기때문에 빼앗기게 된거죠
각종 민란들을 비롯해 신미양요 이전에는 병인양요까지 있었으니 절대로 전쟁을 안겪고 살지는 않았음
미국이 전투만 집중한 이유가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항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더군요
일본의 경우에는 차이가 나는 전투력을 보여주니까 항복을 하고 개항을 하더니만
조선의 경우에는 항복은 커녕 정말 죽을때 까지 악착 같이 싸울줄은 생각도 못했던거 같습디다.
미군의 사상자는 얼마 되지않았지만
악착같이 싸우는 모습에 질려 버려서 더이상 전진 하는걸 포기 하고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무기는 적보다 구릴지언정
정신력, 투쟁심만큼은 세계제일이었던
순국선열들의 모습에 가슴이 너무나 아픕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방향성 잘못잡은 지휘부때문에 착실한 백성들만 죽어나가는 상황이 안타까울뿐
차라리 저때 개화를 했다면 뒤늦게나마 세계흐름을 따라가서 한일합방자체가 없었을지 모르는 일
@@LuftUberSoldat 맞습니다. 하지만 저때 개화를 했다면 그또한 위험했을 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LuftUberSoldat 글쎄요... 저 무렵이면 조선말 인구 감소 등으로 인한 인프라 붕괴 등 때문에(당시 조선도 멜서스 트랩이었다는 주장도 있음) 도리어 일찍 먹힐 수도 있습니다.
경복궁 중건이라는 희대의 뻘짓으로 경제를 파탄내고 이후 명성황후가 남아있던 재정마저 지갑속 사탕마냥 지 멋대로 쓴걸 생각하면 뭐 역사는 일어날 일은 일어났겠군요
정신승리
@10:35 우리 순국선열들의 당시 집단의식에 가장 먼저 떠오른 집단기억은 왜란과 호란의 기억이었겠지. 그러니 한참 뒤떨어지는 화력에도 불구하고 싸우신거다. 외세의 침략에 고향이 불타고 가족이 죽는 광경을 본 적이 없는 어느 미국인의 눈엔 그리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신미양요부터 조선 독립운동 내용인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이병헌 . 김태리 . 유연석 . 변요한 . 김민정)도 재밌게 봤어요
내가 역사에 재미를느꼇어
진짜 고퀄이다 ㅡㅋㅋㅋㅋㅋㅋ
승패와 피해와 상관없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장점을 최대한 활용을 해서 싸웠네요.
미군 사망자 3명중 정작 조선군이 유일하게 사살한 건 단 1명(휴 맥키 중위, 성채안에서 가랑이에 총상을 입고 후송됬으나 과다출혈로 사망). 나머지 둘은 각각 실족사랑 아군오사.
교전비 씹창ㅋㅋㅋㅋㅋㅋ
350대1 실화냐?
쓸데없는 쇄국타령 때문에 대체 몇명이 피보는 거얔ㅋㅋㅋㅋㅋㅋㅋ
@@땃쥐시치 ㅂㅅ
@@강동제-w1c 팩튼데 욕하노 ㅋㅋㅋ
근데 너무 교전에 비해서 심각하게 차이나긴한다......
@@땃쥐시치 흥선이 어떤사람인지 좀 찾아보고 지랄하자 쇄국가지고 흥선까는건 드라마보고 역사배웠다고 무식티내는거임 교과서만봐도 쇄국실책보다 업적이 얼마나 많은지 나오는데 그저 까대기바쁘지 ㅉㅉ
국제정세에 둔감했던 조선.
이들이 조금만 더 힘의 차이를 깨닫고 국익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일찌감치 개화하여 당시 패권국인 영국과 협력할 수 있었고,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는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음. 오히려 Greatgame중 영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을 것.
당시 영국은 인도를 포함한 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을 컨트롤 하기도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조선은 러시아와 손을 잡음.
저강화사는데가슴이따뜨싸네요
초지진.광성보 가끔 가봅니다만 이영상을 보니 더 실감나고 숙연해집니다
자주국방은 늘 강조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매달 돈처먹는 지상파 다큐보다 훌륭함
이런새끼들 특 = 지상파 다큐 본적 없음
여..역.역사스페셜부터 보고와라 홀홀홀...
아주 신선합니다. 부라보
어릴 때 사실상 승리라고 배웠던거 같은데 처절한 패배였군요. 외침에 승리했다는 국뽕식 스토리텔링보다 패배했지만 열악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결사항전 했던 조상님에 대한 스토리가 더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승리는 맞아요 사상자 수나 피해규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략적 목표에 대한 득실이 전쟁의 본질이기 때문이죠 피로스의 승리란 말도 그래서 있죠
@@벅구-s8o 아 그랬군요 제 배움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벅구-s8o
근데 사실상 일방적으로 털려서 승리라고 보기에도 어렵죠.
