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역사
진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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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과 오골성 진짜 위치
사료 고찰을 통해 고구려 안시성과 오골성의 진짜 위치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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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고려 국경은 이곳이다.
Переглядів 3,4 тис.21 день тому
사료 고증을 통해 진짜 고려 국경을 밝힌다.
고구려 비사성은 백제 관미성이다
Переглядів 2,1 тис.Місяць тому
고구려 비사성이 백제 관미성임을 사료 검증을 통해 조명한다
기자 조선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1,7 тис.Місяць тому
사료 고찰을 통해 기자 조선의 위치를 조명한다
지금 압록강의 옛 이름은 칠중하이다.
Переглядів 3,6 тис.Місяць тому
사료 고찰을 통해 현 압록강이 칠중하임을 조명한다.
아차성은 광진구 아차산성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
Переглядів 2,2 тис.Місяць тому
사료 검증을 통해 아차성의 진짜 위치를 조명한다.
문헌사료를 통해 본 고조선 실제 영토
Переглядів 2,6 тис.Місяць тому
문헌사료 고찰을 통해 고조선 실제영토를 밝힌다.
발해 동경용원부와 동모산의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2,4 тис.Місяць тому
사료 고증을 통해 발해 동경용원부와 동모산의 진짜 위치를 조명한다
발해 상경용천부와 중경현덕부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1,5 тис.Місяць тому
사료 고찰을 통해 발해상경용천부와 중경현덕부 위치를 조명한다.
명도전이 고조선 화폐인 네 가지 이유
Переглядів 2,6 тис.2 місяці тому
사료 고찰을 통해 명도전이 고조선 화폐임을 조명한다
요서 백제는 실존했다
Переглядів 2 тис.2 місяці тому
사료를 통해 요서 백제를 조명한다
발해 남경남해부와 옥저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1,2 тис.2 місяці тому
사료 고찰을 통해 남경남해부 및 옥저의 진짜 위치를 조명한다.
백제는 요동에서 건국했다
Переглядів 1,9 тис.2 місяці тому
사료분석을 통해 백제 건국지가 요동임을 조명한다
현도군과 임둔군의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8142 місяці тому
사료 고찰을 통해 현도군과 임둔군의 진짜 위치를 조명한다
발해 5경 중 서경압록부의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9782 місяці тому
사료 고찰을 통해 발해 서경압록부의 진짜 위치를 조명한다
통일신라의 영토는 요동에서 길림까지였다.
Переглядів 3,4 тис.2 місяці тому
통일신라의 영토는 요동에서 길림까지였다.
대방군의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882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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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의 정체와 위치 및 살수의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456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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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 낙랑군의 정체는?
Переглядів 134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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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간지지의 의미
Переглядів 55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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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속현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147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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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의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2063 місяці тому
삼한의 진짜 위치
고구려 국내성의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2 тис.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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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행정구역은 9주 6소경 2도이다
Переглядів 1,4 тис.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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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성의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1,4 тис.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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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한성의 진짜 위치
Переглядів 2,3 тис.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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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압록수는 혼하다
Переглядів 2,6 тис.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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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수의 위치와 낙랑군
Переглядів 2,4 тис.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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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요동에 있었다. 3편 전쟁기록으로 본 낙랑군 위치
Переглядів 2883 місяці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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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요동에 있었다. 2편 거리기록으로 보는 낙랑군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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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요동에 있었다. 2편 거리기록으로 보는 낙랑군 위치

КОМЕНТАРІ

  • @user-qn7ld1rr2r
    @user-qn7ld1rr2r 2 дні тому

    고구려 왕들과 귀족들의 무덤군과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집안이 국내성이 맞다.

  • @csh3520
    @csh3520 4 дні тому

    그놈들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요

  • @user-gd9fb1jc6y
    @user-gd9fb1jc6y 5 днів тому

    영상 국경선은 조선말~~~~입니다~~😊~~고려가, 이성계와 명나라 주원장 때문에 망해서~~명나라가 절반/이성계가 절반씩 먹었어도~~조선초 까지도 만주,요동반도, 연해주도 조선 였어요~~옛날 문헌/문서들 보세요 ~~~~😊~~우째서~~???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5 днів тому

      조선초 국경선은 서북쪽 연산파절에서 동북 선춘령이고 조선말은 언제를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초보다도 츅소됩니다. 언급한 조선국경기록 올려줄 수 있는지요. 아니면 어디에 나온다고 언급해도 좋습니다

  • @user-ky2ty7gc6k
    @user-ky2ty7gc6k 6 днів тому

    사하가 압록수 또는 소요수.마자수였군요.감사합니다.안산시가 안시성 또는 환도성였으니 평양성과 멀지않았을 것입니다

  • @user-ld2ub9rt4m
    @user-ld2ub9rt4m 8 днів тому

    👍

  • @user-qr7sy2sz6k
    @user-qr7sy2sz6k 8 днів тому

    조아요 👍

  • @user-vj5hx2sj3z
    @user-vj5hx2sj3z 14 днів тому

    백제는 산서성 요동백제입니다. 명나라 이후 요동인 요동반도에 비정하니 엉터리가 엉터리를 낳고 거짓말이 거짓말을 재생산하는 것 입 니다.(현재 우리나라 고대사학의 현실입니다) 연나라의 북쪽에 부여가 있었다 하니, 부여는 곧 내 몽골지역입니다(만주지역에 비정한 부여는 동부여) (연나라 수도가 있었다는 북경 또는 하북성 계주에는 연나라 유적이 없음) 추모가 부여를 탈출하여 남으로 달렸다하니, 고구려 창업지는 산서성 북쪽지역입니다. 추모 사후 유리왕 시절 소서노가 유리왕의 허가하에 비류와 온조 그리고 졸본부여국 시절의 종족들을 이 끌고 또한 남으로 이동하여 유리왕으로부터 한남왕 이라는 직책을 제수를 받았다 하니, 이는 곧 양자강이 만나는 산서성 남단지역에서 태행산맥의 서쪽지경에 자리잡았습니다. 이는 곧 엤적의 요서지역입니다. 이후 온조가 양자강과 발해를 따라 내려간 곳이 산동 성이며, 점차 해상왕국으로의 세력을 확대하여 22개 의 담로를 건설하는 모태가 된 땅입니다. 우리나라 사학의. 젓번째 오류는 일본인에 의한 식민사관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한국인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며 일본인 노예로서의 영원한 삶을 구가시키고 있다는 것 입니다. 더욱이 교육현장과 국사 시험의 기준 잣대가 되고 있다보니, 이를 뿌리채 드러 내어 불태우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두번째 오류는 한국의 고대사를 만주에서 찾고자 한 것 이었습니다. 이는 고려말 조선시대에 관직에서 밀 려난 주자학계열의 학자(북학파)들에 의해 주창된 후, 근대 독립운동과 연계되면서 속칭 민족주의 정서와 연결되어 발전하게 됩니다. 이들의 기본적인 사대주의 사상에 의거 연산산맥을 넘어서는 도전은 불가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조선 기득권계층(양반)들이 만주지역에서의 정통성 및 정당성 확보를 통한 지배력 확보를 위한 이론적 배경 또는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세번째 오류는 속칭 식민사학에 대응하는 재야민족사 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하북성 중심사관입니다. 이들은 최초로 반도사관과 만주사관을 넘어 최초로 대륙사관을 주창한 공로가 돗보입니다. 이들은 최초로 대륙의 지명이 옮겨진 사실을 인지하였 으나, 모두들 한반도 지향성의 방향성으로 말미암아 한계 또는 스스로의 모순에 부닥쳤습니다. 이에 바탕하여, 새로운 시각과 방향성을 가지고 연구하 는 일단의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 바, 이들은 그간에 끊겨진 사슬마냥 단편적으로 의문시되던 사슬들을 연결시키면서 그간의 추론들을 완성시키는 공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산서성 중심사관의 제2대륙사관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내용과 객관적 사료 그리고 각종 논문에 기반하여 이를 증명하고 있는 바, 대표적인 유튜버로 이기훈 선생 과 북경반점을 들 수 있습니다.

  • @user-sn4mz6fg7h
    @user-sn4mz6fg7h 16 днів тому

    서신라는 표시를 안하셨네요

  • @y-rlee7261
    @y-rlee7261 17 днів тому

    국내 학자 박선미의 견해에 대해 곡해하지 마시기를.. 중국 학자들도 결국 기자 조선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 얘기는 쏙 빼고 설명하네요 m.blog.naver.com/donghlee1001/222343374115 사기 흉노열전에는 천리? 위서 오환선비열전에서는 2천리? 무덤 양식도 일종의 문화로 매장 문화 역시 전파가 되죠 6세기 남조 양나라 벽돌무덤 양식이 백제에 영향을 주어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에 나타나고 백제 영향을 받은 아스카 지역에선 백제 양식 무덤이 나타나죠 가야 지역에서 발굴되는 것은 전이라기 보다는 철광석을 제련해서 만든 덩이쇠 형태로 발견이 되고 있죠

  • @admiralyisoonshin4995
    @admiralyisoonshin4995 18 днів тому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반드시 다시 씌여져야 합니다. 식민사관에 훼손된 부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 @user-sn4mz6fg7h
    @user-sn4mz6fg7h 18 днів тому

    아직도 한국 역사책은 쓰레기 책이라고 생각한다

  • @user-sn4mz6fg7h
    @user-sn4mz6fg7h 18 днів тому

    윤관장군이 17만 대군(20만 부름) 고리군의 집결지,출발 지역이 지금의 장춘 부근인데 장춘 이남으로 고려 국경이라고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장춘 이북이 우리의 또다른 갈래인 여진족의 영역으로 "만주"라고 불려진 곳입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18 днів тому

      고려사에 보면 고려장춘과 거란 장춘과는 단순힌 동일지명입니다. 그리고 거란 장춘은 거란국지, 요사지리지에 등 많은 사료에 거란 영토로 나옵니다. 윤관의 고려군은 현 개성에서 5일만에 북한평양을 거쳐 동쪽으로 이동한 다음에 장춘역을 거쳐 동계의 장주에서 북진해 동북 9성을 차지합니다. 이때 작전 기간은 약 55일 걸렸습니다. 너무 길어서 모두 인용하기 어려우니 고려사 윤관열전과 예종때 기록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고려군이 간 장춘이 거란 장춘이라고 말하는 유튜브가 있다면 잘못 안 것입니다.

