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마을구경] 지보면 소화리 | 백골장날 | 지보성당 | 지보교회 | 안백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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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3 вер 2024
  • 예천군 지보면 소화리
    소화리 所華里
    본디 용궁현(龍宮縣) 예하면(內下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廢合)으로 소동(所洞), 배곡(白谷), 동막(東幕), 외방화(外芳華), 덕현(德峴)을 병합(倂合)하여 소동(所洞)과 외방화(外芳華)의 이름을 아울러 소화리(所華里)라고 이름 붙였다.
    밭들, 전평(田坪), 외방화(外芳華)
    1동막고개와 가막수리의 중간지점인 남향 마을로서 만화리 방화(芳華) 바깥쪽 밭이 많은 들의 뜻으로 전평(田坪) 또는 외방화(外芳華)하며, 만화리 한골에 살던 공주이씨(公州李氏) 일부가 200여년 전 농토따라 세거한 후 지금은 50여가구 중 공주이씨(公州李氏) 외에도 함녕김씨(咸寧金氏)도 산다.
    동막고개(東幕)
    30여 가구의 남양홍씨(南陽洪氏) 집성촌이다. 옛날 주막거리에서 술을 팔던 구로파(具老婆)가 양지 바른 이곳에 술청을 차리니 술맛이 하도 좋아서 동쪽 주막이 있는 고개란 뜻으로 동막고개가 되었다고 하며, 이 고개마루에서 빗방울이 남(南)으로 떨어지면 낙동강(洛東江)으로, 북쪽에 떨어지면 내성천(乃城川)으로 흘러서 삼강(三江)에 가서야 상봉한다.
    주막거리, 수동(壽洞)
    삼밭나드리(麻田)에서 서울나들이(京津)로 가는 중간지점이다. 예로부터 행인이 끊이지 않아 행인들이 쉬어 가게 하기 위한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주막거리다. 현재는 면사무소와 초등학교와 지서가 있어 지보면(知保面)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이곳 물맛이 좋고 술맛도 좋아서 피로가 쉬 풀리므로 오래 살수 있다는 뜻으로 수동(壽洞)이라 불린다.
    배골(舟室, 舟谷, 所洞, 素洞)
    예전 용궁향안(龍宮鄕案)에 영양남씨조(英陽南氏條) 밑에 주실(舟室)로 표기되어 있으며, 농산(聾汕) 남상진(南相鎭)의 주실팔경서(舟室八景序)에 마을이 주실(舟室)로 이름하니 무엇으로 그 실(實)을 알 것인가? 그 지형이 유수(幽燧)하여 남(南)으로 장강(長江)이 둘러 있고 북(北)으로는 높은 산(山)이 팔장을 끼고 그 가운데 있는 마을을 감싸는 듯하여, 흡사 넓고 푸른 물가에 바람으로 노를 삼고 물결로 돛대 삼는 듯하니, 예전 사람이 이런 것으로 이름짓지 않았겠는가 라고 했다. 이곳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세거지(世居地)이다. 이조(李朝) 인조(仁祖) 때 남상진(南相鎭)(1607~1665)이 본시 안동군(安東郡) 풍산읍(豊山邑) 신안(新安)에 살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의 치욕(恥辱)을 보고 과거 보는 일을 폐(廢)하고 이곳 국사봉(國士峰) 아래 초당(草堂)을 짓고 채미가(採薇歌)를 지어서 벽에다 부쳤는데 이 초당(草堂)의 이름은 병정사(丙丁舍)라 하였다. 舟室(배골)이 백곡(白谷)으로 소동(素洞)으로 변(變)하였음은 배 백 휠소(素)라 하여 모두 백(白)으로 집약이 됐으며, 소동(所洞)은 소(素)의 오기(誤記)인 듯하며, 배(梨)를 연상하였음은 비약(飛躍)이다. 남상진(南相鎭)을 세상 사람은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불렀다. 마을 남(南)쪽 시장(市場)으로 뻗은 등을 뱃등이라고도 한다.
    새터(新基)
    나부산(羅浮山) 남쪽 아래 있는 아담하고 양지 바른 촌락이다. 호수(戶數)는 불과 20호의 작은 마을이나 공주이씨(公州李氏)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선조(宣祖) 때 李敬(이경)(1568~ ? ) 자(字)는 국봉(國奉)이요, 호(號)를 나암(羅巖), 관(官)은 부호군(副護軍)이고, 팔대조(八代祖) 사봉(沙峰) 명덕(明德)은 시(諡) 공숙(恭肅)이니 조선개국명신(朝鮮開國名臣)이요, 오대조(五代祖)는 진(畛)이니 임피현형(臨陂縣令)으로 단종(端宗) 손위(遜位)에 이어 군량(群良)이 취륙(就戮)함을 보고 기관(棄官) 남하하여 영천(榮川)에 정착하였는데, 유자(有子) 오인(五人)으로 끝에 아들 말손(末孫)은 선입(先入) 방화(芳華)하고, 사내(四男) 종손(從孫)의 현손(玄孫) 칙(則) 공(公)이 이곳에 비로소 입항(入鄕)하여 새로 기지(基地)를 잡았으므로 샛터 또는 신기(新基)라 하였다. 임란당시(壬亂當時)는 공(公)의 나이 25세이니 그 뒤가 아닌가 싶다. 공(公)은 나부산(羅浮山) 아래 산다 하여 나암(羅巖)으로 호(號)를 삼고 여기에 몇 간 집을 지어 나암정(羅巖亭)이라 하였다.
    덧재, 덕현(德峴), 가현(加峴)
    안백골 남서쪽 덧재고개 밖에 위치한 마을이며 각성촌이다. 동쪽으로 재궁산이 높이 솟았고, 남(南)으로는 낙동강(洛東江)이 흘러 명당이라고 하며, 덧재고개 밖에 새로 생긴 마을 터가 흡사 덧붙여진 고개마루처럼 여겨지므로 가현(加峴)이라고도 한다.
    장터, 백골(白谷) 시장(市場)
    1934년 홍수로 구마전에 있던 장터가 물에 떠내려 가자 거기 살던 사람들이 옮겨 와서 마을이 형성된 행정중심지로 소화리(所華里)와 마전리(麻田里)로 나뉘어 있으나 한 마을이다. 안백골 남동(南東)쪽이다.(예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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