그냥 점령하기 귀찮아서 물러난 건데 만약 미국이 작정하고 점령할려고 했으면 못했을까요? 그냥 굳이 그럴 가치를 못느껴서 철수한 거죠.
?승리라고 배우신 것은 아마도 병인양요일 겁니다. 그러니 국뽕식 스토리텔링이 아닙니다
@@화이팅-t2q 근데 우리 조선이 미국한테 일본이 한 것처럼 굴복하진 않았기에 물러난 것 같습니다
스무스하게 강제개항한 일본에 비해
처절했네요 조선은..
일본도 사쓰마 번이 영국하고 처절하게 싸웠음 이때 영국군 사상자도 꽤 많이 나왔고
@@user-nasanato 사쓰에이 전쟁이랑 시모노세키 전쟁 둘이 대표적인 저항이지만 사쓰에이 전쟁이 다이묘(지방 지도자)급이 중심이 되서 싸운것에 비해 중앙이었던 막부는 사쓰마가 싼 똥을 치우느냐 이리저리 움직였어야했죠. 사쓰마가 사쓰에이 전쟁에서 선전하는데 일조한 것이 오키나와에서 나온 설탕이란 존제때문인 것도 참 아이러니고요.
@@user-nasanato 조슈는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서양 연합함대의 힘을 깨닿고 선회하고요. 아이러니한게 이후 일어날 보신전쟁에서 센다이같은 지방에선 통나무에 철사를 휘감아 임시로 대포를 만드는 행보를 보이는데 각 번마다 무기 재원 능력이 재각에 막부군을 프랑스가 지원하고 사쓰마와 조슈를 영국이 지원하는 대리전의 모습을 띄우고 있었죠.
물론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역활도 있었고요. 프랑스 장교단이 잔존 막부군과 신선조와 함께 에조 공화국 멸망까지 함께한 것도 참 아이러니죠. 본국에서 돌아오라고 했는데 에조가 망할때까지 함께했으니까요.
신미양요가 터진 1871년 즈음이면 1867년부터 1877년까지 사용된 37개 별 성조기를 사용했겠군요.
6:41 맞는거 같은데요? 고증 ㄷㄷㄷㄷ
개항을 일찍 하고 힘을 키웠으면 어땠을지 에휴 아쉽다 아쉬워
당시 조정에서도 기술차이 때문에 개항을 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은 같았지만
방법과 시기 면에서 주장이 엇갈렸죠
개항을 해서 우리가 주권침탈 없이 안전하게 발전하리라 보장도 없고 저들의 의도는 분명 식민지화 시키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 그럼 차라리 지금바로 개항을 하지 말고 우리스스로 강해진후에 개항을 하자 이런 주장과
그러기에는 시간이 늦는다며 지금 개항을 하지 않으면 격차가 더더욱 심하게 벌어질것이다 라는 의견이 오고갔죠
그이후 독일의 도베르트 도굴사건 이후 서양인에 대한 멸시와 경계심이 극에 달해 서양과의 접촉을 거부하였지만 일본의 윤요호 사건이후 그래도 그동안 같이 교류가 있었고 같은 동양인이라는 믿음으로 일본에 개항을 허락했는데....이 씨벌놈들이 도와주는척하면서 뒤로는 야금야금 주권 빼았네?
엄청난 포격이고 뭐고...
조선군 장군포함 전멸 사살당하고, 미군 3명 죽었다는게 참 비참하다.
그 3명 중
한명은 허벅지 총 맞았으나,
다음날 사망
또 하나는 성 오르다 발 잘못 딛다 낙사
마지막 하나는 아군의 오발
결국 1명 죽임.
참 안타깝다
However, 신미양요 did not arouse the sense of crisis among Koreans and the possibility of reform and modernization. This is in stark contrast to the Black Ship Incident1853 in Japan.
오오 건들건들!!
중학생 때 교육받은 이후 제게는 수자기는 저의 자부심이었죠.
그때 제게 수자기는 메인화면에 주로 사용했죠.
아이러브스쿨부터 싸이월드에도 유튜브까지...
광성보 어재연 장군은 자신이 살아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혹시라도 가족들이 자신의 시신을 찾지 못할까하여 평소와는 다르게 상투끈의 색을 바꿨다죠 동생 어재순은 버선을 거꾸로 신었다 합니다.