    • @user-sn4mz6fg7h
      @user-sn4mz6fg7h 18 днів тому

      책을 보니 고리장춘은 지금의 장춘에서 서남 방향으로 꽤 떨어진 지역이라고 합니다

  • @user-oi6fv1eg6g
    @user-oi6fv1eg6g 19 днів тому

    고려의 영토는 서희의 강동육주나 흥화진의 위치 그리고 선춘령의 위치 또한 인하대 허우범 교수가 비정한 위화도를 볼때 현재 중고등학교 국사책에서 가르치는 한반도 내의 비정은 어불성설 이며 현재의 위치가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19 днів тому

    생각을 정리하느라 평어체로 쓴 글인데 그냥 한번 올려봅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19 днів тому

      [고려사가 내포하는 그 사건.] 1. [서기 1250년대 쯤을 기준으로 하여,] 고려사 서기 1250년, 고종 37년, 3월의 기록에서, 북계 창주 및 위주 지역 등이 서해도 풍주 안악군, 은율현 지역 등으로 "옮겨졌다", 라고 합니다. 즉, 옮겨지기 시작했다 혹은 옮겨진 적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고려사. 서기 1248년 (고려 고종 35년, 무신해) 3월 북계병마사 노연으로 하여금 북계 여러 성의 백성들을 모두 바닷섬으로 피난시키게 했다. ( 3월, 명 북계병마사 로연, 진사 북계제성민, 입보 해도. 三月 命北界兵馬使盧演, 盡徙北界諸城民, 入保海島.) 서기 1250년 (고려 고종 37년, 경술해) 3월 계미일, 최장저가 몽고로부터 돌아와 보고하기를, 몽고가 [고려왕의] 종친 및 홍복원의 부친을 보내라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원나라 지리 심양로편에 의하면, 이 시기에 즉 서기 1230년대 이후 계속하여, 홍복원이 심양로-요양교치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북계의 창주(昌州)가 주청하기를, [왕이 사는 곳] 근교로 들어오고 싶다고 청하였다. 그래서 그 청을 허락하여, 안악현(安岳縣 *고려사 지리3, 서해도 풍주 안악현)으로 옮기게 했다. 앞서 [북계] 위주(威州 *고려사 지리3, 북계 안북대도호부 청새진淸塞鎭.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북도 강계도호부 희천군)도 은율현(殷栗縣*고려사 지리3, 서해도 풍주 안악현)으로 옮겨 왔다. 이로부터, 북계(北界)의 백성들이 모두 서경기내(西-京-畿-內) 및 서해도(西海道)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 3월, 계미. 최장저 환 자 몽고 운, 북조 징 종친 급 홍복원부 입조. 북계 창주 청 입 근지, 허지, 이 우 안악현. 선시 위주 역천 우 은률현. 三月 癸未 崔章著還自蒙古云, 北朝徵宗親及洪福源父入朝. 北界昌州請入近地, 許之, 移于安岳縣. 先是, 威州亦遷于殷栗縣, 자차 북계주민 개 내사 서경기내 급 서해도. 自此, 北界州民, 皆內徙西京畿內, 及西海道.) 일단, 서기 1248년에 북계의 여러 사람들이 바다섬으로 피난했는데, 바다섬은 북계의 서남쪽에 있으므로, 북계의 여러 사람들이 어딘가 남쪽-서남쪽으로 와서 피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서기 1250년 전후부터 그러한 북계 피난자들이 점차 장소를 "옮겼다". 서해도 풍주 안악군, 은율현 지역 등은 세종실록지리지 기준으로 황해도 서북부-북부 지역입니다. 1-1. 또한편, 고려사 지리3 북계 서경유수관 및 안북대도호부 내용 및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평양부 내용을 본다면, 서경-평양과 관련하여 경기 6현 혹은 서경기 6현 혹은 편의상, 서경 6현이 존재합니다. 서경 6현은 강서현, 강동현, 중화현, 순화현, 그리고 삼화현 및 삼등현입니다. 이 중에서 두 개 현인 삼화현 및 삼등현은 서경 관할이 아니라, 북계 안북대도호부 관할입니다. 그렇다면, 지리적 직관상, 본래 삼등현-삼화현은 서경 6현 지역 중에서 다소 별도로 함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계 안북대도호부의 [함종현 및 용강현 및] 삼화현은 [세종실록지리지 기준으로 한다면,] 평안남도-평양부-강서현의 서쪽-서남쪽-남쪽입니다. 북계 안북대도호부의 삼등현은 북계 성주 소속이었던 지역인데, [세종실록지리지 기준으로 한다면,] 평안남도-평양부-강동현의 동북쪽입니다. 삼화현과 삼등현은 서로 뭔가 어긋나 있는 상태인데, 물론, 원래부터 그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함종현 및 용강현 등도 어딘가 남쪽으로 멀리 있는데, 역시 서경 관할이 아닙니다. 1-2. 사실은 이미 서기 1231년 시기 이후에 이미 고려 서경 관련 지역 및 고려 북계 창주 선주 등 지역들이 붕괴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다섬에 피난하여 있었습니다. @고려사, 지리3, 북계 안북대도호부 창주(昌州).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북도 창성군] 서기 1231년 (고려 고종 1_8년)에 몽고병의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성읍이 폐허가 되었다. [*사람이 없다.] ( 창주 본 고려 장정현. 정종 원년, 성 재전, 이 민호, 위 창주방어사. 고종 1_8년, 피 몽병, 성읍 구허. 昌州本高麗長靜縣. 靖宗元年, 城梓田, 移民戶, 爲昌州防禦使. 高宗十八年, 被蒙兵, 城邑丘墟.) 선주(宣州).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북도 선천군] 서기 1231년 (고려 고종 1_8년)에 몽고병사를 피해 자연도(*고려 지리1, 양광도 인주 자연도.)에 들어갔다 서기 1261년 (고려 원종 2년)에 [인주 자연도에서 나와서] [*정황상, 인주 자연도에 연관된] 육지로 나왔다. [*서기 1123년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의하면, 자연도는 대청도-소청도의 북쪽에 있다. 대청도와 소청도는 세종실록지리지 기준으로, 황해도 서남쪽 해안에 있다.] ( 선주 본 안화군. 고려초 개위 통주. 고려 현종21년, 칭 선주방어사. 고종 1_8년, 피 몽병, 입 우 자연도. 원종 2년, 출륙. 유 목미도. 宣州本安化郡, 高麗初, 改爲通州. 顯宗二十一年, 稱宣州防禦使. 高宗十八年, 避蒙兵, 入于紫燕島, 元宗二年, 出陸. 有牧美島.) @고려사 서기 1233년. 고려 고종 20년, 계사해. 12월. 최우가, 서경의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서경 반란자 홍복원이 몽고로 도망갔다. 그래서, 그 아버지 홍대순 및 아우 홍백수 및 부인과 자녀들을 사로잡았다. 서경의 나머지 백성들은 모두 바닷섬으로 이주시켰다. 서경은 마침내 폐허가 되었다. [*북계 창주의 경우처럼, 사람이 없다.] ( 5월, 서경인 필현보 홍복원 등, 살 선유사 대장군 정의 박록전, 거성반. 五月. 西京人畢賢甫·洪福源等, 殺宣諭使大將軍鄭毅·朴祿全, 擧城叛. 12월, 최우 견 가병 3천, 여 북계병마사 민희, 토지. 획 [필]현보 송경, 요참우시. [홍]복원 도입 몽고, 금 기부대순 제백수 급 기 녀 자. 실사 여민 어 해도. 서경 수위 구허. 十二月 崔瑀遣家兵三千, 與北界兵馬使閔曦, 討之, 獲賢甫送京, 腰斬于市. 福源逃入蒙古, 擒其父大純, 弟百壽及其女子, 悉徙餘民於海島, 西京遂爲丘墟.) 단지 직관적으로 충분하게, 서기 1250년대를 기준으로 하여, 북계의 함종현, 용강현, 삼화현 등은 북계 창주 및 위주 등 여러 지역들이 옮겨지는 것과 함께 마찬가지로 "옮겨졌다". 혹은, 옮겨졌을 개연성을 가집니다. 다만 서해도 지역으로 옮겨진 것이라기보다는 서경유수관-평양부 관련 지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즉, 북계의 함종현, 용강현, 삼화현 등은 서경기내(西京畿內) 지역으로 "옮겨졌다". 혹은 "옮겨진 내력"이 있습니다. 혹은 "옮겨진 내력"의 개연성이 있습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19 днів тому

      2. 이와 같이, 일단 서기 1250년대를 기준으로 하여, 북계의 함종현, 용강현, 삼화현 등이 서경기내(西京畿內) 지역으로 "옮겨졌다" 라는 내력의 개연성에 관한 사건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서기 1330년대 쯤을 기준으로 하여,] 고려사, 지리3,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순화현 내용 및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평양부 순안현 내용을 보면, 이번에는 또 그 반대의 경우로서, 서경기 6현 중의 하나인 순화현 [= 순안현]이 오히려 [북계의] 삼화현으로 옮겨져서 속하게 되었다. (이속移屬) 라는 사건이 존재합니다. 2-1. 세종실록지리지 기준으로 순화현을 포함하는 서경기 6현은 모두 평안남도-평양부 지역에 함께 모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경기 6현 등은 순화현의 그 사건에 어느 정도 모두 함께 관여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순화현-삼화현의 사건을 통해서, 어느 정도 전체적으로, 서경기 6현 등은 북계의 삼화현 등 지역에 연관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2. 그렇다면, 대략 퉁쳐서 말하기로 할 때, 서경기내 지역과 북계 지역은 서로 교차하면서 속하는 것이다, 라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서 (어떤 가능성을 가지면서) 서로 교차하면서 옮겨지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사실은 서기 1250년대에 이미 고려사에서, 본래 서경 지역 및 본래 서해도 지역 등은 거의 모두 몽고에게 잠식되었던 상태입니다. 서기 1250년대에 고려는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서기 1250년대에 고려는 그곳에서 그러한 사건을 발생시킬 수가 없습니다. 3-1. 일단,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서기 1247년 (고려 고종 34년, 정미해) 가을 7월 기록에서, 서기 1247년에 서해도 염주에 몽고군사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고려사 지리지 해주 연혁에서, 해주는 남쪽에 큰 바다가 있습니다. 송사-고려 편에서, 해주의 동쪽 1백리에 접하는 염주가 있습니다. 해주-염주는 둘이 함께 그 남쪽-서남쪽으로 큰 바다를 보고 있습니다. 고려사 절요에서 서기 1135년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이 순화현의 서남쪽 섬 지역에서 수군을 동원하여 순화현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순화현은 서경 6현의 하나입니다. 정황상, 서경 6현 순화현의 남쪽에 서해도가 곧 인접하면서 이어집니다. 순화현은 서경 6현 지역 중에서 아마도 서해안 지역 쯤입니다. 즉, 서기 1247년 이후에 서해도 해주-염주 구간의 이북에서 및 서경 6현의 서해안 지역과 어떤 그 서부-서북부 지역에서, 고려는 행정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3-2. 또한,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서기 1247년 (고려 고종 34년, 정미해) 8월 기록에서, 이제 수안현 지역 및 그 이북은 몽고의 약탈로 인해 고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서해도 곡주에 수안현이 있습니다. 고려사 절요에서 서기 1135년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이 북쪽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볼 때, 고려사 지, 병2, 역참 목록을 함께 본다면, 개성부 강음현 금교역에서 북쪽으로 가서, 그 어느 북쪽에 서해도 평주 보산역이 있고, 그 북쪽에 서해도 곡주 협계현 관산역이 있습니다. 고려사 지, 병2, 절령도 역참 목록은 서해도 봉주-절령역과 서경 지역 사이 구간에 해당합니다. 절령도 역참 목록에 서해도 곡주 수안현이 들어 있습니다. 묘청은 절령도를 끊고 차단하여 막으면서 개경 군대에게 반란하고 있습니다. 묘청이 있었던 본래의 서경은 서해도 봉주-절령역의 이북에 있습니다. 서해도는 서경의 남쪽이므로, 서해도 곡주 수안현은 서경 남쪽입니다. 서해도 곡주 수안현은 서경 남쪽이면서, 대략 서해도 봉주-절령 구간 주변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경 6현의 내륙 지역 및 어떤 중동부 지역 등 서경 전체 지역이 모두 몽고에 의해 잠식되어 있습니다. 고려는 서경 관련 지역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3-3. 그리고, 서해도 해주-염주는 바다와 접하므로, 맥락상 서해도 봉주-절령의 남쪽에 있습니다. 대략, 서기 1247년 기준으로 이미 본래의 서해도 봉주-절령 구간 및 그 이북이 황폐화되었습니다. 또한, 이제 서해도 봉주-절령 남쪽에 있는 서해도 해주-염주 구간에 몽고군사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즉, 서기 1247년 이후로, 서해도 해주-염주 구간 이북 및 서해도 봉주-절령 구간 이북에서는 고려가 행정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본래의 서해도 지역 상당 부분 및 본래의 서경 관할 전체 지역에서 서기 1247년 이후로 고려가 행정을 할 수 없습니다. 4. 그렇다면, 서기 1250년대에 북계의 함종현, 용강현, 삼등현, 삼화현 등이 옮겨진 장소는 본래의 서경 지역이 아닙니다. 어떤 다른 곳이면서 어떤 남쪽 지역입니다. 그 지역은 맥락상, 서기 1250년대에 북계의 창주 위주 등이 옮겨지기 시작하는 지역과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직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지역의 이름은 그냥 일반적으로 다소 넓게 말한다면, "서기 1250년대 북계-교치-지역"일 뿐입니다. 아무튼, "서기 1250년대 북계-교치-지역"이 존재합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19 днів тому

      5. 이와 같이, 일단 서기 1250년대에 어떤 남쪽 공간으로 옮겨진 북계의 삼화현 등 지역이 존재합니다. 혹은 그러한 내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제 서기 1330년대에 서경 6현인 순화현 등이 다시 북계의 삼화현 등 지역에 속하면서 연관됩니다. 혹은 그러한 내력이 발생합니다. 이를테면, 서기 1330년대를 기준으로 할 때, 서경 6현 지역은 그러한 "옮겨지는" 사건의 내력을 가지는 것인데, 일단 최소한 "북계 삼화현 등이 옮겨지는" 사건으로부터 받아서 역사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즉, 고려사에서 서경 6현 지역은 "옮겨지는" 내력을 역사적으로 혹은 마치 가상적으로 가집니다. 5-1. 그런데, 또한편, 그 사건은 그곳에서 발생할 수 없는데도 아무튼 발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라거나 혹은 그 공간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마치, 존재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건과 공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게 다 착각이다, 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마음 속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작은 불길을 끄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5-2. 이를테면, 고려사는 그 사건을 그러한 방식으로 기록하는 경우입니다. 그것은 굳이 말한다면, 정인지의 고려사가 그러한 사건을 누락하였다, 라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혹은, 정인지의 고려사가 그러한 사건을 누락하지 못했다, 라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6. 일단, 서기 1330년대의 서경 6현 지역은 이미 장소가 달라진 북계 삼화현 등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기 1250년대의 북계 삼화현 등은 이미 장소가 달라진 서경 6현 지역에 옮겨졌다, 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 1330년대의 서경 6현 지역은 즉 이미 서기 1250년대에 장소가 달라진 서경 6현 지역에 옮겨졌습니다. 물론, 세종실록지리지 기준으로 서경 6현 지역은 그대로 서경 6현 지역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기 1330년대의 서경 6현 지역은 사실은 더 나중에 서경6현이라고 불리게 되는 장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혹은, 애초에 서경 6현 중에 특이하게 배분된 그 삼화현 삼등현이 북계에 속한다는 상태는 어느 시대를 기준으로 하여서 말하는 것인가, 에 관한 질문이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경우, 이 이야기의 어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6-1. 조선 시대 및 세종 시대 등에 과거의 고려사를 작성하면서 그와 같이 지명의 시간 기준을 섞어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 태조실록 총서에서 서기 1258년 쌍성 사건 발생보다 훨씬 먼저의 시간에 목조 이안사가 강릉도 삼척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고려사 지리3, 동계 연혁에서 서기 1263년(고려 원종 4년)에 처음으로 강릉도 이름이 생깁니다. 즉, 목조 이안사는 나중에 강릉도가 되는 지역의 삼척으로 갔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의 단어로써 먼저의 사건과 지명을 말합니다. 6-2. 서기 2020년대에도 그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흥왕이 서울종로구 산에 갔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그 산의 비석글에서 진흥왕은 남천군주에게 갔습니다. 신라본기 서기 568년 10월에 북한산주가 없어지고 (상실되고), 남천주가 있습니다. 즉, 서기 568년 시기 혹은 그 이후에 신라 진흥왕은 남천주에 갔습니다. 남천은 고려 양광도 광주 이천입니다. 즉, 서기 1140년대 고려시대 기준으로 한다면, 신라 진흥왕은 고려 양광도 광주 이천군에 갔습니다. 고려 양광도 광주는 신라 문무왕 때 남한산주입니다. 즉,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서 말한다면, 신라 진흥왕은 남한산주에 갔습니다. 그리고, 서기 2020년대에 우리는 신라 진흥왕이 서울종로구 북한산 지역에 갔다고 말합니다. 즉, 서기 2020년대의 서울종로구 북한산은 옛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남한산입니다. 6-3.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남천주의 서쪽에 백제 옹산성(瓮山城)이 있는데, 고립된 지역이면서, 바다에서 오는 당나라 유인원을 막고 있습니다. 또한편, 고구려에 옹천(甕遷)이 있습니다. 둘 다 항아리 독의 뜻이 있습니다. 둘 다 고립된 지형이고 바닷가에 있습니다. 아마도, 삼국시대에는 두 개의 독항아리 지형이 있었고, 즉 남쪽에 한 곳이 있고, 북쪽에 또 한 곳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남쪽에 큰 바다를 가지는 지형이 아마도 두 개 있었겠는데, 즉 남쪽에 한 곳이 있고, 북쪽에 또 한 곳 있었습니다. 아마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경우입니다. 6-4. 서기 1250년대 ~ 서기 1330년대의 기간 동안, 고려사에서 서경 6현이라고 기록된 그 장소는, 아마도 아직은 공식적으로 및 확정적으로 서경 6현이 아니었을 수 있고, 단지 일반적으로 북계 삼화현, 삼등현 등이 남쪽으로 옮겨져서 당분간 교치된 상태의 어떤 지역일 뿐입니다. 즉, "서기 1250년대 북계-교치-지역"입니다. 그리고, "서기 1250년대 북계-교치-지역"은 사실은 서기 1250년대 이전의 더 먼저 과거에 "어떤 다른 이름의 지역"이었습니다. 6-5. 물론, 그러한 시대에 고려에 서경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려에는 여전히 서경이 있습니다. 다만, 고려사 서기 1260년 3월의 기록 중에, 고려 조정의 관리는 서경으로 갔는데, 그와 만나기로 하는 다루가치는 서경에 고려 조정의 관리가 안 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루가치는 본래 고려 사람인데, 어릴 때 몽고로 잡혀갔다가 어찌어찌해서 출세를 하여서 다루가치가 되었다는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출세를 하여서 다루가치가 되려면, 일단 장성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또한 몽고 사회에서 두각을 받을 정도로 승진하는 시간이 십수년쯤 필요했을 것입니다. 물론, 단지 그것만으로써 딱히 무엇을 단정하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서기 1250년대를 거쳐가는 그러한 시기에, 고려 서경은 있지만 없고, 혹은 없지만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서기 1250년대와 서기 1330년대에 북계 지역과 서경 지역이 서로 중첩하면서 옮긴다는 사건은, 비록 발생하였다고 기록하였지만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마치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되어 버렸고, 혹은 발생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은 알고 보니] 필시 그렇게 발생하였어야만 합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19 днів тому