씁쓸한 내용이네요...ㅠㅠ
남북전쟁때 보면 포부터 언덕에 배치하는데 당시 조선은 미군이나 서방의 전술을 몰랐죠.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도 끝까지 용감하게 싸운 조선군을 보고 미군들도 엄숙해졌다고 전하죠
다시봐도 눈물이 난다
건들건들 팀인가요?
그렇죠~
미군사망자 3명을 보니 ... 치열하기 보다... 학살인 듯 ...
오히려 저 정도 화력차에서 장교 포함 13명 사상이라도 낸 게 대단한 거임 화력에서 거의 10대 1 수준에 전술적으로도 퇴로 차단당한 채 포위당했으니까요
이전 광해군 대 영국 사략선이 우리 관선을 침탈하려다 실패하여 돌아간 적이 있던데 그거 다뤄주실수 있나오?
미군 사망 3명
조선군 사망 340명
미군사망 3명중 1명은 상륙중에 물에 빠져 익사
다른 1명은 아군 오사였던가
내가 몰랐었다...신미양요 당시의 조선군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우며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는지 ㅠㅠ
저당신군이의무아니다 에휴....
@@선비-c4w 내가 말하는 의무는 나라를지키는 군인의 책무를 말함이다. 에휴
울나라 역사 교육이 참 ...개선되어야 할게 너무 많다..
유럽애들 미국애들 같은 경우 기사도 정신 같은게 있어서 무릎꿇고 패했다 인정할경우 더는 공격하지않는다던가 그런 룰이 있는데... 실제 전쟁에서도 그걸 적용했음.
포로를 죽이지 않고 항복하면 공격하지않고 등등 ...이런게 있었는데..
동양에서 특히 조선이란 나라는 그런게 없었음..포로고 뭐고 사람 잡으면 목베고 껍질 벗기기 자기 맘대로 였음.
우리 역사에선 가르쳐주지않는데... 조선이 여진족 부락 급습한거라던가 그 부족 사람들 잔인하게 살해한것보면 끔찍함..
그런 입장에서 조선이란 나라도 전투에서 패하고있을즈음에는 ... 포로나 결국 전부 참수하고 죽일거라 생각했기때문에 그저 어떻게든 죽을려고 했던거임.
전쟁에서 이긴 미군이 조선 포로들을 잡아둔 다음.. 다시 조선왕실에 조선군 포로 문제에대해 얘기를 했는데... 조선왕실은 이해를 못했음..
조선군 포로를 죽이든 살리든 그건 미군 마음이지 미군이 그 포로 처리 문제를 조선에 왜 묻지?? 몰라 뭐가 됐든 우리는 너희랑 무역 개항 안하고 ..
그 조선군 포로는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이런 답변이 나왔음.. 미군은 목적 달성도 못했으며 어차피 포로는 죽일수 없으니 나중에 다시 그 포로들을 풀어줌.
그리고 조선을 떠남.
울나라에 국뽕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안타까운데.. 미군이 성을 점령하고 조선군 무기를 봤는데.. 조총이나 홍이포 ..이런거 1600년대 초에 나온 무기임..
그걸 200년동안 발전도 없이 사용했다는게 너무 문제지.. 1600년대 무기와 유럽의 1800년대 무기가 비교나 할수 있나??
일본은 에도시대 말기때 이미 유럽식. 소총이 수만정을 확보하고있었고 미국이나 영국처럼 큰 배는 아니지만 나름 똑같이 증기선도 만들었었는데..
그런 기술력과 무기가 있었으니 영국이 일본과의 전투후에 바로 동맹도 맺고 협력도 함께 했는데.
조선은 뭐 부시맨 같은 그런 기술력이었으니 나라가 망할수 밖에 없었지..
미군 사망자 3명중 한명은 배에서 내리다가 물에 빠져죽고 한명은 아군의 오사로 죽고 한명은 조선군한테 죽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네... 그렇다는 얘기가 있어요. 무력했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치뤘을 조선군이 자랑스럽습니다.