      @@besuhof9360 대단한 통찰력입니다👍

  • @user-sj3wk9cv8u
    @user-sj3wk9cv8u 20 днів тому

    좋은 영상들 감사합니다. 궁금한건.. 아차성이 요동반도에 있었는데 396년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 때 고구려에 넘어갔다면, 475년 고구려가 한성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아차성에 보내 죽인건 어떻게 해석할까요? 5세기까지 백제 한성이 요동 반도에 머물렀다는 뜻일까요? 한성이 지금의 평양이었다고 해도 그 먼곳까지 보내서 죽인다는게..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20 днів тому

      안녕하세요 요동백제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존재했습니다. 대방은 낙랑과 붙어 있었으니 당연히 요동에 있었고 백제는 자체적으로대방태수도 있었으며 의자왕 또한 대방공작위를 받았습니다. 당시 백제는 경기도 까지 잃었음에도 대방공 작위 가졌다는 것은 대방이 황해도나 경기도가 아닌 것을 이 기록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는 요동에서 건국했다는 다른 영상 참고하시면 도움되실겁니다. 그리고 개로왕을 한성에서 바로 죽이지 않고 아단성에서 죽인 것은 아마도 결정하는데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장수왕이 나이가 있으니 전쟁 초기에만 참전하고 평양에 머물다 개로왕 포획 소식을 듣고 뒤늦게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을겁니다. 삼국사기 기록은 워낙 축약되어 있고 중간과정이 생략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당시 어떤 상황에서 아단성까지 데려가서 죽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 @user-sj3wk9cv8u
      @user-sj3wk9cv8u 20 днів тому

      답글 감사합니다. 제가 궁금한건 '언제쯤 백제가 한성(지금의 서울)을 수도로 한건지'입니다. 한성의 위치를 어디로 보시나요? 흠정만주원류고의 찬자들은 웅진을 지금의 서울로 보더군요. 그렇다면 한성이 지금의 평양이나 황해도였다는것일테고요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20 днів тому

      온조왕 14년에 말갈과 낙랑을 피해 천도했다고 기록에 나오니 이때로 보고 있습니다. 말갈과 낙랑은 요동에 있었으니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멀리 왔을 것입니다. 고구려 한성은 지금 평양인데 본래 한성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진흥왕이 한강을 빼앗았을때 일본서기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잃었다고 했으므로 한성은 한강에 있었고 평양은 양주의 남평양입니다. 이때 고구려는 북한 평양에 별도 한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제 한성은 한강 남쪽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고구려도 그렇지만 백제 또한 대부분 산성입니다. 그래서 한강남쪽의 남한산성에 백제 한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 @user-sj3wk9cv8u
      @user-sj3wk9cv8u 20 днів тому

      @@user-de4ds9ci6g 온조14년에 도읍을 한성(서울)로 옮겼다면 요동백제는 일종의 담로처럼 보시는건가요?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19 днів тому

      @@user-sj3wk9cv8u 요동백제는 백제의 고국이고 백제 그 자체입니다. 이로 인해 계속 대방공의 작위를 받습니다. 백제는 북부가 있었는데 아마도 요동백제를 말하는 것일테고 담로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 @waitgold1234
    @waitgold1234 21 день тому

    가짜역사 가르치는 교육부 없애야

  • @aoqjflr_300
    @aoqjflr_300 23 дні тому

    나는 늙은 역사학자들을 좋아하지않습니다. 그들은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시대 국경선도 모름니다. 자기들끼리 쌈박질만 일삼는게 그들에 밥그릇 전쟁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후배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잘 찾아서 밝혀주길 바람니다. 지들은 누룽지까지 긁어먹고, 후배들에게 전가시킴니다. 오랜만에 제대로된 진짜 역사 해독서를 보는군요 진짜 역사님...방송 잘봣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아요 꾹!

  • @kevindevaojoo8882
    @kevindevaojoo8882 23 дні тому

    고려는 유러시아 전체 천자국이고 우리 조상이 1800년대까지 대륙 지배민족임 1910년이후 영미프와 유x자본이 한중일 하수인을 시켜서 천자국 고려와 조선을 반도로 조작해 놨음 대륙고려는 전기눈 송나라로 고려 원종때부턴. 원나라로 조작해서 놨음 몽골제국은 없었고 고려의 북방에 살던 고구려 발해 유목민 후손 연합을 몽골제국으로 조작했음 명나라 세운 중앙아시아 차가타이 한국 출신의 몽골계 고려인 아미를 티무르 ===리성계를 주원장으로 조작해서 명나라를 지나족 나라로 조작해 놨음 지나족은 역사가 없는 우리 조상의 농경노예족 이었고 원래 배트남쪽에서 기어 올라온 남방계족임 1997년이후 호적세탁한 중공족들로 추정되는 김대중계 전라도 카르텔이 나라 다 장악하고 동북공정에 보조를 맞춰 옴

  • @user-pt6un2vf2v
    @user-pt6un2vf2v 23 дні тому

    그럼 강화도는 어디였고 이성계, 지용수가 정벌한 요동은 당시 압록강이었던 요하의 서쪽이자 요수였던 난하의 동쪽이라고 보면 될까요? 산동성 지역에 견자산과 오련산이 그대로 존재하더라고요.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23 дні тому

      강화는 현재 강화도입니다. 강화지명이 중국에도 있습니다만 그곳은 아닙니다.지명이 동일한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나라도 고성이 경남에도 있고 강원도에도 있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셀수도 없이 많습니다. 대몽항전때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합니다. 당시 몽고가 침입한 모든 지명이 한반도와 요동이었는데 무신정권이 중국동남부에 피신하는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국동부는 송나라영토입니다. 또한 인조가 한양에서 피난갈때 강화도로 갈려다 청군이 길을 막아 남한산성으로 갑니다. 강화도가 한양근처있다는 증거입니다. 강화도가 현 위치에 있다는 증거는 수백개가 넘습니다. 그런데 음모론을 잘 만드는 사람들은 강화도가 현 강화도라는 셀 수없이 많은 증거는 무시하고 지명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그기에 이상한 논리를 넣어 진짜 강화도를 가짜로 만들고 가짜를 진짜로 만듭니다.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고 이틀만에 기습해 요동성 함락합니다. 당시 요동성이 요양에 있었다는 증거 또한 수백개가 넘습니다; 그러니 요동성이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짜를 가짜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데 속으면 안됩니다. 우리 역사를 조롱거리로 만들 뿐입니다.

    • @user-ug6wg3yg2q
      @user-ug6wg3yg2q 23 дні тому

      @@user-de4ds9ci6g 강화도는 근대에 간척사업으로 섬세개를 붙여서 만들었고 쌀농사가 적합한곳이아니었습니다. 뭘좀 알고 얘길하셔야지

    • @user-ug6wg3yg2q
      @user-ug6wg3yg2q 23 дні тому

      @@user-de4ds9ci6g 강화 강도 강화도 여러지명이 있습니다. 마치 사서의 압강을 압록강으로 비정한것과같은 식민사학이군요.

    • @user-ug6wg3yg2q
      @user-ug6wg3yg2q 23 дні тому

      @@user-de4ds9ci6g 병자호란에 강화도는 하루만에 끝났습니다.

    • @user-ug6wg3yg2q
      @user-ug6wg3yg2q 23 дні тому

      @@user-de4ds9ci6g 30년을 버틸 쌀과 나무 현재강화도에선 불가능요. 그냥 주변만 틀어막아도 고립되서 아사합니다.

  • @wowpluses
    @wowpluses 23 дні тому

    고려영토 통일 신라 이어 받았습니다. 베이징. 상하이. 양쯔장 주변까지 고려 영토 였습니다. 1000% 확실함

  • @user-ww4ek6yd4x
    @user-ww4ek6yd4x 23 дні тому

    중국의 간도와 연해주와 대마도도 우리나라가 되어지길 바랍니다. 화이팅입니다.❤😂🎉😢😮😅😊

  • @user-hy2kr8bc9f
    @user-hy2kr8bc9f 23 дні тому

    선춘령 공험진이 저 위치라고 확신한다면 그럼 동북구성중 함주등의 위치역시도 현 지명 함흥시가 아니다라는 근거가 있서야 합니다. 함흥시에서 선춘령 저 위치간에 거리가 서울 부산간 거리의 거의 배정도인데 구성간 거리가 그렇게 길다라는 것도 납득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춘령 공험진이 현 중국 요령성과 러시아 연해주 국경근처라고 비정할 경우 함주 정주등의 지명도 최소한 현 두만강 유역 북한 중국 국경근처에 있서야 할 것입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23 дні тому

      선춘령은 수많은 고지도에 두만강 북쪽에 있었고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우리 기록에도 두만강 이북으로 기록했습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23 дні тому

      그리고 연해주에서 고려와 조선 유물도 발굴되었습니다

  • @user-hy2kr8bc9f
    @user-hy2kr8bc9f 23 дні тому

    그렇다면 5도양계라는 행정구역에 대해서도 다시 검토를 해야 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고려 영토가 남만주일대까지를 포함했다면 광역 행정구역이 5도양계밖에 안되었슬까요? 최소한 평안도 함경도가 별도로 존재해야 하고 양계는 압록 두만간 그 이북에 존재해야 합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23 дні тому

      양계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을 포함했습니다. 거란에게 빼앗겼던 선주, 정주 가주지명이 고려에도 있습니다. 고려가 거란에게 돌려달라고 했음에도 주지 않습니다. 이는 이들 지명이 교치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함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함주를 여진에게 돌려주었는데도 이후 함주가 함경남도에도 고려영토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동북 9성 폭이 3백리라고 나옵니다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백리에 있었기에 나머지 성들 또한 두만강 이북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24 дні тому

    고려사 지리 경상도는 북쪽으로 좀더 길었던 것 같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일부 지명이 옮겨진 것 등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 것 같고, 그냥 적당하게 지명의 내력이 그러하다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을 추적하는 것이 참 까다로운 경우입니다. 대략, 함흥 이남까지가 경상도이고, 그럴 경우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동계와 경상도로 표현되는 영역을 다 합치면 그것이 고려 경상도가 될 것 같습니다. 고려 초기 본래 동계는 함흥을 기준으로 역삼각형을 펼친 모습으로 되어 있는 상태일 것 같습니다. 고려 경상도의 영역이 대략 후한서 기준의 변진한 영역과 상당히 중첩하고, 그 서쪽에 후한서 기준 마한이 접하게 됩니다. 대략,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고려 영토라고 표현되는 영역이 후한서 기준 방4천리 삼한의 영역일 듯합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24 дні тому

      그럴 수도 있을겁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23 дні тому

      ​@@user-de4ds9ci6g 1. 고려사 지리지는 사실, 고려 초기(=전기) 지리 및 고려 후기 지리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대략, 몽고 침입 이전의 시기를 고려 전기 지리로 하고, 몽고 침입 이후에 여러 지역들이 옮겨지는 시기를 고려 후기로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중국한나라에 장안시대 전한서지리지가 있고, 낙양시대 후한서지리지가 있습니다. 전한서지리지와 후한서지리지는 기본적으로는 윤곽이 비슷하지만, 각 주와 군의 치소가 바뀌면서 조금 어긋나는 정도입니다. 아무튼 그러한 경우가 있습니다. 2.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는 그냥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럴 경우, 어떤 동일 위치의 지명이 고려 전기와 고려 후기에 서로 다른 소속으로 되면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2-1. 이를테면, 신라의 오악 중에 북악-태백산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잡지1 제사편에서, 신라-북악-태백산은 나이군에 있습니다. 고려사 지리2, 경상도 안동부 순안현에 나이군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려 전기 지리입니다. 2-2. 고려사 지리3, 동계 삼척현에 신라-북악-태백산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려 후기 지리입니다. 3. 즉, 고려 전기 기준으로 고려 경상도의 북쪽부분은 일단 최소한 강원도 삼척 지역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고려 전기 기준으로 고려 경상도의 "북쪽끝부분"은 강원도 삼척의 북쪽 너머에 있었습니다. 3-1. 고려사 지리2 경상도의 연혁 편에서, 고려 고종 시기 몽고가 침입하였을 때 화주 등주 지역 등이 몽고에게 함몰되었고, [그래서, 정황상, 그 지역(의 호족)들이 피난하여 왔을 때 교치해 주는 것을 위해서] 고려 경상도 덕원(德原) 등의 지역을 고려 동계-명주도 지역으로 소속 변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고려 경상도 덕원(德原) 등의 지역은 본래 고려 경상도의 북쪽끝부분입니다. 그리고, 고려 경상도 덕원(德原) 등의 지역은 강원도 삼척의 북쪽 공간입니다. 3-2. 조선 태조실록 총서 1번째 페이지에서, 목조 이안사가 삼척에서 배를 타고 북쪽으로 가서 도착한 곳이 즉 세종실록지리지 기준으로 함경남도-의주-의천이고, 서기 2020년대 함경남도 원산 지역입니다. (*서기 2020년대에 북한은 강원도 원산이라고 하는데, 일단 세종8도 기준으로 하면 함경남도 안변-원산입니다.) 목조 이안사의 주석 원문에, 의주 즉 덕원(宜州 卽德原)이 있습니다. 정황상, 본래 고려 경상도의 북쪽끝부분인 그 덕원(德原) 등 지역이 결국 대략, 함경남도 함흥-안변 구간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러할 것 같습니다. 이것을 증명이라고 말하려면 좀더 자세히 따져야 하겠지만, 일단 이러한 방식으로 줄거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23 дні тому

      추가적으로,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안변도호부 편을 보면, 화주 등주 등의 교치지역은 강릉도 양주 지역 및 간성 지역입니다. 강릉도 양주 및 간성을 지금 기준으로 보면, 강원도 양양 및 강원도 간성인데, 일단 모두 삼척의 북쪽입니다. 또한편, 고려 동계 간성이 고성을 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고려 동계 간성-고성을 함께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고려 동계 고성은 신라 명주 달홀입니다. 신라본기 서기 568년 10 월에 달홀은 신라 북쪽 변경입니다. 함경남도 북청 주변 조금 동쪽 마운령비의 비석글을 보면, 그 비석은 서기 568년 10월의 시간을 포함하고, 그때 진흥왕이 북쪽 변경을 순수하면서 각석했습니다. 고려 동계 간성-고성은 함경남도 북청 지역으로 연관하여 볼 수 있습니다. 강릉도 양주 및 간성 지역은 대략, 강원도 양양 ~ 함경남도 북청 사이 구간입니다. 이때, 그러한 범위를 좁혀서, 덕원을 함경남도 안변 원산으로 볼 수 있습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23 дні тому