제발 그 이상한 유언비어 좀 어딨는지 알려주세요 신미양요 때 전사한 미군 3명은 모두 요새 돌격 중에 조선군 사격에 전사했고 그중 맥키 중위는 창까지 찔려서 전사했다고 논문 등에 전사자 이름까지 나와있는데 어디서 그런 개소리가 나와서 순국선열을 모욕하는지 모르겠네요
@jj h 유튜브가 참 좋긴 하네 이런 뇌에 우동사리 든 애도 씨부리고
광성보에서 죽은 미국군 3명이 오발사에 실족사했다고 개소리 써대는 인간들 때문에 팩트 체크 들어간다 'Enemy bullets whined overhead but most were most poorly aimed. None-the-less, one enemy round reached out to take the life of Marine Private Dennis Hanrahan. He was the first casualty. Standing on the wall, sword in one hand and pistol in the other, Lieutenant McKee fired two shots and then dropped into the midst of the Koreans. Almost immediately the enemy was on him, one of them shooting McKee in the groin as McKenzie, Rogers and Troy leaped from the wall to assist their commander. Nearby Private Michael Owens likewise fought on despite serious wounds. Korean Fire cut down Seaman Seth Allen of the USS Colorado as he stormed the fort.' ㅡ C. Douglas Sterner의 Shinmiyangyo란 고전적 자료에 잘 나와있음 추가로 마지막 백병전에서 부상자가 더 나오고 수자기를 탈취한 파비스나 어재연을 죽인 류크스 등도 얘기 나오니 구글링들 해보시길
@jj h 애초에 전쟁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과정이나 명분으로 풀리지 않을 때 군사적으로 해결하려고 발생하는 거임 그래서 득실을 따질 때도 스포츠나 워게임처럼 단순 산술 수치로만 봐선 안 됨 미국군 조선군 교전비를 떠나 전투 전후맥락을 살폈을 때 포함외교의 본질과 국제정세의 변하지 않는 냉정함 등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이런 역사물 보기도 하는 거임 게다가 시공간적으로도 가까운 일이기도 하고 근데 뭔 헛소리하냐 왕조국가 시절이면 그냥 아무 상관 없으니까 역사 안 배워? 개소리하는 줄 알면 좀 가서 급식이나 더 쳐먹어라 유튜브에 잼민이가 많다더니 ㅉ 더이상은 니가 글 싸도 신경 안 쓴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다 아는 내용인데도 괜히 눈물이 나네요,,,,,,,
원래 프랑스는 십자군 시절에 책 즉 지식을 약탈하는 것이 금은보다 귀한 것을 깨닫고, 약탈의 첫 번째 목표가 책이었다고 하죠.
우리 아버지 께서 중학생이 셨던 시절 70년 후반에 아버지 학교 에서 교련을 하셨던 선생님 께서 6.25전쟁 중에 지금의 백마부대 에 장교로 복무 하였는데 그 선생님 께서 지휘 하던 부대깃발을 중공군 에게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터넷 에서 백마부대 의 6.25전쟁 기록 을 위키에서 적군 에게 깃발을 탈취 당한 이야기 가 없었지만 아버지 에게 말씀을 하진 못했습니다.
진짜 우리나라 역사는 다른 나라보다
제일 한이맺힌 역사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강대국에게 얼마나 유린 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네요.
지금은 우방국이지만
프랑스, 미국, 일본 모두
경계해야 할 나라들입니다.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고
오직 국익만 있는 국제질서이니까요.
대한민국의
부국강병을 응원합니다.
신미양요 때 침략국 미군을 3명 밖에 죽이지 못했을 때 우리나라 군인은 350명 넘게 희생된 것에 분한 마음 금할 길이 없네요.
입으로만 강군 말고
실제 국제정세에 맞는 부국강국을 바랍니다.
그 이전에
전쟁없는 평화로운 국가!
남북이 함께 손잡고 외세를 이겨내는
평화통일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
우방이라 주장할뿐. 미쿡의 전초기지 역할만 할뿐. 일본은 미쿡의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
광성보에서 조선군들이 목숨을 버리며 싸운 것은 애국심의 발로이며 장렬한 죽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이면에는 서슬퍼런 흥선대원군의 협박이 있었던 것도 고려해야 함. 여기서 양이들에게 항복하면 내 한 목숨은 살지만 대원군에게 가문 전체가 멸문당할 판이니.
믿고보는 건들건들
이 정도면 어떤 역사도 진게 자랑이다
미스터 선샤인에 시작이 되는건가요?
슬프다 힘이 없으면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짓밟힌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조상님들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저 당시 조상님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우리 총이나 포는 적에게 닿지도 않고, 적군은 근대화된 무기로 우리를 압도하고....
미국 존나 스윗하네 포격 받자마자 쑥대밭 만들어도 할말없는 상황인데
6.25때 중국이 뺏어간우리 사단기 들도 다 돌려 받아야겠네요. 노획기가 중국 어느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는 말을 읽어본적 있는데. 심지어 미국 사단기도 노획됐는데, 걔네들은 그런거에 신경 안 쓰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