      1. 그리고, 또한편, 사실은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안변도호부 편에서, 화주 등주 등을 교치시켰던 고려 강릉도 양주를 말하고 있는데, 그 고려 강릉도 양주의 위치에 대해서도 다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강릉도 양주는 세종실록지리지 기준으로는 강원도 양양인데,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소속의 양양 편을 보면, 양양은 본래 고려 동계 익령현입니다. 고려 지리 동계 익령현 편을 보면, 동해신사가 있습니다. 즉, 고려 강릉도 양주의 본래 위치는 고려 시대에 동해신을 제사지내는 장소에 있었습니다. 세조실록 서기 1456년 3월 28일 3번째 기사 양성지의 악진해독 발언에서, 동해신 제사는 나라의 정동쪽에서 하는 것이고, 그래서 조선의 동해신 제사는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강릉에서 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양성지의 발언에서, 고려 때는 나라의 정동쪽이 강원도 강릉이 아니었고, 그때는 함경남도 안변의 용진현 지역이었습니다. 세종실록 오례편에서도 내용은 대략 비슷합니다. 황해도 서북쪽 해안가에 서해신이 있고, 맥락상 그 대칭의 동쪽 방향인 함경남도 안변 주변 지역에 동해신이 있게 됩니다. 세종실록 오례편 서문에서 말하기를, 조선 초기에 여전히 상당부분 옛 고려의 제사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아직 모두 바꾸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안변도호부 용진현은 구체적으로 그 위치가 문천 동쪽, 의천(=원산)-남부-철관-산악의 북쪽, 그 사이에 접하는데, 결국 서기 2020년대 원산항 지역이 세종실록지리지 안변도호부 용진현입니다. 또한, 양성지의 발언에서, 조선시대 평안남도 대동강의 대칭에 있는 강물은 함경남도 안변 용진의 강물인데, 이것은 정황상 함경남도 안변-원산 사이를 흐르는 남대천 강물입니다. 맥락상, 본래 고려의 동해신사가 있었던 익령현은 함경남도 안변 용진현 지역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고려의 동해신사는 서기 2020년대 원산항 구간에 있었습니다. 즉, 화주 등주 등의 교치 지역이었던 고려 강릉도 양주 지역인 고려 동해신사 익령현 관련 지역은, 본래 그 주요 위치가 대략 함경남도 안변 원산-영흥만 지역에 중첩하면서 분포합니다. 2. 그렇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고려 강릉도 양주 지역은 함경남도 안변 원산-영흥만 지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 기준으로 화주 등주 등의 지명은 역시 함경남도 안변 원산-영흥만 지역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화주는 영흥이고, 등주는 안변입니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안변도호부의 문장에서, 고려 때 화주 등주 등의 지역이 몽고에 의해서 함몰되었기 때문에 고려 강릉도 양주 지역으로 옮겼다고 하였습니다. (* 다만, 여기에서 제가 아직 혼선을 겪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화주 등주 등 정평이남이 함몰된다는 사건은 서기 1258년입니다. 그것은 고려사 동계 안변도호부의 내용에서, 서기 1298년에서 40년 전의 사건이고, 즉 서기 1258년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미 서기 1257년에 익령현 즉 강릉도 양주는 적에게 항복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서기 1258년에 화주 등주 등을 옮기기 위한 익령현 강릉도 양주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서기 1258년에 우리가 만나는 익령현 강릉도 양주는 그 자체로 이미 옮겨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서기 1258년의 익령현은 이미 동해신사를 들고 조금 남쪽으로 옮겨진 상태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선후관계가 혼선됩니다.~) [아무튼, 혼선을 가지면서, 일단 나라의 정동쪽 동해신사는 용진에 있었다고 가정할 때,] 이를테면, 세종실록지리지를 기준으로 그대로 하는 경우, 함경남도 안변 원산-영흥만 지역이 몽고에 의해서 함몰되었기 때문에 함경남도 안변 원산-영흥만 지역으로 옮긴 것이 됩니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다만, 익령현이 이미 서기 1257년에 항복한 상태였고 조금 남쪽으로 이미 옮겨졌다는 것을 적용하는가에 관련하여, 여전히 혼선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튼 세종실록지리지 강릉대도호부 양양에는 동해신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저의 주장은 사서의 내용 즉 세종실록지리지 양양의 동해신사 존재 기록과 상충하게 되고, 온전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직관적으로, 황해도 서북쪽 서해신과 강원도 양양은 위도 차이가 많습니다. 오히려 황해도 서북쪽 서해신의 대칭은 함경남도 안변 관련 지역 쯤입니다.] [아무튼 직관을 적용하여서,] 고려 때 본래 화주 등주 등의 지역은 함경남도 안변 원산-영흥만 지역에 있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함길도 화주 등주 등은 옮겨진 상태의 것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함길도 화주 등주 등 및 기타 세종실록지리지의 어떤 내용들은 단지 그 지명의 내력을 말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고, 실상은 본래 그 지명들이 고려 시대 등 과거에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고려 때 본래 화주 등주 등의 지역은 함경남도 안변 원산-영흥만 지역보다 더 먼 북방에 있었습니다. 맥락상, 고려 시대 동계의 영역은 함경남도 함흥의 이북 공간에 있습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23 дні тому

      그렇군요. 아주 해박하십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24 дні тому

    지도에서 개사수는 엄사수입니다.

  • @yckim4901
    @yckim4901 Місяць тому

    진짜 왜곡. 관미성은 오두산성임. 대동강이 근초고왕 시정에도 백제의 영토가 아니었음. 황해도 지역 가지가 초기 백제의 북쪽 최대 영역임 고대 전쟁에서 항복의 조건이 왕국이 존속하며 사대를 하고 상국으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항복하면 . 승리한 국가는 영국 점령하는것이 아니라 소수의 병력만 두고 군대를 철수 하여 고국으로 돌아가는것임. 모든 군대는 농사를 지어야 하기 때문에 전쟁은 한 철만 하는 것임. 점령 했다가 철수 하고 다시 점령하고 하는 것임. 같은 성과 마을을 여러차례 점령하는 것임,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내용은 다 듣고 글 올리는 건가요? 그러면 백제가 대방고지에서 건국했다고 했는데 대방이 어딘가요? 고구려 평양이 북한평양인가요? 설마 일제식민사학자 말대로 평양이 북한 평양이고 대방이 황해도라고 생각하면 일제 식민사관에 물든 것입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왜 요녕성 해성시가 본래 백제 땅이라고 했을까요?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그리고 근초고왕이 낙랑공 작위받습니다. 낙랑땅이 어딜까요?

  • @user-jb2ub4kv3v
    @user-jb2ub4kv3v Місяць тому

    우리의 역사는 왜곡 되었다

  • @user-om4hj9ty3m
    @user-om4hj9ty3m Місяць тому

    식민사학자들의 없는지명도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짜역사를 가르치는 수준이 가히 사기꾼행태

  • @user-di5dg3bb3u
    @user-di5dg3bb3u Місяць тому

    광개토태왕 ㅡ 장수왕 때 더 강력한 남하 정책으로 삼한을 완전히 통일했더라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라고 상상해보지만 다 부질 없는것......우리의 영웅호걸들이 노니던 저 광활한 대륙이 지금은 짱깨들이 ㅠㅠ

  • @user-ky2ty7gc6k
    @user-ky2ty7gc6k Місяць тому

    박창화선생의 고구리사략에 백제의 시초는 온조가 한남왕,비류는 엄표왕입니다.한남은 우양,서하에 가깝고 엄표는 압록(요동해성)에 가까워보입니다.후에 온조가 가뭄으로 한남땅을 고구려에 바치고 남쪽으로 신라를 치고 내려갔다고 합니다.백제가 한남에서 요동해성과 그 남쪽평양한성을 거쳐 한산.공주.부여로 이동해온 것입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한남왕, 엄표왕은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지금 납니다. 그때는 그냥 스쳐지나가듯 읽었는데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 @dufosla2
    @dufosla2 Місяць тому

    주나라가 은나라의 고향은 조선이니 조선후로 봉해서 수도에 살게 했겠지 ..이게 일반적인데...

  • @user-xb3ye1cy6m
    @user-xb3ye1cy6m Місяць тому

    수고많으십니다 사학임들께서 대륙의 고구려 백제 신라위치가 서로 많이 달라 재야분들도 교류 소통연구하여 일치화 등 필요 사료됩니다. 그래도 반도를 벗어난 긍정해석은 나름 성과가 있네요 ^*^

  • @yoonjk81
    @yoonjk81 Місяць тому

    기자의 묘가 있는 하남성 상구시가 기자조선의 정확한 위치 맞습니다. 기자가 거기 살았으니 묘도 거기 있는 것이고 기자가 묘를 멀리 타향에다 썼을 리 가 만무하고. 그리고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제후국이지 절대 고조선 자체가 아닙니다. 기자가 죽은지 천 수백년지나 만들어진 조양,평양 등의 기자묘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묘라고 보면 됩니다. 위만조선이 기자조선의 위치에 들어섰다고 하면 당연히 위만조선도 하남성상구에 있던게 되고. 위만조선도 고조선의 제후국입니다.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도 평양대통강이 아닌 하남성 상구에서 있었던 전쟁입니다.낙랑군도 당연히 하남성상구구요. 한나라가 수십만 군대를 이끌고 한반도까지 올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당시는 중원에도 개발안된 땅이 널렸는데 그만한 병력이면 훨씬 힘을 덜 들이고도 만주와 한반도보다 기름진 땅을 개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옷도 발달이 덜 된 상태에서 중원인들은 만주와 한반도의 겨울을 견디기 힘들고, 그 중국인들이 만주와 한반도서 정착했거나 실효적으로 거주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중국인들이 만주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5000년역사를 통틀어 100년남짓밖에 안되는게 팩트이고요.

  • @AlexLee-ob5uf
    @AlexLee-ob5uf Місяць тому

    양나라 몽현은 섬서성 한성 남쪽에 있었고, 태원은 감숙성에서 섬서성, 산서성으로 지역명이 이동하였습니다.선우국(중산국)은 섬서성 북쪽에 있었습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기자묘가 산서성에도있으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양나라가 섬서성 한성까지 영토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상하네요. 그리고 고조선 강역을 감안하면 섬서성에 기자가 갔으면 조선에 갔다고 말을 할 수 없으니 산서성은 아닌 것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실제로 기자묘가 상구시에 있다합니다.

    • @AlexLee-ob5uf
      @AlexLee-ob5uf Місяць тому

      @@user-de4ds9ci6g 지금의 중국의 지명은 거의다 옮겨진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역사서에는 하남이라고 하면 현재의 하남성으로 인식을 하지만 하남,하북,하동 또한 모두 지금의 섬서성내에 있었습니다.

    • @ch-ob2hg
      @ch-ob2hg 23 дні тому

      ​@@AlexLee-ob5uf지명이 옮겨졌다면 근거를 대면서 설명해야 합니다 석가장시 방문시 중산국의 유물(특히 山자모양의 유물)유적은 어떻게 설명하나요.

  • @dufosla2
    @dufosla2 Місяць тому

    수고하셨습니다.근데 한반도의 길이 수만석의 식량을 옮길만큼 길이좋았을까요..신기 하네요 요동에서 경주까지 가서 쌀을 보급 받다니..전화도 없이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지금보다는 당연히 길이 안좋았을겁니다. 그럼에도 당태종군사는 장안에서 4천리길 요동에 왔으니 정말 힘들었을겁니다. 옛날에는 역참을 두어 파발꾼이 쉴새없이 통신을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보다는 조금 빨랐을겁니다. 아주 오래전 논산에서 100리 행군이니하면서 밤새 걸었던 기억이 나네요. 발뒷꿈치 까져서 제대로 못 걸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때도 정말 고역이었을겁니다.

  • @user-om4hj9ty3m
    @user-om4hj9ty3m Місяць тому

    기자가 평야에 있다고 한 정약용이또한 또라이다

  • @kickmyass9115
    @kickmyass9115 Місяць тому

    주류사학계는 예전에는 일본 지금은 중국의 돈을 먹으면서 새롭게 우리가 찾고있는 강역에 대한 자료들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태를 보이는 매국을 자행하는 집단임니다.

  • @kevin60to30
    @kevin60to30 Місяць тому

    아주 근거가 있고 논리적이며 학술적입니다 종래 소위 식민사학파 주장은 논리비약이 심하고 결정적 근거들 대부분 행정서신 죽간 정재현신사비 들입니다 이또한 공개적 발굴 유물이 아니고 발굴자의 일방적 주장으로 의심이 안갈수가없으며 점재현신사바도 어린아이 키보다 작고2000년간 들판에 그렇게 서있는데 아무도 모랐다는게 이해가 가지 안씁니다😅 일본 고고학이 저지른 작태를 보아도 그렇고 더구나 일본제국시대 관제교수들 장교들 진정성을 어찌믿고 그많은 사서지리지기록을 부정하는지 현 이병도 문하생들의 무식이 정말 놀랄 따름입니다

  • @user-ky2ty7gc6k
    @user-ky2ty7gc6k Місяць тому

    봉황성은 요동개주였고 멸망전 고구려의 경주(부소갑)였으며 발해의 옛동경였으며 고려초기(919~1017)의 수도였습니다(옵니버스한국사:이진우) 이곳을 칠중성으로 보면 신라.고구려.백제.양맥말갈의 국경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적절한 곳입니다 칠중하가 현압록강을 설명하는 올바른 해석인듯 보입니다

  • @user-uk1nk1do1l
    @user-uk1nk1do1l Місяць тому

    오늘도 좋은 내용을 알았네요! 최근 여러분들의 연구를 종합하면 고조선의 국호는 아사달이고 평양은 고대로부터 동이족의 중심 수도였고 하며 북경 부근에 있었다고 합니다. 요동이라는 지명도 평양이 이동함에 따라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네요! 지금의 평양은 고구려 때 삼대 도성 중 하나였던 한성이었다는데 백제의 한성을 혹시 고구려가 점령한 것인지는 밝혀진 것이 없네요! 유물 발굴 중 주춧돌인 초석의 글귀에 한성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네요!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봉황산성에 대한 설명 빠져서 추가합니다. 봉황산성은 둘레16킬로미터의 최대규모 산성으로 대진이라는 기록과 부합합니다.

    • @admiralyisoonshin4995
      @admiralyisoonshin4995 18 днів тому

      둘레가 무려 16km의 대고구려 산성이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였네요.

  • @user-hy2kr8bc9f
    @user-hy2kr8bc9f Місяць тому

    3세기 고이왕이후 대폭 업그레이드 되는 백제상황에 대해서 제 생각은 삼국사기의 온조때 백제건국은 타당하다고 보고 온조백제는 요동백제에서 기원했다고 보기에 고이왕때 요동백제가 한반도 수도권으로 와서 한반도백제가 처음시작한것이 아닌 이미 있었던 한반도백제를 보다 업그레이드 시킨것이 가능했다고 보아야 타당합니다. 만일 한반도백제가 그 이전에 없었다면 요동백제가 한반도 수도권지역을 정복해서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라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일까요? 그리고 백제강역을 요동에서 한반도 서북부 서해안권전체를 포괄한다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그리되면 황해도, 평양일대, 의주일대등의 경의선철도라인이 모두 백제영역이어야 한다는데 그렇다면 기존 사서상의 고구려영역과도 충돌이 되는 것이죠. 그리해서 수도권 온조백제는 일종의 외부 해양세력의 정복국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동에서 배를 타고 와서 정복한 형태이고 처음 온조시대때에는 성읍국가로 출발해서 점차 세력을 키워서 큰 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온조계와 고이왕계간의 왕권다툼설에 대해서도 온조계와 후대에 요동에서 지원온 세력간에 세력다툼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삼국사기에 온조 14년에 천도했다고 나옵니다. 말갈과 낙랑을 피하고 싶어서였죠. 그럼 당연히 먼곳으로 가야했을겁니다. 다음 영상에 칠중하에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백제 건국 초기에 칠중하에서 백제와 말갈이 싸웁니다. 칠중하가 임진강이라고 하지만 칠중하는 현 압록강입니다. 압록강에서 싸웠다는 것은 백제가 초기에 요동에 있었다는 다른 증거입니다. 그리고 흠정만주원류고에 사비성이 있던 해주를 백제가 먼저 차지하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빼앗았다고 나옵니다. 이또한 백제가 요동에서 건국한 증거입니다. 백제가 천도한 시기는 삼국사기 기록대로 온조왕 14년으로봅니다. 옛 기록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후세대가 무슨 근거로 이를 뒤집겠습니까. 물론 상당한 근거가 있으면 모르겠습니다만,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사비성이 아니라 비사성입니다

  • @user-hy2kr8bc9f
    @user-hy2kr8bc9f Місяць тому

    어떤이는 백제 요동건국설을 인정하면서 그 급부로 온조가 건국한 한반도백제는 3세기이후에나 성립되었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즉 요동에 건국한 백제가 한반도 수도권으로 건너와서 고이왕시기에 한반도 백제를 세웠다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서울 송파구 일대 적석총을 내세웁니다. 북방계 묘의 출현으로 그 근거를 세워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이왕 전의 한반도백제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설을 수긍해야 할까요?

  • @besuhof9360
    @besuhof9360 Місяць тому

    1. 신라 삭주는 본래 상당히 먼 북방이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지리에서, 삭주는 가탐이 말하는 맥국이라고 하는데, 낙랑동쪽예맥의 맥입니다. 한서지리지 낙랑을 심양-대련 구간의 어떤 동서 주변이라고 하면, 대략, 신라 삭주는 심양-신의주 지역에 대해서 어떤 동쪽 공간 쯤을 포함합니다. 삭주에 북원경이 있으므로, 북원경은 상당하고 충분하게 북쪽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2. 세종실록 원주, 고려사 양광도 원주 편 등을 보면, 본래 원주는 북원경인데, 여러 변천을 겪다가, 심양왕-충선왕 때 거의 도태되었다가, 공민왕 때 복원되었습니다. 서기 2020년대 지리 기준으로 남한강-여주 주변 섬강-치악산 지역이 세종실록 원주입니다. 3. 남한강-여주-섬강-치악산 지역은 본래 경상도 안동부 관할 지역의 북쪽 부분 쯤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단 느낌상 신라 상주 영역이 본래 좀더 북쪽이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서기 1170년대 및 서기 1190년대에 고려 명종 때 남적 반란 집단이 황려현 여주 지역에서 활동했고, 그러한 시기에 안동부가 조정을 도왔다고 합니다. 연관성이 있을 것입니다. 공민왕 때 원주를 복원하면서 안동부를 좀더 남쪽으로 이전 확장하는 경우일 것 같습니다. 4. 고려 북계 숙주는 고려 평원군입니다. 이것은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숙천입니다. 본래의 평원군은 평안도 지역보다 먼 북쪽 고려 북계 지역에 있었을 것입니다. 5. 아무튼 고려 평평언덕-평원군과 고구려 우수주 평평언덕-평원군은 그 상형문자를 보더라도 글자가 동일하고, 이때 고구려 우수주 평원군이 즉 신라 삭주 북원경입니다. 6. 고려 태조 왕건이 본래 고려의 평원군을 바꿔서 북계 숙주로 하였다고 합니다. 태조 왕건 이전에 본래 고려 평원군이라면, 그것은 결국 궁예 양길 시대의 고려 평원군인 셈입니디. 아마도 혹시, 발해가 고려의 이름을 가지는 어떤 마지막 시간 쯤에, 양길 궁예 평원군과 신라 삭주 북원경이 중첩하는 상태가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혹은 뭔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삭주가 춘천이 아니라 휠씬 북쪽에 있었을 것이라 나름 의문을 품고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양맥이 태자하 유역에 있었는데 맥국이 춘천에도 있으니 당시 맥국이 두개인것인지 아니면 태자하에 있던 양맥을 맥국으로 불렀을 가능성에 대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원고에도 적어놓긴 했습니다. 삼국유사에도 맥국위치에 대해 두가지 의견을 올려놓기도 했지만요.~

    • @besuhof9360
      @besuhof9360 13 днів тому

      @@user-de4ds9ci6g 다시 생각해 보니, 고려 원주 북원경과 고려 북계 숙주는 지리적으로는 관련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단지 평원군이라는 이름이 원주와 숙주 모두에게 있을 뿐인 것 같습니다. 고려 지리가 단순하지가 않네요~ 제가 너무 단순하게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신라 한주 소천군에 양근현과 황려현이 있는데, 양근현은 고려 광주에 있고 황려현은 고려 원주에 있으므로, 원주와 광주는 서로 접해야 합니다. 원주는 광주와 함께 그냥 지금 위치보다 적당하게 조금 북쪽에 있었던 경우인 것 같습니다. 궁예 철원을 고정할 수 있다면, 양길은 궁예 철원의 동쪽 방향 쯤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려 춘주 즉 신라 삭주 본현이 어딘가 상당히 먼 북방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고려 춘주를 고려 동계 안변부 (등주)에 속하게 했었다고도 했는데, 사실은 본래의 등주가 함경남도 남부가 아니라 어떤 먼 북방이 되는 것만큼, 마찬가지로 고려 춘주도 먼 북방이 되는 경우인 것 같습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13 днів тому

      @@besuhof9360 그렇군요.

  • @waitgold1234
    @waitgold1234 Місяць тому

    책보고 문사 쿠릴타이 장두구 이기훈 님의 유투브 보면 대륙에 신라가 있었음..지명과 사서가 일치한다..식민사학으로 역사를 왜곡한것을 지금도 교과서로 가르친다..꼭 바꿔야 한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대륙신라 사서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올려줄 수 있나요?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잠시 그 채널 들어가 봤는데..... 뭐라고 말 해야할지 난감합니다. 그냥 웃음만 나오네요. 그 쪽에 빠졌으면 다른 말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설명안할테니 여기와서 이런 글 올리지 마시길

  • @bangbang-if3ey
    @bangbang-if3ey Місяць тому

    저의 생각과 하은주 시대의 강역이 얼추 비슷한 유튜브 영상이 있어 남깁니다. 이덕일 선생의 영상입니다.(물론 저의 생각과 모든 것이 일치할 순 없습니다.) 참고로 이전에 주고 받았던 내용의 답변을 남기면 노나라 동쪽에 공자가 뗏목을 타고 가고 싶다던 곳은 황해 건너 한반도가 아니라 노나라의 동쪽 산동반도의 동쪽 지역으로 생각합니다 . 저는 "고대"중국 왕조의 주된 역사 인식이 한반도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물론 일부는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관련 링크 - ua-cam.com/video/GnEEUdWle9k/v-deo.html 저의 생각엔 많은 병력이 통일신라 이전까지 좁은 황해도 건너기 어려웠을 것이며 특히나 북위나 당의 10만 이상의 병력이 황해(중국의 동해)를 건너 전쟁을 수행하기엔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기술적, 군사전략적으로) 심지어 소정방이 건넜다고 사서에서 이르는 시기는 장마와 태풍이 오가는 계절입니다. 큰 배 한 척에 100명이 타도 십만이면 1000척이고 열 번을 번갈아 건너도 150척은 있어야 합니다.(노꾼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태풍이 오는 계절엔 건너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상식입니다.) 또한 사서에도 진이 제후국을 통일 후 사수와 회수 지역의 이민족을 흩어버리고 백성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제나라 동쪽에 여전히 이민족(즉 동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땅을 지배했다고 하지 않고 흩어서 백성으로 삶았다는 내용은 국경이 여전히 동쪽의 대해(동해, 발해)에 미치지 못 했을거란 저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백제 도읍이 중국 대륙이란 의미인 것 같은데 북위야 기병이라고 했으니 선박으로 불가능합니다. 이건 백제가 요서에 실존했다는 다른 영상에서 설명했습니다. 기록이 명확하게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반대로 백제 사비성이 중국에 있었다면 신라는 당시 어떻게 5만 군사로 황해를 건너갔을까요? 왜는 백제를 지원하기위해 어떤 방법으로 황해를 건너 수만 군사를 중국 대륙에 보냈을까요? 그리고 왜는 어떻게 해서 대방에 가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을까요? 대방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는지요? 기록에 당나라 군사가 등주에서 배를타고 바다를 건널때 선박이 너무 많아서 그 길이가 천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백제가 남조로 부터 받은 성양, 광양 태수 등의 기록에서 백제 영토가 중국동부에도 있을 가능성 있습니다. 하지만 백제 사비성이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다른 수 많은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박창범교수가 천문최적관측지로 중국대륙이라고 주장한 것 이미 다른 천문학자들에의해 엉터리인 것 드러났습니다. 대륙백제니 대륙신라니 하는 것 흥미있는 소재이긴 분명한데 이런 주장은 기록에 의해야합니다. 고대에 귤이 무주에 있었다느니 하면서 중국 남부에 신라에 있었다고 주장을 하기전에 고대 기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 한반도 서해안이 많이 잠겼다는 사실도 같이 설명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말 안하고 오해만 불러 일어키게 하죠. 역사는 기록의 학문입니다. 주류사학계가 욕 먹는 것은 기록을 무시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역사를 재단하기 때문입니다. 일이 있어서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요동군 속현을 모두 옮겼다는 분위기라고요? 주류사학계가 그런다는 건가요? 무려현은 의무려산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어디로 옮겼을까요? 요대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공격할 때 현 요하를 건너고 요동성을 포위하는데 요대는 요동성 남쪽에 있었죠. 이런 사실은 주류사학계라면 기본적으로 알 터인데 그런분위기라고요? 주류사학계가 이것도 모르지 않을텐데 그런 분위기라면 이해가 안되네요.

  • @uhmmaa3
    @uhmmaa3 Місяць тому

    @user-de4ds9ci6g 열거하신 요동의 속현을 옮겼다고 인정하는 분위기라는 뜻입니다. 한서지리지를 달달 외웠을 시대에 방위에 맞춰 본토지명을 옮긴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으니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최근엔 관내인 조백하를 요수로하고 고구려를 밀어내 변방국화 하려는 것으로보입니다. 두고보면 알게 되겠죠. 한중에서 현 요양까지는 거의 대륙을 건너듯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개가 웃을 지경이니 그나마 이뤄놓은 공정마져 흔들릴수 있다고 본듯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공자장학그룹은 현요동을 방어해 고구려백제신라가야,월나라까지 반도에 밀어넣는걸 중단하진 않습니다. 조백하를 요수로 옮기려는게 보인다는거죠.

  • @uhmmaa3
    @uhmmaa3 Місяць тому

    요즘은 식민사학계에서도 저곳의 요동은 명나라 이후 옮겨온 것이라고 보는듯 하네요.

    • @user-de4ds9ci6g
      @user-de4ds9ci6g Місяць тому

      식민사학계가 그런다고요? 그러면 낙랑군 재평양설을 포기하는 것인데요? 요동군과 낙랑군은 접해있었습니다. 요동군이 요서에 있으면 낙랑군도 요서에, 요동군이 북경에 있으면 낙랑군도 그곳에 있어야합니다. 한서지리지 유주조를 읽으연 분명합니다. 요동군 속현에 요양, 건안, 안시, 요대, 거취, 무려, 험독, 신창현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현 요녕성에 있습니다, 이중에 양평, 신창, 안시, 신창현 등은 요서로 교치되기도 했징산, 의무려산에 있던 무려현과 요하 하구에 있던 험독현은, 그리고 요대현은 교치되지 않고 그대로 현 요녕성에 있었습니다.요동이 다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무려현, 요대현, 험독현, 요양현을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냐고 물어보면 답을 못할 것입니다. 주류사학계가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요동군 속현을 다른 곳에 비정할만큼 그리 멍청하지 않을 겁니다. 바둑으로 치면 그래도 프로입니다. 요동이 한사군 설치할 때 이미 옮겨왔는데 누가 태행산맥이니 어쩌고 하면 바둑으로 치면 입문 단계인데 주류사학계는 비웃을겁니다. 한서지리지도 제대로 안 읽고 주류사학계와 토론이 될까요?

    • @uhmmaa3
      @uhmmaa3 Місяць тому

      @@user-de4ds9ci6g 열거하신 요동의 속현을 옮겼다고 인정하는 분위기인거 같아요. 관내인 조백하를 요수로하고 고구려를 밀어내 변방국화 하려는 것으로보입니다. 한중에서 현 요양까지는 거의 대륙을 건너듯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개가 웃을 지경이니 그나마 이뤄놓은 공정마져 흔들릴수 있다고 본듯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공자장학그룹은 현요동을 방어해 고구려뱃제신라가야월나라까지 반도에 밀어넣는걸 중단하진 않습니다. 조백하를 요수로 옮기려는게 보인다는거죠.

    • @uhmmaa3
      @uhmmaa3 Місяць тому

      ​@@user-de4ds9ci6g열거하신 요동의 속현을 옮겼다고 인정하는 분위기인거 같아요. 관내인 조백하를 요수로하고 고구려를 밀어내 변방국화 하려는 것으로보입니다. 한중에서 현 요양까지는 거의 대륙을 건너듯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개가 웃을 지경이니 그나마 이뤄놓은 공정마져 흔들릴수 있다고 본듯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공자장학그룹은 현요동을 방어해 고구려백제신라가야,월나라까지 반도에 밀어넣는걸 중단하진 않습니다. 조백하를 요수로 옮기려는게 보인다는거죠.

  • @besuhof9360
    @besuhof9360 Місяць тому

    다른 편에서, 평안북도 지역 등에 고구려 한성 남평양 지역이 있었습니다.~ 대략, 신라 김춘추가 배를 타고 당나라에 다니는 해상출구는 황해도~경기도 사이 구간이 아니라, 아마도 평안도~황해도 사이 구간이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 신라의 해상출구를 차단해야 합니다. 그 시기에, 고구려는 평안남도 동남부 및 황해도 동북부에 걸친 산악 지역을 공략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